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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모딜리아니, 긴얼굴의 초상화, 생애와 작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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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생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끈질기게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그리고 조각 한 예술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미술에 눈뜬 이래 이십여 년의 작품생활을 하는 동안 꾸준히 사람만을 그렸습니다. 자유분방한 작가 적 호기심에서라도 다양한 소재에 관심을 가질 법한데, 몇 점의 풍경화 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사람만을 그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사람을 사랑한 예술가인 모딜리 아니의 작품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감동을 주는 까닭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갈수록 사람의 크기가 작아져만 가는 ‘이상한 세상’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에 스페인-포르투갈계 유태인 부모님 사이에서 3 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되풀이해 온 전형적인 유태계 상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모딜리아니 가 태어날 무렵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매우 궁핍한 형편이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때는 가정경제가 완전히 밑바닥이어서 집안의 모 든 가구들에 차입딱지가 붙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어린 시절 별명은 ‘철학자’였다고 하는데요. 이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후손인 외가의 영향이 컸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춘 어머니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고, 이모는 그에게 문학과 사회, 철학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역사와 철학을 사랑했던 외할아버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철학적 소양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덕 분에 모딜리아니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고전들을 가까이하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철학 적 바탕과 고전에 대한 존경은 평생 모딜리아니를 떠받쳐 주는 중요한 정신적 뼈대가 되었습니다. 1898년경부터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의 바람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가적 재능을 인정하고 미 술공부를 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모딜리아니는 장티푸스의 고열로 인해 폐로 병이 번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중학교를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미술에 본격적으로 열중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는데요.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당시 리보르노 최고의 미술선생이었던 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화실에 등록하여 모딜리아니가 미술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1901년, 모딜리아니는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더 이상 미켈리의 화실에서 미술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따뜻한 지방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 고 아들을 데리고 이탈리아 미술의 중심지인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를 여행하며 고전미술의 거 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14세기 시에나 미술에 매 료되었는데, 특히 피렌체와 나폴리 등지에서 활약한 티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예술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계란형의 얼굴을 한쪽 어깨로 기울인 티노의 조각상을 본 모딜리아니는 훗날 이러한 포즈를 자신의 모델에 자주 적용시켰습니다. 병을 이겨낸 모딜리아니는 1902년 5월에 피렌체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피렌체 미술 학교의 자유 누드화 교실에 등록한 모딜리아니는 조반니 파토리로부터 본격적으로 회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1903년 3월 모딜리아니는 베네치아 미술학교의 인물화 교실에 등록하였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모딜리아니는 캔버스에 그린 초상화가 일반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종교화가 미술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보통사람들도 미술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 시기부터 중산계층이 사실상 독점적으로 회화를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미술은 그들의 입 맛에 맞는 구상적 미술로 남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매혹당한 모딜리아니는 길게 늘이면서도 난잡하지 않은 윤곽선을 배웠습니다. 또한 베네치아는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와 같은 위대한 색채 마술사의 고향이기도 하였습니 다. 모딜리아니가 절제된 색조의 조화를 선택한 것은 이 거장들의 색채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모딜리아니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도 관심이 컸습니다. 계란형의 얼굴 형태, 아몬드 모향의 눈, 좌우대칭의 사실적인 초상화와 같은 것들은 그가 폼페이나 파이윰의 초상화 등 로마의 초상화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우아함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 형이상학적 사색에 대한 목마름 등을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활용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작품활동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소녀의 두상>, 1908년, 캔버스에 유채, 56X55cm,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유태 여인>, 1908년, 캔버스에 유채, 55X46cm, 개인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아마존>, 1909년, 캔버스에 유채, 92X65cm, 개인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하빌랜드의 초상>, 1914년, 판지에 유채, 73X60cm, 로스 앤 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라파엘로 산치오, <성모의 결혼>, 1504년, 패널에 유채, 170.1x118cm, 브레라 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첼리스트>, 1909년,캔버스에 유채, 130X80cm, 개인소장

이탈리아 미술을 비롯한 고전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모딜리 아니의 예술은 파리에 와서부터 본격적으로 성숙하고 개화하게 됩니다. 모딜리아니가 처음으로 파리의 땅을 밟은 것은 1906년으로,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1900년대 초 파리의 문화 예술적 풍토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요. 전통적인 미학에 비해 새롭고 다양한 창조적인 사고방식과 회화양식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파리에서는 1906년 살롱전에서 폴 고갱이, 1907년에는 폴 세잔이 젊 은 화가들에게 대상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회화운동 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1905년에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표현 한 작품을 출품하면서 야수주의가 모습을 드러냈고 1907년에는 파 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입체주의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파리는 근대미술의 혁명을 일구어낸 예술운동이 왕성하게 들끓는 용광로 같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혁신적인 운동에 이끌려서 파리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몽마르트르에서 기성회화의 개념을 부 수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시도들을 접했을 때 그는 당황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몽마르트르의 새로운 분위기와 생활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공부와 여행을 통해 고전의 위대함을 익혔지만 평생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지낼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드 툴루즈 로트 렉, 테오필 스탱랑 등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 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1907년에 있었던 세잔의 회고전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감동은 변혁의 물결이 휩쓸고 있던 파리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확립하려던 모딜리아니에게 중요한 활력소가 돼었습니다. 세잔의 작품에서 관찰할 수 있는 원근법적 공간의 해체와 대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 색을 창조적으로 사용한 점,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내면을 표현한 점은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새 로운 회화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소녀의 두 상>과 <첼리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세잔의 영향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야수주의 회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태 여인>과 <아마존> 등이 그 증거인데요. <유태 여인>에서 보이는 규 칙적인 붓의 터치와 <아마존>의 생동감 넘치는 노란색과 어두운 배 경의 대비는 야수주의 화법의 자유분방함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는 한편으로는 고전적 원근법에서 벗 어나기 위해서 입체주의 기법을 빌리기도 했는데요. 입체주의 회화의 표현 방식으로 형상을 그린 <앙리 로랑스의 초상>이 좋은 예입니 다. 또한 <하빌랜드의 초상>에서는 점묘파의 기법이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당시 현대미술의 다양한 기법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형성된 는 과정에서 보이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과 정을 거치면서 모딜리아니만의 작품세계가 확고하게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의 분위기에 빠져들어가고 있었지만 특정 유파나 사조에 속박당하지 않았습니다. 고전적 굴레를 넘어서려고 애쓰면서도 예술가들 사이에서 매일 벌어지는 논쟁에 끌려다니는 것을 거부했고, 요란하게 전개되는 어떠한 회화운동에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미의 이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강한 애정이었습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가능성을 최초로 인정해 준 의사 폴 알 렉상드르를 만나게 됩니다. 근대예술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던 알 렉상드르는 델타 거리에 건물을 세워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작업실과 잠잘 곳을 제공해 주었는데, 모딜리아니는 여기에 살지는 알았지 만 이곳을 자주 방문했고, 정기적으로 델타 거리의 예술가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알렉상드르의 권유로 1908년 3월 앙데팡당전에 <유 태 여인>을 포함한 총 여섯 점의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그러나 전 시회에 출품했다고 해서 그의 예술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 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서 지내는 6년 동안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했고 거처도 자주 옮겼습니다. 완전히 보헤미안의 생활이 몸에 밴 것입니다. 예술적 초조감과 경제적·육체적인 불안으로 인한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더욱 술과 마약을 찾았습니다. 그렇지 않아 도 병약했던 그의 육체는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모딜리아니는 1909년 여름에 고 향인 리보르노로 돌아가 몇 달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고향에서도 작품제작은 쉬지 않았는데요. 이곳에서 <리보르노의 걸인> 등 몇 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기운을 회복한 모딜리아니는 다시 파리로 돌 아와 거처를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로 옮겼습니다. 물론 몽파 르나스로 옮겼다고 해서 그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방황이 계속되었고, 여러 곳을 전전하며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술과 마약은 언제나 그를 떠나지 않았고, 술집에서 밤을 보 내기 일쑤였습니다. 1910년 3월에 열린 앙데팡당전에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의 걸인>, <첼리스트>를 포함한 여섯 점의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어떤 작품에 서는 세잔의 영향이, 또 어떤 작품에서는 야수주의의 영향이 보이기 는 하지만 이들 작품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정서가 숨 쉬고 있었습니다. 색채도 통일되어 있고 형태와 색채의 긴밀한 조화 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전반 적으 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모딜리아니의 최종 목표는 조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본 거장들의 조각작품에 감탄한 그 는 조각에 대한 꿈을 가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끊임없이 조각을 시 도했습니다. 1902년에는 최고급 대리석이 나오는 카라라 채석장 근 처의 도시인 에트라산타(Pietrasanta)로 가서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1909년에 알렉상드르의 소개로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에 몰두하 기 시작한 모딜리아니는 창작열이 뜨겁게 불타올라 1912년까지 조각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약 한 모딜리아니에게 딱딱한 돌덩어리를 쪼아내는 일은 과중한 노동이었으며, 조각할 때 날리는 미세한 가루는 병마에 시달리는 그의 폐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질 좋은 돌은 캔버스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그날그날 한 병의 술에 매달리는 생활에서 자신이 원하는 조각 재료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조각가의 길을 단념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조각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은 계속 그를 괴롭혔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몰두한 시기 동안 회화에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앙데팡당전에 꾸준히 회화작품을 출품하면서 조각에 대한 열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바람에 모딜리아니의 정신은 안정을 잃어갔습니다. 조각과 회화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갈등과 망설임은 과로로 이어졌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한층 심하게 음주나 마약에 매달리게 된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점 위험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긴 얼굴의 초상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 1915년, 캔버스에 유채, 65X54cm, 개인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퐁파두르 부인>, 1914년, 캔버스에 유채, 60.6X49.5cm, 시카고 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젊은 여성의 초상>, 1919년, 캔버스에 유채, 65X50cm, 파리시립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레오폴 드 즈보로프스키의 초상>, 1917 년,캔버스에 유채, 107X66cm, 상파오르 미술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느>, 1918년, 캔버스에 유채, 54X37.5cm, 개인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남프랑스의 풍경>, 1919년, 캔버스에 유채, 60x45cm, 개인 소장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리오 발보 리의 초상>, 1919년,캔버스에 유채, 116x73cm, 개인소장

모딜리아니는 대단히 뛰어난 초상화가였습니다. 일부 미술학자들은 모 딜리아니를 ‘뒤러 또는 홀바인에 필적하는 위대한 초상화가’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거의 모든 작품은 인물화이고, 그것도 특정인을 그린 초상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나 현대의 미술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미술에서는 초상화라는 형식 자체가 거의 없어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기계문명과 산업사회의 눈부신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 때문으로 보이는데요. 미술에 있어서도 형식의 실험에 치우친 나 머지 인간을 그저 하나의 ‘오브제’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야수주의는 글자 그대로 ‘야수’ 같은 모습의 인간을 그렸고, 입 체주의는 인간을 발기발기 찢고 이리저리 뒤틀어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한 평론가는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야수주의나 입체주의의 지나친 인체 파괴에 대한 반작용이며, 신이 창조한 형태로 복원하려는 시도’라 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딜리아니는 작품을 통해 끈질기게 인 간 사랑의 생각을 고수하고 인간 회복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싸운 화 가였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서 아릿한 슬픔과 애절함이 느껴지 는 것은 바로 이 고독한 싸움에서 비롯된 고뇌와 불안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초상화에는 밝고 환하게 웃는 인물이 거의 없습니다.

미술사에서 초상화의 역사는 뿌리가 깊은데요. 전통적인 의미의 초상 화는 특정한 사람을 기념하고 찬양하기 위한 미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문이나 명령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주문자의 마음에 들도록 미화 시 키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과는 달리 순수하게 화 가에 의해 해석되고 창작된 ‘예술로서의 초상화’가 본격적으로 자리잡 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전후 무렵입니다. 로트렉, 고흐 등의 대가들이 개성적인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예술적 경지로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 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처럼 초상화에 전념한 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딜리아니는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야말로 인물의 심리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초상화가들은 눈, 특히 눈동자와 시선의 처리에 많은 신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에서는 눈이 참으로 색 다른데요. 눈동자가 없이 아몬드 모양의 삭면으로 처리된 경우가 대부 분입니다. 색도 어떤 때는 깊은 호수 같은 푸른색이고, 또 어떤 때는 검은색입니다. 초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눈동자 없는 눈을 한 인물들이 응시하고 있는 것 은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그 무엇’을 명상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색면으로 처리된 눈은 인물들이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친척들과 가족, 친구 등을 날카롭 게 분석했고, 인간적 호기심과 심리적 영감에 이끌려 소묘나 유화를 그 려나갔습니다. 그는 친구 카임 수틴의 거칠고 은둔자 같으면서도 애수에 찬 얼굴을 탐구하여 여러 번 종이와 캔버스에 그렸는데요. 강렬한 영 혼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불안하고 고독한 젊은 화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자신을 후원했던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의 초상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길게 늘인 얼굴의 초상화 는 온화하고 성실했던 즈보로프스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즈보로프 스키를 그린 초상화들은 자신을 열렬히 이해하고 지지해 준 헌신적인 친구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우정이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특히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한 미술사 학자는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모델이 지니고 있는 정신가 영혼의 고귀함이 남김없이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진정한 우정의 증거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모델리아니는 화상 폴 기욤,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 화가 후 안 그리스 등 많은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어떤 모델을 그리건 모딜리아니는 이들을 철저하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여 자기화하였습니다. 그는 형태의 구조나 형식, 색채의 조화 등 항상 독창 적이고 새로운 조형언어로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1917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데생을 공부하는 잔느 에벤테른그를 만나게 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어 린 딸 잔느와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한 화가 모딜리아니의 만남은 시작 부터 강렬했고 이내 뜨거운 사랑으로 발전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 자였던 잔느의 부모님은 술과 마약에 중독된 방탕한 화가 모딜리아니와 의 결혼을 반대하지만, 잔느는 집을 나와 모딜리아니와 함께 살기 시작 했습니다. 잔느의 조용하고 온화했으며 자상한 여성이었습니다. 잔느의 따뜻한 사랑과 이해심은 모딜리아니의 작품활동에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으며, 모딜리아니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잔느의 모습을 여러 장의 초상화로 담아냈습니다.잔느를 향한 사랑이 담긴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느>는 평소 모딜 리아니의 작품 특징인 갸름한 얼굴형에 긴 목, 둥근 어깨의 표현을 엿볼 수 있는데요. 모딜리아니는 사색에 잠긴 채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잔 느를 내면적 아름다움을 지닌 사려 깊은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과 둥근 어깨선은 커다란 모자챙의 곡선 형태와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긴 콧대와 목, 가볍게 얼굴을 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팔로 뻗어 가는 부드러운 곡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인물의 우아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검은 모자와 그 아래로 드리워진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의 상이 화면의 중심을 수직으로 관통하며 통일감과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자챙의 안쪽 부분과 잔느의 피부, 그리고 뒷 배경에 구사된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색조는 화면을 구축하는 또 다른 중심요소로 작용합니다. 1918년 무렵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욱 악화돼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모딜리아니를 후원하던 화상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에게 지중해 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에 모딜리아니는 임신한 잔느와 함께 남부에 있는 니스로 떠났습니다. 그해 11월, 니스에서 모딜리아 니와 잔느의 딸이 태어났고, 딸의 이름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과 같은 잔느라고 지었습니다.니스에서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습니다. 비록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가는 생활이 녹록치는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딸을 둔 모딜리아니 부부는 행복했고,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습니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술과 담배도 끊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 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니스 에서 머무는 동안 지중해의 빛에 자극을 받아서 풍경화를 몇 점 그리기 도 했습니다.1919년 5월, 다시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다시 격렬한 작품제작과 끝없는 음주의 방랑이 되 풀이되는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점점 건강이 악화되며 정신적·육체 적으로 쇠약해져 가는 가운데에도 그는 열성적으로 그림에 매달렸습니 다. 잔느를 모델로 하여 아름답게 농익은 작품을 제작했고, 친구들을 모델로 훌륭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마리오 발보리의 초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의 작곡가인 발보리는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술친구였습니다. 결국 1920년 1월 24일, 불행한 천재 화가 모딜리아니는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난 후 잔느의 부모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중이었는데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저택에서 뛰어내려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숨을 거두면서 모딜리아니는 잔 느에게 천국에서도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데요. 마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모딜리아니의 사망 후 파리와 뉴욕 등지에서 잇달아 그의 유작전과 회 고전이 열리면서 마침내 모딜리아니의 명성은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친구였던 러시아의 시인 엘리아 에렌부르그는 고독한 천재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도했습니다. 2017년 3월, 이탈리아 제노아의 팔라조 두칼레에서 개막한 모딜리아 니의 특별전에서 가짜 그림이 대거 전시되었다는 위작 시비로 인해 예 정 되었던 일정보다 앞당겨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미술품 수집가이자 감정가인 카를로 페피는 전시된 60여 점의 그림 가 운데 3분의 1인 21점이 위작으로 의심된다며 신고하였고, 수사에 착 수한 검찰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은 또 다른 전문가도 페피와 같은 주장을 펼쳐 논란은 더욱 불거졌는데요. 전시를 연 팔라조 두칼레 측에서는 전시품들이 위작이 아니라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세계에서 가장 위작이 많은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위작이 너무 많아 '위작의 위작'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에 작품에 항상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작품에 서명을 할 때도 자신의 이름을 소문자로 적거나 때로는 초상화 모델의 이름이나 헌정사를 적기도 했습니다. 화가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 은 술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기 때문에 모딜리아니의 사망 후에 그이 후원자였던 폴 기욤과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의 서명을 잘 흉내 낼 수 있는 전문가의 손을 빌려 서명을 넣기 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명만으로 진위작을 판별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모딜리아니 작품의 위작을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남은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의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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