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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프란체스카, 르네상스,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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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 생애

수학을 사랑한 프란체스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루살렘에서의 성 십자가 발견과 확인>, 1452-1466, 프레스코화, 747x356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1415년경에서 1492년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로서 전통적인 종교 장면을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입니다.그는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작가로서 의 입지가 구축되었을 때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생을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그는 오랫동안 유럽 화단에서 잊혀진 존재로 있다가 근대 미술가들에 의해 그 가치가 발견되면서 20세기 비평계에서는 15세기 최고의 화가 로 평가되었습니다.피에로는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와  가까운, 작은  시골  마을  산세폴크 로에서  구둣집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지방의  화가였던 ‘안토니  디  지 오반니  당기아리’라는  사람으로부터  그림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라는  이름이  1432년  즉, 그가  열두 살이었을 때와  열여덟  살이었을  1438년  두  차례에  걸쳐  안토니오가 작업을  하고  대금을  지급  받았던  문서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439년, 피에로는  화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조수로  활동하여  피렌체의  산테지디오  교회의 벽화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베네치아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르네상스 양식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노는  색채와 빛을  강조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피에로 또한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과 접촉함으로써 색채와  빛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의  기초를  세우게 됩니다.피에로와 베네치아노, 두 사람의 그림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피에로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그 리스도의 세례>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속죄>, <성 히에로니무스와 기부자> 등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피에로는 마사치오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실제로 그 당시 거의 모든 미술가 들은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마사치오가 그려놓은 작품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피에로는 마사치오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몸짓과 엄숙한 분위기 그리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 등을 배웠을 것으로 예상됩니다.피에로의 작품은 초기의 <미제리코르디아의 성모>에서 만년의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성모>에 이르기까지 맑은 색채와 위엄 있고 당당해 보이는 인물의 표현 등으로 그 시기에 보기 드문 획기적인 양식을 보였습니다. 특히 명석한 빛의 처리로 그림의 깊이를 더해주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많은 이 들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수학적으로 남다른 재능을 가졌던 그는 비례와 균형 그리고 질서에 대한 탐구에 몰입하여 자신의 이론 을 만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수학적으로 정립된 이론들을 어떻게 작품으로 옮 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했습니다.이에 따라 그의 생애 말년에는 그림도 다수 그렸으나 그림보다 주로 기하학과 수학에 열중했으며, 회 화에 기하학적 원근법을 적용하는 방법을 기술한 <회화에서 원근법에 관하여>를 집필하여 르네상스 미술과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기하학자인 유클리드의 방법론을 기초로 한 것으로 기하학, 균형, 원근법 문제와 관련된 삽화도 들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이론을 토대로 완전한 비례 개념을 다룬 <5개의 정다면체에 관하여>를 썼으며, 수학과 대수학의 기초 지식을 실생활에 이용하는 방법을 담은 <주판에 관하여>도 집필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작품 <예루살렘에서의 성 십자가 발견과 확인>에서 수학적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요. 보시는 바와 같이 균형이 잡혀있는 구성과 치밀한 계산을 통하여 원근법을 구사하였습니다. 또한, 단순화된 형태를 주로 사용하여 기하학적 도형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맑고 부드러운 색채 표현으로 정 적인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에로의 원근법은 색채, 형태, 윤곽선의 명확성까지 조합된 것이었는데요. 빛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원근법에 근거하여 그림자를 이용해 견고함과 깊이감을 표현했으며, 이는 고요함과 종교적 장엄함의 효과를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피에로는 원근법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그의 논문에 대해 전해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책을 포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피에로의 그림은  처음에는  독창적이기보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감정  없는  그림으로 폄하되어, 생전이 
나  사후  직후에  중부  이탈리아  미술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그러나 16세기 무렵 회화에 과학적인 표현 방식을 정립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회화와 건축의 대가로 높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르네상스 회화와 건축에 적용되었으며, 20세기에는 그의 작품 이 지닌 시적, 미학적 특질이 재조명되면서 고도의 수학적 기법과 미학적 호소력이 완전한 조화를 이 룬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2. 회화  속에  숨겨진  원근법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1444년경, 목판, 82x59cm, 팔라초  두칼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부활>, 1460, 프레스코화, 225x200cm, 산세폴크로 시립미술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세례>, 1450, 패널에  유채, 116x168cm, 런던내셔널  갤러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 가장 완벽한 원근법을 구사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미술사인 로베르토 롱기는 그의 작품에 대해 형태와 색채의 완벽한 원근법적 종합이라 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그러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속에  어떠한  수학적  기법이  들어있을까요?먼저 수학적 기법을 사용한 피에로의 대표적 
인 작품으로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가 있 는데요. 이 작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 기 전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후경에는 예수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 책형을 가하는 병사들이 있고, 전경에는 누 구인지 확실치 않은 세 남자가 서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예수의 수난과 관계없어 보이는 전경의 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의도하 는 것인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 인지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 든 간에 수학적으로 정확한 구성과 쉽게 해 석되지 않는 점이 현대의 관람자를 계속 끌 어 당기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담은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감돌기도 합니다. 단출한 색채를 통해 미묘한 색조 변화를 표현했으며, 여러 개의 광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원근법을 구사하였습니다. 또한 소실점을 예수에게 놓던 당시의 종교화 표현에서 탈피하였습니다. 소실점을  예수에게  놓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들  수  있겠는데요. 
작품을  보시면  원근법의  소실점이 예수의  머리로  모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에 반해 피에로는 그림 중앙에 소실점을 놓음으로써 예수에게 구성이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고 균형 있고 안정감 있는 구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됐다고 평가되어지는 이 그림은 오늘날 형식적으로 가장 복잡하고 완벽한 그림이며,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그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완벽한 기하학적 구도를 비롯하여 빛과 색채를 탁월하게 사 용한 작품으로 <부활>이 있는데요. 화면은 정확히 3등분 되 어 화면의 3분의 2는 예수에게, 3분의 1은 졸고 있는 로마 병 사들에 할애되었으며, 예수를 정점으로 하여 로마 병사들이 정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위풍당당한 자태와 밝은 빛으로 표현된 예수, 그리고 잠이 든 채 어둡게 표현된 로마 병사들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종 교적 엄숙함과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또한 수직으로 이등분되어 왼쪽 절반은 겨울 풍경을, 오른쪽 절반은 여름 풍경을 묘사하였으며, 아래쪽의 병사들에서 위 쪽의 예수로 올라가는 시선 처리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암시 하고 있습니다.피에로는 경비병들은 석관 아래에 잠든 모습으로 표현하여 부활한 예수에게 모든 시선이 우선적으로 이끌리도록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피에로는 왼쪽에서 두 번째, 얼굴을 정면으로 하고 있는 경비병을 자화상으로 그려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439년, 피에로는 당대 신학적 논쟁의 현장을 피렌체에서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피렌체에서 공의회가 열렸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 삼위일체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격과 위는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신학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었기 때문이지요. 신약 성서에서 요단강에서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사건에서 성령이 언급되었으며, 예수가 세례를 받은 사건은 네 권의복음서에서 계속 언급할 정도로 기독교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문제로부터 파생되어 이와 관련된 예수의 세례가 미술의 소재로 그려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세례> 입니다.선명한  빛이  연출하는  밝고  명쾌한  분위기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회화적인  특징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볼  때  액자  틀  모양에  주목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철저한  기하학적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요. 전체적으로 원과  사각형의  만남으로  연출된  구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의  구도는  그림의  상단부에, 사각형은  그림의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은  그  조형성으로 말미암아  영원과  완전성을즉, 천국을  의미하며, 사각형은  각진  꼴이  유한의  세계, 즉  인간의 세상을  상징합니다.
원의  중앙이자  사각형과  만나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빛과  성령으 로  존재하시니  곧, 하늘의  왕, 사각형의 중앙에는  세례를  받는  그 리스도가 계시니  곧, 땅의  왕임을  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나무들의  배치를  통해  전경과  중경  그리고 원경에  이르는  공간이  전개되고  있으며, 저  멀리  보이는  언덕길은 공간적  깊이를  더해줍니다. 성서의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는 이 사건을 그리면서 피에로는 세 명의 천사들을 마치 세례 장면의 증인처럼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의 옷을 들고 있는 역할조차 하고 있지 않으니 다른 어떤 상징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피에로는 웃옷을 벗고 있는 사람이나 비잔틴의 성직자 차림새를 한 사람들도 화면 에 집어넣어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3. 작품활동 . 성당에  그려진  연작, <성  십자가의  전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담의  죽음>, 1452-1458, 프레스코화, 747x390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솔로몬  왕을  찾아온  시바의 여왕>, 1464, 프레스코화, 747x336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수태고지>, 1464, 프레스코화, 193x329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꿈>, 1464, 프레스코화,190x329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전투>, 1464, 프레스코화, 764x322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유대인의  고통>, 1452-1466, 프레스코화, 193x356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루살렘에서의  성  십자가의  발견과  확인>, 1452-1466, 프레스코화, 747x356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헤라클리우스와 코스로에스의  전투>, 1458-1466, 프레스코화, 747x329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십자가의  승영>, 1464, 프레스코화, 390x747cm, 산  프란체스코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베니스, 리미니, 아레초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여러  작품들을  제작하였는데, 특히  아레초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화  〈성  십자가의  전설〉  연작은  성  십자가의  전설을  여러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1447년에  나이가  지긋한  ‘비치  디로렌초’가  시작했으나, 그가  1452년에  죽고  난 뒤에  피에로가  그  뒤를  이어받아  작업을  완성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  십자가의  전설>을  이야기체로  묘사하고  있는  이  연작은  1466년에  완성되는데요.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구도와  원근법의  절제된  사용, 차분한  분위기  등은  모두  그의  전성기  때  그린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성 십자가의 전설>은 프란체스코 성당의 제단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높고 큰 벽면을 3단으로 나누어가로로 길게 구획이 지어져 있습니다. 각 구획은 각기 다양한 장면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고, 이야기들 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십자가 사건과 관계 있습니다.13세기에 살았던 제노바의 주교,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는 십자가에 얽힌 전설을 글로 소개하였는데요. 그는 1260년경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성인들의 여러 이야기들을 황금전설이라는 책으로 엮었으며,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서 기독교 도상학을 연구할 때 성서와 함께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피에로는 이에 의거하여 이야기를 12장면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피에로는 첫 번째로 아담의 죽음을 주제로 하여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Seth)이 죽은 아버지 아담의 입 속에 생명의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는데요. 황금전설에 따르면, 이 나뭇가지는 훗날 나무로 자라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에로는  이어서  구약에  등장하는  이사야와  구약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그렸으며,다음으로 <솔로몬 왕을 찾아온 시바의 여왕>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한 화면에 두 개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데요. 이미 언급했던 죽은 아담의 입에 심겨진 생명의 나뭇가지는 크게 자라 건실한 나무가 됩니다. 솔로몬 왕은 그 나무를 잘라 자신의 궁을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 그것으로 다리를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어느 날, 시바의 여왕 발키는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서 이 다리를 건너려는데, 그 순간 그녀는 어떤 계시를 받고 이 나무가 성스러운 것임을 느 끼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드리게 됩니다. 자신이  다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던 나무가  성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  왕은  다리를  해체한 뒤 사람들을 시켜  나무를  어깨에  지고  땅속에  파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는데요. 사람들이  나무를  어깨에  메 
고  있는  장면이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다음  그림은  ‘수태고지’로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성령이  임하여  처녀의  몸으로  예수가 잉태할  것을  알려주며  마리아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꿈’을 그렸는데요. 공동 황제로 로마제국을 다스렸던 막센티우스와 전쟁하기 전날 밤, 막사에서 잠이든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꿉니다. 하늘의 천사가 찬란하게 빛나는 십자가를 손에 들고, 그것이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죠.이 작품은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서양 미술사 최초로 밤 장면을 창안해낸 것이기도 합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광선에 의해 나타나는 묘사 대상의 밝고 어두운 관계를 화면 위에 표현하는 기법으로서, 흔히 명암법 또는 음영법이라고도 불립니다. 서양화에서 발달된 조형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악의 상징인 용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전투에 참가한 막센티우스와 그에 대적하는 콘스탄티누스의 군대. 십자가 앞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들은 무참히 패하게 되고,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지배자가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예수가 매달려 죽으신 진짜 십자가의 행방을 쫓다가 유다라는 유대인이 십자가가 숨겨진 장소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유다가 십자가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지 않자 헬레나는 그를 잡아 우물에 가두어 열흘 동안 물 한방을 주지 않는 고문을 하였고, 그는 그제서야 십자가가 어디 있는지 말합니다. 헬레나는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 세 개를 찾아내었지만,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예수의 십자가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헬레나는 세 십자가를 놓고 신의 뜻을 기다렸고, 때마침 장례 행렬이 지나가 예수님께서 못 박혔던 십자가에 시신이 닿자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려진 작품은, 페르시아의 왕 코스로에스 2세와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십자가가 발견된 지 300년이 지나고 페르시아의 왕, 코스로에스 2세는 614년경에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 다. 그는 십자가를 약탈한 후 과감하게도 자신의 왕좌 옆에 두어 신성을 모독하기도 하였는데요. 이를응징하기 위해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오만한 코스로에스 왕을 무찌릅니다.그  결과  헤라클리우스  1세는  적에게서  십자가를 되찾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7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미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아무도 넘보지 못할 자신만의 차별화된 예술성으로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벽화를 창조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피에로의 탁월한 미적 감각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피에로는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 속에서 도 등장인물들을 엄숙한 모습으로 근엄하고 고요한 자태를 보여주었고, 조절되어 나타나는 빛 그리고 적절한 투시도법으로 화면 속에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을 줄 알았던 피에로의 천재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그린 벽화는 인문주의적 인간상을 기반으로 한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의 미적 원리가 무엇인지 그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피에로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칭했던 북유럽 네덜란드 화풍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펼쳐 나갔는데, 깊은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북유럽의 자연주의와 이탈리아 의 과학적인 사고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낸 예외적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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