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레이(Man Ray, 1890~1976)
마르셀 뒤샹과 함께 뉴욕 다다의 토대를 형성한 중심인물이자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초현실주의 예술가 만 레이는 회화와 사진, 오브제, 영화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다채로운 작업을 수 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미술에서 사진의 비중을 부각시키는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로, 사진을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닌 새로운 표현매체로 인식하고 다 양한 사진 인화기법을 연구하여 사진의 미적인 영역을 구축한 인물입 니다.
만 레이는 1890년 8월 27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사우스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계 러시아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이의 아버지는 작은 양복점을 운영하던 재단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의 작품에는 다리미뿐 아니라 재봉틀과 실, 바늘, 마네킹 등이 자주 등 장합니다. 레이의 본명은 마이클 엠마뉴엘 라드니츠키였는데요. 그의 가족은 1912년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를 우려하여 ‘레 이’로 성을 바꾸었고, 그 또한 ‘만’으로 이름을 바꾼 후 ‘만 레이’로 작품에 서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레이는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브루클린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공부하면서 도면 작성의 기초와 기본적인 예술 테크닉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학교를 다니면서 자주 지역의 예술 박물관을 방문하며 옛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며 스스로 미술 공부를 하였었습니다. 학교를 마친 후 레이는 건축가로의 길을 고민하였지만 결국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레이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실망하였지 만 곧 아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그의 방을 스튜디오로 꾸며주었습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1910년부터 1920년까지의 시기는 뉴욕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개념들이 재정 립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의 전통미술과 유럽의 현대미술이 함께 공존하면서 다양한 변화의 양 상을 보이고 있었던 당시 뉴욕 미술계의 흐름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도전에 있었던 레이에게 예술의 의 미와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근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레이가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정규과정이었던 국립 디자 인 아카데미에서의 보수적인 교육에 반발하여 1912년 진보적인 교육기관이었던 페러 센터에 등록하 면서부터였습니다. 인체소묘 수업의 교사였던 미국 작가 로버트 헨리와 조지 벨로스는 아카데미에서 요구하였던 방법론적인 기법들을 따르게 하기보다는 재빠르면서도 자발적인 데생방식을 장려하였습니 다. 페러 센터에서 경험했던 자유로운 예술적 사고와 제작방식은 레이의 예술이 반전통적이며 비관습 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페러 센터에서의 수업이 레이의 예술적 도전의식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면 초기 회화작품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결정하게 해 준 근원은 ‘291(이백구십일) 화랑’이라고도 불린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연 ‘사진분리파의 작은 화랑’을 통해 접하게 된 유럽의 현대미술이었습니다. 레이는 당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속성들이 그 시기 미국미술에 팽배해 있던 사실주의 회화와는 다른 신비로움을 지녔 다고 생각하였고, 유럽 예술가의 작품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편, 레이가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가 시각예술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스티글리츠가 발행한 잡지인 『카메라 워크』에 실린 글을 통해서인데요. 1911년 10월호에 실린 벤쟈민 드 캐슬스의 ‘예술에서의 무의식’이라는 글에서 “상상력은 무의식의 꿈이다.”라는 부분을 읽은 레이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글은 레이에게 주관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그러한 것을 표현하려는 의지 가 예술작품 제작의 구체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291 화랑과 『카메라 워크』를 통해 레이가 보고 배운 것들은 1913년 아모리 쇼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되었습니다. 아모리 쇼는 레이의 예술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중 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모리 쇼에서 펼쳐진 프랑스 화가들이 사용한 탈전통적인 주제와 기 법은 레이가 유럽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레이는 아모리 쇼에서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보고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이름을 잘 붙여야 기억에 남고 유명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레이의 많은 작품들에 붙인 기발한 이 름들은 이때의 깊은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모리 쇼 이후 2년여 동안의 레이의 예술은 당시 유럽예술 경향들에 대한 실험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 다. 아모리 쇼를 보고 난 이후 최초로 그린 작품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초상>을 보면 부서진 형태에서는 입체파의 방법을 응용하였고, 밝은 색채에서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4년, 레이는 벨기에 태생의 여류시인이었던 아동 라르크와 결혼하 게 됩니다. 라르크의 서가에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던 랭보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등의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집이 있었는데, 불어를 하지 못했던 남편을 위해 그녀는 시의 구절들을 영어 로 해석해 주었습니다. 훗날 레이의 예술에서 추구하는 문학적 시성의 근원은 이 시기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라르크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1919년에 헤어진 그들은 1937년에 공식적으로 이 혼하게 됩니다. 1915년은 레이에게 있어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 미국으로 와 있던 마르셀 뒤샹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로도 레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명한 작가들을 만나게 되지만 예술 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뒤샹이었습니다. 레이 스스로도 아주 감동받았다고 자서전에 쓴 거의 유일한 사람이 바로 뒤 샹이었습니다. 레이는 1915년에 페인팅과 드로잉으로 자신의 첫 번째 개인 전시회를 열었는데, 개인전의 카탈로그를 복사하기 위해 처음 카메라를 잡은 것 을 시작으로 뒤샹과 함께 『뉴욕 다다』라는 잡지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6년에는 ‘자화상’이라는 타이틀의 다다이즘 전시를 선보였는데요. 여기서 패널 위에 두 개의 초인종과 버튼을 고정시킨 <자화상>은 당시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작품입니다.
패널 위에 고정된 버튼을 누르면 마치 초인종이 울릴 것 같지만 실제로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품과 관객과의 능동적인 상호작 용을 유발하려고 했던 레이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초인종의 실질적 인 기능을 염두에 둔 관객들에게는 실망과 불신감만을 유발하는 결 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레이는 “그들은 격분하면 서 내가 형편없는 전기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단순히 관객들을 창조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이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회화적 이미지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사물이 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간파하게 됩니다. 레이는 뒤샹과 함께 뉴욕에서 다양한 작업적 시도를 펼칩니다. 두 사람 은 에어로그래프, 에어브러시 등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점차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결별하게 됩니다. 특히 1920년부터 1921년에 레이와 뒤샹은 어느 시기보다 가깝게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레이와 뒤샹 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 바로 <먼지의 증식>입니다. 이 작품은 뒤샹의 <커다란 유리> 위에 쌓인 먼 지를 촬영한 것인데요. '먼지의 증식'이라는 작품의 타이틀과 그들의 서명이 없었다면 무엇을 찍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사진입니다. 하지만 레이가 뉴욕에서 다다이스트로 활동했을 때, 그의 활동은 미국에서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습니 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럽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한 것이었고, 당시 미국의 문화적 수준이 다다 성향의 작품을 수용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이는 자아 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다이스트로서 활동을 지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다이즘의 참신함과 실험적 성격이 혼란하고 거친 뉴욕의 모습과 견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레이는 자 신의 다다적 정신과 예술세계를 받아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은 파리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파리 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 파리에 머물던 시기는 레이의 작가적 생애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기간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술의 주요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레이는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을 개발하여 커 다란 반향을 얻었습니다.레이는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을 남겼는데요. 1921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에서 진열된 <선물>은 파리 이주 후 전개되는 시적 오브제의 양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질적인 사물들 간의 만남이 이 작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데요. 옷을 다리는 다리미와 옷에 구멍을 내는 못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은 시각적인 충격을 넘어서서 평범한 사물을 더욱 강력한 인습파괴의 상징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1921년 6월 22일에 레이는 뒤샹의 소개로 초현실주의의 주창자 앙드 레 브르통을 비롯하여 자크 리고,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와 그의 아 내 갈라, 필립 수포 등 다다 그룹의 일원들을 만나게 됩니다. 잡지 『리테라티르』의 발행인이었던 브르통은 사진작가 레이가 자신에 게 꽤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레이는 금세 브르 통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브르통은 정기적으로 레이와 접촉했고, 그를 예술가들에게 보내서 자신의 잡지에 싣고자 하는 작 품들을 촬영하게 하였습니다. 레이는 이 일을 통해 이중으로 이득을 얻 게 됩니다. 그는 모든 촬영일정을 해당 예술가들의 초상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고, 사진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브르통에게는 사진 고료 대신에 자신의 사진작품을 잡지에 실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초상사진 분야에서의 성공과 곧이은 입소문이 훌륭하게 작용함으로써 레이는 짧은 기간에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등 당시 파리의 많은 유명인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레이는 유명인 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 모두를 자신의 지속적인 고객으로 확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레이의 작업실에는 파리를 방문하 는 외국인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1920년대 파리 상류사회 여인들의 초상은 종종 패션사진으로 이용되고는 했는데, 레이는 의상디자이너 폴 푸아레와 만나게 된 뒤 1924년부터는 정기적으로 『보그』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는 이러한 주문작업들과 병행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작품들을 『리테라튀 르』, 『베니티 페어』 등에 발표함으로써 비약적인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작업실에 사진 실험을 즐겼던 레이는 1921년, 인화지 위에 유리 깔대 기, 눈금이 새겨진 잔, 온도계 등을 올려놓고 빛에 노출시켰는데, 그 이 미지들이 고스란히 인화지 위에 투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빛에 노출된 부분은 검은색 배경 위에서 부조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레이는 이렇게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 재료 위에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을 이용하는 이 기법을 '레이요그래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레이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라슬로 모호이 노디가 ‘포토그램’이라는 기법으로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이의 레이요그래프 기법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는 물체와 광원을 이동시키거나 유리로 만든 물체에 빛을 굴절시킴으로써, 흑백만이 아닌 다양한 톤의 회색으로 이루어진 더욱 다이내믹한 이미 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레이와 친밀하게 지냈던 크리스티안 샤드는 1918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샤도그래프’라는 추상사진을 실험하였습니다. 이는 레이요 그래프나 포토그램과 마찬가지로 카메라 없이 감광지 위에 직접 물체를 놓고 빛을 투과시켜 음영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샤드는 인화지 위에 가위로 오린 형상과 평면적인 물체만을 올려놓았고, 이를 통해 입체파의 콜라주와 흡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샤드와 달리 레이는 온갖 종류의 3차원적인 사물들, 특히 유리로 된 물체를 사용해서 그림자 나 빛을 투과하는 특성을 이용해 검은색과 흰색의 평면 위에서 상이한 명도가 얻어지도록 하였습니다. 만 레이는 다다 이후 등장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신의 사진을 계속 발표해 나갔습니다. 1924년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 언문을 발표하고 그들의 기관지인 『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하였는데, 레이는 이 기관지에 자신의 사진을 꾸준히 실어 사진을 모더니즘 예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레이요그 래프 기법을 창안한 이후에도 ‘자동적 이미지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사진에 관한 실험을 끊임없이 지속해 나갔고, 그의 이러한 열정은 문학과 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사진가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레이의 성공을 더욱 확고히 하고 그를 초현실주의 운동과 연관짓 게 하는 또 다른 기법들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중노출’과 ‘솔라리 제이션’입니다. 레이는 이 두 가지 기법을 통해 사진 조작의 대가의 자 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중노출은 두 가지 네거티브 필름을 확대인화하거나 촬영을 중첩시키 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 기법은 움직임을 사진으로 변환시켜 표현하고 나 초상사진에서 두 가지 상이한 요소들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 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레이는 이중노출을 자주 사용하였지만, 그가 파리에서 중요한 사진작 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라리제이션 기법 덕분이었습니 다. 솔라리제이션은 한 장의 사진에서 부분적으로 흑백이 반전되고 그 경계 부분에 새로운 윤곽선이 동반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사진을 현 상하는 도중에 일시적으로 광원이 켜졌을 때 발생하는 것인데, 그전까 지는 암실에서 일어나는 사고로 여겨졌습니다. 즉, 솔라리제이션은 하 나의 사진에 음화와 양화가 공존하게 됨으로써 비현실적인 세계를 표 현할 수 있는 기법이 되는데, 레이는 이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추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1929년부터 이 기법을 사용했고, 이 기법을 통해 수많은 초상과 누드사진, 패션사진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혁신적인 기법들은 파리를 넘어 전 유럽으로 급속히 확산되었고, 레 이는 즉각적인 성공을 얻었습니다. 한편, 레이는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였는데요. 1926년에는 <에막 바키아>라는 실험적 단편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일상적인 것에 대한 레이의 생각을 담은 것으로, 키키와 여성으로 변장한 시인 자크라고가 등장합니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 레이요그래프, 이중인화, 소프트 포커스, 다초점 등 수많은 영상기술이 사용되었고, 스탑모션 기술을 이용하여 정지와 움직임이 반복되는 수학적 기술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를 펼친 사진
사실에 바탕을 둔 사진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 있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사진을 통해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 받는 레이의 작품은 비단 레이요그래프나 이중노출, 솔라리제이션과 같은 특수한 기법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레이는 인물과 누드, 패션사 진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독특한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표현해 냈습니다. 레이는 파리에서 화가이자 모델인 키키 드 몽파르나스를 만나게 됩니 다. 레이는 곧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는 1920년대 레이의 작품에 자주 모델로 등장하게 됩니다. 1924년 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를 모방한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를 통해 여체의 미학을 잡아 낸 사진예술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뒤로 앉아 있는 이 작품의 모델은 레이의 연인인 키키입니다.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선은 몸이 가진 간결하고 단아 한 형태와 함께 인체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키키의 허리에 새겨진 바이올린의 앞판 무늬인 f홀에 의해 우리의 눈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몸매와 바이올린의 형태가 오버랩되어 느껴집니다. 바이올린의 이미지와 모델의 이미지가 놀라울 정도로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되어 있어 표현의 재치와 방법이 간결하면서도 절묘하지요. 심리 적으로 확대를 하자면 음악과 인간의 몸이 겹쳐져 새로운 아름다움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레이는 자기만의 사진감성을 건 져냈고 흑백의 선명하고 뚜렷한 대조미를 도입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키키를 모델로 한 또 다른 작품 <흑과 백>은 키키의 세련된 얼굴과 아 프리카 가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29년 레이는 자신의 조수인 리 밀러와 사랑에 빠졌고, 둘이 함께 지낸 3년 동안 레이의 작품 속 모델은 밀러였습니다. 밀러는 충동 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그녀 의 매력적인 외모와 결합되어 당시의 전위예술계에 기꺼이 받아들여 졌습니다. 이런 밀러의 재기 발랄함은 곧 그녀를 조수에서 동료 사진가로 격상시켰습니다. 레이에게서 다양한 사진 기술을 배우면서 모델이 돼었던 밀러는 1932년 레이를 떠났고, 이 시기 레이의 마음은 밀러에 대 한 배신감과 괴로움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 예술사진의 백미로 꼽히는 <유리 눈물>은 눈물을 연출하기 위해 여인의 얼굴 중에서 눈 부분을 클로즈업하고, 눈길을 위쪽으로 향하게 한 후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실 제 눈물이 아니라 유리로 만든 가짜 눈물입니다. 긴 속눈썹 역시 마스 카라를 짙게 발라 만들어낸 가짜 속눈썹이지요. 짙은 화장과 과장된 표 정으로 작품 속 여인은 마치 무성영화의 주인공 같이 느껴집니다. 가짜 눈물을 사용한 이유는 눈물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영혼이 담겼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인데요. 이런 생각은 "이런 유리 눈물방울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라는 만 레이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레이는 194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할리우드에 정착합니다. 그 곳에서 레이는 자신의 여생을 함께할 동반자 줄리엣 브라우너를 만나게 됩니다. 1946년, 레이와 브라우너는 비버리힐스에서 맥스 어니스트, 도로시 태닝 부부와 함께 합동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레이는 1950년까지 할리우드에서 머물며 수많은 전시회에서 열며 작품활동을 계속해 나 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1년에 레이는 브라우너와 함께 다시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회화, 조각, 사진, 영화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펼칩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자서전 『자화상』를 발간 하였습니다.1976년 12월 18일, 레이는 폐 질환으로 인해 8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레이의 묘비 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무관심하지도 않았던” 그를 화가인가 사진가인 가 하는 평론가들의 분리적 시선은 늘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림과 사진의 경계에서 참여와 무 관심을 고민했던 레이의 오랜 화두, 그림과 사진, 참여와 무관심. 그것이 바로 만 레이입니다. 1999년에 미술계의 가장 오래된 잡지 『아트뉴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 중의 한 명으로 만 레이를 선정하였는데요. 『아트뉴스』는 만 레이는 사진뿐 아니라 회화·조각·콜라주·아상블라주에 걸친 전방 위적인 실험적 작업들과 함께, 행위미술과 개념미술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말,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던 만 레이는 실수로 현상하던 중에 뚜껑을 열어버리게 되었고, 이 실수는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이라는 위대한 기법의 발견을 낳게 되었습니다. 예술사에서는 이와 같이 뜻하지 않은 실수가 기막힌 창작의 아이디어로 거듭난 순간들이 종종 있는데요. 1890년대 중반, 프랑스의 사진작가 으젠느 앗제(Eugene Atget)는 파리 구시가지의 거리와 서민들의 모습을 1만 장 가까이 카메라로 찍었는데요.
앗제가 찍은 이미지들은 프레임 구석에 종종 카메라 렌즈 주변부의 광량 저하로 이미지의 모서리나 외 곽 부분이 어두워지거나 검게 가려지는 비네팅 현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 이유는 사 진기 위 격판덮개에 있는 렌즈를 옮기곤 하는 그의 습관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앗제가 찍은 사진의 비네 팅 현상은 오히려 결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삶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의 사진들은 일상적인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환상적인 작풍이라고 높이 평가 되고 있습니다. 1940년대 말, 프랑스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패션쇼와 벽화작업에 매진했던 윌리엄 클라인은 자신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촬영을 하는 도중에 실수로 벽에 부딪혀 어지게 되었습니다. 넘어지면서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고, 순간의 실수로 찍힌 사진을 본 클라인은 무대디자인에서 사진가로 활동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클라인의 사진은 초점이 어긋나고 흔들려 있으며, 극단적인 명암차이와 원근법적인 구도가 깨져있는데 요. 그전까지 사진이 가져왔던 중요한 요소를 뒤엎어 버린 당시에 봐서 거의 혁명적인 사진이었습니다. 훗날 클라인은 영상사진의 길을 개척한 현대사진의 선구자로 자리 잡게 됩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만 레이도 그랬고, 앗제, 클라인도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아내는 이들의 열정에 다시 한번 깊은 존경을 표하게 됩니다. 이 러한 열정이 이들을 대가의 자리로 이끈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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