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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들로네, 생애와 작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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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 1885~1979) 생애

오늘은 같은 작품을 공동으로 작업했던 한 화가 부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화가들에게 ‘색채’는 예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자, 화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인데요. 오늘의 부부는 특히 이러한 색채의 상호작용을 면밀하게 연구하여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추상화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화가 부부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의 생애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로베르 들로네는 1885년 4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여행을 자주하여 집을 비운 탓에 주로 이모의 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극장 간판 화가의 조수로 지내거나 무대 설계자로서 일을 하던 로베르는 1904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요. 초기에는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폴 세잔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페인트를 사용해 부피와 색채를 탐구하기도 했습니다. 1904년, 처음으로 정식 화가로서 독립화 가전에 데뷔한 들로네는 1906년에 가을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이어서 1909년부터 파리 시와 에펠 탑을 그린 유명한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색채 대비에 의한 감정적인 효과를 실험한 이 작품은 도시 생 활의 에너지를 묘사하고 현대 세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로베르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평생을 걸쳐 예술적 혼을 나눴던 여인 소니아를 만나게 되는데요. 소니아는 로베르 들로네와 같은 나이로 1885년 11월 14일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화가였습니다. 로베르를 만났을 당시, 소니아는 1908년에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와있었으며 독일인이었던 화상 ‘빌헬름 우데’와 결혼한 상태였는데요. 그림 거래를 하기 위해 우데의 화랑에 드나들던 들로네와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국 우데와 이혼한 소니아는 1910년에 로베르 들로네와 재혼하였습니다. 결혼 후 들로네 부부는 서로 예술적 혼을 주고받으며, 완벽한 동반자의 삶을 영위해 갔습니다. 로베르는 처음에는 구상 작품을 그렸으나 점차 빛의 스펙트럼 분광에 심취하면서 색채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습니다. 많은 연구 끝에 회화에서 입체파로 발전한 경향의 일종인 ‘오르피즘’을 탄생시키면서 추상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추상미술의 아버지인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들로네에게 뮌헨에서 결성된 추상 미술가들의 모임 ‘청기사파’에 합류할 것을 권하였는데요. 이것을 들로네가 받아들임으로써 완성한 추상 작품을 그리는 최초의 프랑스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소니아는 남편과 함께 입체파에서 파생된 오르피즘 유파를 발전시켰는데요. 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에 색채를 부여한 도시적인 미술을 창조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부부에게는 번갈아가면서 침체기와 전성기가 오게 됩니다. 로베르 들로네는 1922년 유명한 화상 폴 기욤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 이후 그림을 한 점도 못 팔고 침체기에 빠져 들었는데요. 반대로 소니아는 다른 화가들의 추상작품을 패션에 응용하여 30여 명을 직원으로 둔 사업체로 키워내 패션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상황은 역전되는데요. 1930년대 대공황의 영향으로 인해 소니아의 패션 사업이 완전히 몰락한 반면, 로베르는 알프레드 바르가 주선한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확실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베르는 1938년 제1회 신사실화전을 결성 및 개최하여 추상미술의 정착을 이끌다가, 1941년 10월 25일 암으로 인해 몽펠리에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로베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니아는 여전히 화가 겸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며, 1964년에는 생존하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1975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는데요. 그로부터 4년 뒤 1979년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부부는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예술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고 믿으며,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었습니다.

추상화를 탄생시킨 오르피즘 미술을 꽤 많이 알고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추상화를 감상하며 즐기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는데요. 그림의 주제가 비교적 잘 드러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면과 색만을 사용하여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것이 초상화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죠. 들로네 부부는 이처럼 매력적인 초상화를 발전시킨 큰 공을 세운 화가였는데요. 지금부터 초상화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오르피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상화의 발전에는 과학적인 발전, 즉 색채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뉴턴의 색채 이론은 표현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하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는데요. 물체가 자체의 색은 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에 닿는 색채의 분할에 의해 나타나는 스펙트럼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자각은 그림의 역사에서 격변을 일으켰습니다. 뉴턴의 색채이론이 출연한 이후 많은 화가들은 형태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색채만을 사용하여 형태와 입체적 공간성을 모두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는데요. 그 과정에서 입체파·야수파 등과 함께 들로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에 의해 오르피즘이 탄생하였으며, 이는 훗날 추상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들로네는 1912년부터 <창> 시리즈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오르피즘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하였는데요. 그렇다면 오르피즘이란 무엇일까요? 시인 아폴리네르는 몽환적 정신세계에서 창조된 듯한 들로네의 그림에 감명을 받았는데요. 입체파인 큐비즘과 구별하고자 오르픽 큐비즘이라고 명명한 데서 오르피즘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래 오르피즘이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영적 행복을 얻기 위하여 엄격한 수행과 특별한 제 의를 행하던 그리스의 신비주의적 종교집단을 뜻 하는 말입니다. 처음에 아폴리네르는 들로네의 그 림에서 입체파적 요소인 대상의 해체와 재구성을 보고 입체파의 한 분파로 생각했는데요. 그러나 곧 들로네의 작품은 어딘가 신비적이고 몽환적이어서 입체파와는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때 자신의 시에 쓰였던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생각해 내어 오르피즘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입체파, 야수파 등 수많은 비구상적 화풍이 생겨났는데, 오르피즘이야말로 진정한 추상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로네는 색채만으로 형태와 공간뿐 아니라 운동감까지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급격히 발 전한 스펙트럼 색채 이론에 심취하여 체코 출신의 화가 쿠프카와 함께 순수한 삭면만으로 모든 것을 표 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는데요. 이러한 미술 기법이 바로 오르피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빨강-주황-노랑-녹색-파랑-보라는 순서대로 주파수가 높아지는데요. 이들 색 면을 병치하고 구성하면 운동감을 가진 몽환적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색점만으로 형태와 공간을 모두 표현하려던 쇠라나 시냐크의 신인상주의보다도 한층 더 진보한 생 각이었으며,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오르피즘은 미국의 맥도널드라이트와 러셀이 제창한 싱크로미즘의 탄생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싱크로미즘’이란 색채의 교향악이라는 뜻으로 음악적인 영감을 색채만으로 표현한 완전한 추상화 운동을 말합니다. 작품 <리듬>과 같이 색과 크기가 다양한 삭면이 정교하게 구성된 들 르네의 그림들은 마치 음악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당시의 미술계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자연을 찬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주류였는데요. 들로네는 이러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과학을 찬양한 화가였습니다.

 

작품활동

로베르 들로네, <태양, 탑, 비행기>, 1913년

그중 <태양, 탑, 비행기>는 특히 순수 추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작품인데요. 들로네는 밝고 따뜻한 색채로 이 세상이 과학에 의해 생기가 넘치게 되었음을 마음껏 찬양하였지요. 과학자들이 볼 때 참으로 기분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들로네는 그림 제목에 대관람차 대신 태양을 넣었는데요. 들로네가 추구하던 색채의 근원은 태양에 서 오는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들로네는 빛의 운동성을 원형의 색 면에 서 찾았는데요. 원형으로 도는 대관람차에 앉아서 하늘 높이 오르면 태양과 태양의 빛을 더욱 가까이서 즐길 수 있게 됩니다. 태양이 물체를 비춰 모든 색채를 만들어 내듯이, 과학 또한 이 세상을 비추어 진정한 인류의 행복에 기 여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연작, 1912년

<창문> 연작은 들로네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을 차지하는데요. 초기의 인상주의와 큐비즘의 실험들이 한 데 모여 들로네만의 특색을 형성하 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계기가 되는 작품도 바로 이 연작이었습니다. 빛이 건축과 실내 공간의 형태와 색채에 가져오는 변화에 매료되었던 들로네는 파리의 생 세베랭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서 얻은 영감을 그렸습니다. 들로네는 이미 예전에도 같은 실내를 다양하게 그린 적이 있는데 하나같이 무채색에 큐비즘 스타일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기의 작품들은 모두 색채와 빛, 빛남과 투명함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로베르 들로네, <시내를 향한 창문>, 1912년, 캔버스에 유채, 113.7X130.8cm,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시내를 향한 창문>에서 느껴지는 채색된 이미지는 캔버스 가장자리와 같은 높이로 끼운 채색 프레임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작품의 표면은 일정하지만 가로질러 흐르고, 프레임 안과 밖을 들고 나는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데요. 이는 실내가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닌, 시내를 ’ 향한’ 창문이라는 표현의 모호함에 더욱 포인트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융합은 들로네 작품에 형식적인 복잡함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들로네의 혁신적인 생각은 추상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큐비즘 초기의 엄격한 구 성을 이어받으면서 미래파의 다이너미즘을 포괄하여 원색을 시적, 음악 적은 로 구사했던 들로네의 오르피즘은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화가를 매혹시킨 과학 발명품 앞서 알아본 것처럼 들로네는 당시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자연을 찬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 속에서도 독특하게 과학을 찬양하였던 화가였습니다. 이러한 들로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화가의 여러 작품들 속에 나타나 있는데요. 지금부터 들로네를 매 혹시킨 과학 발명품과 발명품이 담겨있는 들로네의 작품들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베르 들로네, <태양, 탑, 비행기>, 1913년

첫 번째 작품은 <태양, 탑, 비행기>입니다. 순수 추상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 을 하였던 이 작품 속에서 우리는 들로네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과학의 발명 품 세 가지, 에펠탑과 비행기 그리고 대관람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추상은 아니어서 그림의 여기저기서 구상적인 물체 형태를 볼 수 있으나, 입체파의 영향으로 대상이 되는 에펠탑·비행기·대관람차 등이 해체된 고 재구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발명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들로네를 매혹시킨 첫 번째 과학의 발명품은 에펠탑입니다. 에펠탑은 1889 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박람회에 프랑스 과학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만 들어진 철탑으로 이 탑을 설계한 교량 건설 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 에펠탑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에펠탑은 7,300톤의 강철을 사용하여 건설한 높이 약 300미터의 탑으로 건설 후부터 약 40년간 세계 최고 높이의 건축물로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술을 사랑했던 대부분의 파리 시민은 이 철골 탑을 굉장히 싫어하였으며 실제로 박람회가 끝난 뒤에 철거하는 것을 심각하게 논의하였다고 하는데요.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부정적이었을지 몰라도 1889년에 파리를 휩쓴 후기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속에는 에펠탑이 앞으로 도래할 20세기의 상징이자 희망으로 해석되어 나타납니다. 에펠탑이 상징하는 승리와 미학은 20세기 초반에 들어 미래주의나 오르피즘을 중심으로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는 데요. 오르피즘 화가들은 에펠탑을 입체파의 파편화된 조형 요소와 미래파의 동적인 요소를 더하고 화려한 색채를 감각적으로 구사하여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거대한 철탑은 들로네식 구상 회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로베르 들로네, <에펠탑>, 1911년, 캔버스에 유채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의 경배>, 1914년

여러 요소들을 회전하거나, 구부리거나 또는 충돌시켜 만든 들로네의 철탑은 실제 파리의 명물 에펠 탑과는 거리가 멀게 표현되어 있는데요. 들로네의 에펠 탑은 실험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기본단위들의 끝없는 연결로 이루어진 구조물 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들로네의 <에펠탑>은 피카소나 미래파 화가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파리의 역동성과 현대적 느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특히 들 로니는 에펠탑을 여러 각도에서 그리면서도 에펠탑 주변의 건물을 함께 표현하 여 변화하는 파리의 풍경과 테크놀로지의 승리, 문명의 진보 등 파리의 현대성을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었습니다. 들로네는 1909년 소니아와 약혼을 한 기념으로 <에펠탑>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총 30여 점의 <에펠탑> 연작이 전해지는데요. 들로네는 실제로 에펠탑 근처의 창문에서 본 에펠탑을 좋아하였 으며 연작에서도 창문이나 창문에서 본 도심을 자주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로베르의 작품 성향이 추상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면서 에펠탑이라는 소재는 사라지게 됩니다. 들로네가 그린 두 번째 과학의 경이는 어느 놀이공원에서 나 만날 수 있는 관람차입니다. 1893년 미국은 시카고에서 콜럼버스의 미국 상륙 4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를 열었고 당시 프 랑스의 에펠탑에 견줄 만한 거대 구조물로써 조지 페리가 설계한 대관람차를 선보였습니다. 대관람차는 80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거대한 바퀴에 36개의 나무 차를 매달아 60여 명의 사람이 타고 높은 하늘을 오르게 되어있습니다. 한 번 타는데 50센트씩을 받았는데,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박람회 기간 동안 무려 72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고 합니다. <태양, 탑, 비행기>에서는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에 대관람차의 모습이 타나는데요. 구조물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분할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은 입체파에서 영향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들로네가 그린 과학의 발명품은 비행기입니다. 1903년 라이트 형제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 호크에서 처음으로 12초간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이어서 1909년 7월 25일 프랑스의 블레리오가 단엽비행기 블레리오 11호로 37분 간 비행하여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하였지요. 들로네는 이에 흥 분하여 <블레리오에의 경배>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 면 윗부분에 복엽비행기가 뚜렷이 나타나는데요. 블레리오가 만든 비행기는 단엽비행기였습니다. 그림 왼쪽 아래쪽에 프로 펠러가 달린 단엽비행기를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 버해협 횡단에 성공했던 블레리오에게 바치는 들로네의 찬사였던 것입니다. 블레리오의 비행기는 현대 비행기와 구조가 같은 최초의 단엽 비행기이자 꽤 오랜 시간을 비행하는 데 성공한 비행기였습니다. 단엽 비행기와 라이트 형제의 복엽 비행기에 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라이트 형제의 복엽비행기는 동체의 아래위로 두 개의 앞날개가 있는 비행기를 말합니다. 날개면적이 단엽비행기에 비해 외형을 작게 할 수 있으므로 중량이 가벼워질 뿐 아니라, 비행기의 운동 성도 좋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는데요. 공기역학·기체구조·재료 등이 발달되지 못했던 비행기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널리 사용된 비행기였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점차 고속화됨에 따라 공기저항이 크다는 단점이 현저하게 나타났지요. 이때 단엽비행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반면, 단엽비행기는 날개가 양쪽에 하나씩 있는 비행기를 말합니다. 주 날개가 상하 둘 이상으로 되어 있는 복엽기에 비해서 공기저항을 적게 받으므로 운동성이 우수하여 오늘날의 비행기는 모두 단엽기로 되어 있습니다. 들로네는 바로 이 두 개의 비행기에 큰 감명을 받아 작품을 그렸던 것입니다. <블레리오에의 경배>의 작품 하단을 보면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이라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주제로 정물을 선호한 입체주의 와는 다르게 기술과 현대인의 삶을 주로 다루었던 들로네가 인간으로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의 폭죽’으로 축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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