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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호안 미로, 초현실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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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예술가를 두 가지 유 형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요. 하나는 자연에 대해 명상하면서 지성의 영역을 통하지 않은 채 작품을 창조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오 로지 자신의 내적 이성으로부터 작품을 창조하는 유형입니다. 호안 미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겸비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로는 실재의 본질을 실험하고 탐구하려는 열정을 결코 잃은 적이 없었 으며, 지적 열정이 상상력을 가로막은 적 역시 한 번도 없는 예술가였 습니다.

호안 미로는 1893년 4월 20일, 바르셀로나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 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미로는 타라고나 지방에 있는 코르누 데야에 있는 친가에 자주 놀러 갔으며, 마요르카섬에 있는 외가에도 자주 들렀습니다. 친가와 외가에서 미로는 곤충과 새, 나무, 뱀 등에 매료되었는데, 이 동식물들은 그의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미로는 일찍이 들판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는데, 점차 그림은 그의 생활 전체가 되었습니다. 미로는 일찍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바람을 가족들에게 밝혔으나 아들이 사업에 매진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그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미로가 열일곱 살이 되던 1910년에 미로의 아버지는 아들에 게 바르셀로나의 한 상업학교에서 회계학 수업을 듣게 하였습니다. 희 망을 잃어버린 미로는 다음 해 심한 병을 앓아 몸져누웠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타라고나 남쪽 해안이 보이는 몬트로이그에 있는 가족 소유의 농장으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화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는 1912년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프란시스코 갈리의 미술학교에 등록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갈리의 미술학교에서 3년을 보낸 미로는 미술학교 친구인 리카르트와 함께 바르셀로나 시내에 작은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호세프 달 마우의 화랑에 모이는 바르셀로나의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국제 미술계의 현황을 잘 알고 있었던 달마우는 바르셀로나에 야수파와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인물인데요. 미로는 달마우에게 자 신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강렬한 색채와 힘찬 터치를 바탕으로 하는 원 초적이고 순수한 미로의 작품에 감명을 받은 달마우는 자신의 화랑에 서 전시회를 열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18년 2월 16일, 달 마우 화랑에서 미로의 첫 개인전이 열렸는데요. 독창적이고 힘 있는 미 로의 작품은 소수의 안목 있는 사람들에게는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들 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전시된 64점의 작품 중 한 작품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첫 개인전에 실패한 미로는 야수파적인 자신의 그림이 질서와 서정성이 결여된 채 너무 거칠고 격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다시 몬트로이그로 돌아온 미로는 주변의 나무와 경작지, 먼 산의 윤곽을 세밀하게 살피며 세부묘사에 집중하였습니다.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이전의 강한 붓질 대신 풍성하게 장식된 자수 같은 명확한 윤곽선이 드러나는 새로운 양식은 정확하고 리듬감 있는 카탈루냐 전통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개인전에서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을 접한 이후로 미로는 바르셀로 나가 자신을 발전시켜 줄 토양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 고 시선을 파리로 돌리게 되었는데요. 당시 미술계가 혁명적이라고 여 기는 모든 것이 파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0년 3월, 마침내 미로는 파리에 도착합니다. 미로는 파리에 머무 는 동안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고 작품 판매를 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피카소에게 판매한 〈자화상〉입니다. 소박하고 정직함으로 주목할 만한 이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보여주 는 초기 자화상으로, 미로가 오랜 기간 세부를 정밀하게 양식화한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카탈루냐 동향인 미로의 창조적 재능에 주목하였어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파리는 가까스로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에서 벗어났으나 정치적인 혼돈에 휩싸여 있었고, 이러한 지적 동요의 배경에서 다다이즘이 생 겨났습니다. 미로는 파리에서 다다이즘 선언과 아방가르드 잡지들, 그 리고 자주 방문했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는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사상도 좋아했으며, 세계 도처에서 파리로 모 여든 다양한 화가들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로는 파리에 정착하 지 않았으며, 3개월 후인 1920년 6월에 다시 몬트로이그로 돌아왔습니다. 1921년 3월, 두 번째로 파리를 방문했을 때 스페인 조각가 파블로 가 르가요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블로메 거리 45번지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미로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로는 몽파르나스 한복 판에서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작업실 옆에는 화가 앙드레 마숑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곧 ‘블로메 그 룹’이라고 불리는 모임의 초기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훗날 이 그룹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모두 초현실주의에 합류하였습니다.

1921년 3월 29일, 미로는 라 리코른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 번 전시회도 실패하게 됩니다. 빈털터리가 된 미로는 몬트로이그로 돌 아가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몬트로이그에서 미로는 조금씩 실재감 을 확장시키고 정확하고 정교한 세부묘사를 활용하는 뛰어난 능력을 펼쳐 보이면서 개인양식을 창조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그 정점에 도달한 작품이 바로 몬트로이그의 농장을 있는 그대로 재현 한 〈농장〉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작업을 위해 자 주 들르며 지냈던 땅에 대한 깊은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농장〉은 모든 사물의 특성이 세심하게 포착되어 있는데요. 우리로 보이는 곳에 닭과 토끼, 사슴 등 여러 동물들이 있고, 흙 위에는 도마뱀과 달팽이가 있습니다. 중간 부분에는 짖고 있는 개가 있고, 그 뒤쪽에는 빨래하는 여성과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말이 있네요. 심지어 회칠한 벽에 간 금까지 볼 수 있습니다. 혼란스럽거나 과밀한 느낌 없이 하나의 화면에 이처럼 많은 정보를 담은 것은 그 자체가 회화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몬트로이그에서 제작을 시작하여 파리에서 완성한 〈농장〉은 완성 었을 당시에 그림을 구입하겠다고 나선 이가 없었습니다. 실의에 차 있던 미로는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 이 작품을 전시하였는데, 당시 파리에 머물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5,000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하였습니다. 이것은 미로가 궁핍한 생 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이래 미로는 랭보, 아폴리네르 등 초현실주의 선구자인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에 심취하 였습니다. 그 결과 〈농장〉 이래 작업해 오던 사실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였는데요. 그는 초 현실주의 개념에 두하면서 잠재의식을 해방시킨 환각에 근거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미로는 잠 재의식에 기원을 두고서 즉흥적으로 그리는 ‘꿈의 회화’를 그려나가게 됩니다.

미로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준 화상 피에르 레브를 만나 1925년에 피에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습 니다. 수많은 미술비평가들과 저명한 수집가들이 참석한 이 전시회는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레브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를 통해 미로의 작품도 계속해 서 선보일 수 있게었습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미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부수려고 노력하면서 점점 더 추상화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한 〈누드〉와 〈머리〉와 같은 작품을 보면 명확하게 식별되는 것이라 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두운 색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실루엣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작 품은 실제 대상과 관련이 없는 표상문자와 같습니다. 1927년 몽마르트르로 작업실을 옮긴 미로는 작업 중에 방해받는 것을 막기 위해 어느 가게에서 찾아낸 ‘정차하지 않고 달리는 기차’라고 쓰인 팻말을 문에 걸어놓았습니다. 미로의 근처에 살고 있던 이웃으로는 막 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폴 엘뤼아르 등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낸 2년 동안 미로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작업에 매진하였습니다. 1928년 봄, 미로는 2주 간 네덜란드를 여행하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왕립미술관을 방문하여 그곳에 소장되어 있던 네덜란드 바로크 장들 의 세밀한 세부묘사와 사실주의적 완벽성에 매료된 미로는 곧바로 복 제 그림엽서를 가지고 파리로 돌아와 〈네덜란드 실내〉 연작을 그리게 됩니다.〈네덜란드 실내〉 연작은 헨드릭 마르턴스 소르흐의 〈류트 연주자〉를 변용한 〈네덜란드 실내 I〉과 얀 스텐의 〈고양이의 무용 수업〉과 〈화장 실 앞 젊은 여인〉을 모방한 〈네덜란드 실내 Ⅱ〉와 〈네덜란드 실내 Ⅲ〉 의 3점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들을 보면 미로의 독자적인 사실감각과 네덜란드 대가의 평범한 사실주의가 기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로는 실내 풍경 속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 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재창조하였습니다. 이 중 〈네덜란드의 실내 I〉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탁자 아래에 앉아 있는 고양이와 강아지, 창 밖으로 보이는 암스테르담의 전경들이 등은 모두 원작의 배치를 따르고 있지만, 원작의 모든 디테일은 미 로의 엉뚱한 유머로 변형되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주황색의 류트가 보이고, 하얀 유령처럼 묘사된 류트 연 주자는 앙증맞은 수염을 달고 있습니다. 고양이는 탁자 밑에서 털실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으며, 강아지는 뼈를 핥고 있습니다. 연주자 오른 쪽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있는 여자와 실내의 다양한 사물들은 둥둥 떠 다니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신나고 밝은 분위기로 표현되어 관람자에게 유쾌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로는 독창적이고 조화로 운 자신만의 회화방식을 고수했는데요.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순수 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과 같이 단순화된 이미지와 부호화된 상징을 통 해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초현실주의 이론과 기법에서 전개된 미로의 ‘꿈의 회화’는 그에게 충분한 표현수단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다이즘과 접 하면서 품게 된 미로의 잠재된 반항심은 1928년 겨울부터 서서히 폭 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폭발은 자신의 성격을 성찰하는 태도와 결합되어 미로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반발의 움직임은 ‘회화 말살’의 욕구로 표출되어 그는 타고난 재능에 훈련을 거 듭함으로써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미로는 한동안 유화 대신에 비전통적이고 양식 변화를 요구하는 매체로서 콜라주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의 추상적 구성은 콜라주 연작으 로 전개되었는데, 통속적인 엽서가 도입되었고 선 드로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미로는 처음으로 질감이 있는 표면을 연출하는 데 즐거움을 느꼈으며, 기발한 소재를 선택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색채와 형태를 탐구하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부정함으로써 그 는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한 것입니다.

1929년 10월 29일, 미로는 마요르카 출신의 필라르 훈코사와 마요르 카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930년 7월 17일에 바르셀로 나에서 외동딸 마리아 돌로레스가 태어났습니다. 1929년부터 1932 년까지 미로의 가족은 파리와 몬트로이그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은 1930년대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화상들은 더 이상 미로의 작품을 구매할 수 없었고, 물질적 궁핍을 겪게 된 미로는 1933년부터는 바르셀로나에 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개성 넘치는 화풍의 구현

미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다다이스트들의 사회에 대한 반역 적 태도를 인정하고 초현실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들 이 펼친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정 치적 사건에 강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1930년대 초 정치상황이 심한 게 악화되면서부터였습니다. 내레이터 : 미로는 일상사의 인간들을 채택하여 독설적인 유머를 가 지고 상상의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미로의 ‘야성 회화’는 정밀한 세부처리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인간에게 유령의 형상을 부 여하였습니다.〈남자의 머리〉는 현실에 대해 미로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표현하 고 있습니다. 그림 속 남성은 머리의 형태가 왜곡되어 있고 눈도 크 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혀는 분노로 소리치는 듯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데, 이는 마치 장차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질 시대를 예고하는 전 주곡 같습니다. 1936년 7월,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이 인솔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민족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 간에 내전이 일어났고, 이 내 전은 민족주의자 진영의 프랑코 장군이 1939년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미로는 전쟁을 피해 1937년에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파리는 프랑코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파 시스트로부터 박해받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망명해 있었습니다.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은 조국에서 일어나는 내전의 공포를 담은 작품으로,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과와 빵, 포도주 병,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소재로 하여 재난의 분위기를 담았습니다. 사과는 하늘에 서 팔처럼 내려온 잔혹한 포크의 날에 관통되고, 너덜너덜한 포장지로 싼 포도주 병은 불에 탄 듯 뒤틀리며 검게 변해버렸습니다. 반쯤 먹은 빵은 말라서 식욕을 잃게 하고, 낡은 구두는 형태가 망가져 쓸 모가 없어졌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공화주의 정부를 도울 기회 를 찾던 스페인 망명 예술가들에게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 회는 매우 좋은 기회였습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잔인한 폭격을 고발한 〈게르니카〉를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였습니다. 〈게르니카〉의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대작이 걸려있었는데요. 바로 호안 미로가 그린 벽화 〈추수하는 사 람〉입니다. 자신의 고향 카탈루냐의 민중들이 파시스트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미로는 낫을 든 카탈루냐의 농부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Segador’(세가도르)는 추수하는 농부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인데, 이 작품에서는 낫을 무기로 항거하고 있는 카탈루냐의 농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오늘날 직접 감상할 수는 없는데요. 박람회가 끝나고 〈추수하는 사람〉은 발렌시아에 있던 공화국 정부의 문화예술부장관 앞으로 발송되었는데, 그 후의 행방이 확 실치 않습니다. 아마도 운송 중에 파손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로는 노르망디 지방의 바랑주빌에 머물면서 〈성좌〉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40년, 독일군을 프랑스로 진격해 왔고 미로는 제작 중이던 〈성좌〉를 들고 가족과 함께 전쟁을 피해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당시 주민이 40만 명이던 이 작은 섬의 아름다운 경치는 미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미로는 지중해의 에너지를 흠뻑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성좌〉 연작을 완성하였습니다.

〈성좌〉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미로의 위대한 감수성으로 해석된 우주의 생명과 운동의 축소판입니다.이 연작의 제작방식을 보면 먼저 배경을 칠하고 여기에 우의적 인물이 나 별, 원형, 나선형, 삼각형과 사각형을 선으로 그립니다. 그러고 나서 유기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가 교차하는 부분에 화려한 원색을 칠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에는 격정도 야만도 없으며, 고전음악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상하게 하는 운율만이 있습니다. 관능적인 리듬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고 양식화된 형상들이 음악의 음표를 떠올리게 합니다. 1945년에 화상 피에르 마티스는 뉴욕에서 미로의 〈성좌〉 연작을 전시하여 대단한 성공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명성은 아직 대 중적이지 않았던 미로가 미국에서는 대단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는데요. 미국의 신세대 화가들은 미로를 선구자로 간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949년과 1950년에 미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양식으로 다수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로 ‘느린 회화’와 ‘자연발생적 회화’입니다. 느린 회화는 세부묘사까지 집중하여 완벽을 기하는 작업방식이고, 자연발생적 회 화는 놀라울 정도로 즉흥성을 보여주는 작업방식인데요. 두 경우 모두 배경을 먼저 작업하는 방식에서는 동일합니다.

〈햇볕 속의 사람들과 개〉와 같은 느린 회화 작품을 보면 세부에 주의를 기울이고 수고로운 노력을 들여 기호와 전체 구성을 전개하였습니다. 형태와 선은 정확하며, 화려한 원색은 놀라운 생기와 광채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반면, 〈회화〉와 같은 자연발생적 회화에서 미로는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형상들을 단번에 그립니다. 이 회화들은 심사숙고한 계산 된 명료함을 보여주는 느린 회화와 대비를 이루며 매력을 발산합니다. 1955년, 미로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신축건물의 외부에 전시될 대형 벽화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초부터 갈리 미술학교 시절 알게 되었던 친구 조셉 로렌스 아르티가스와 함께 도예 작업을 하고 있었던 미로는 아르티가스와 함께 벽화를 도자기 타일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미로는 유네스코 건물의 건축양식을 참고하여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는 강렬한 붉은빛 태양을, 작은 벽에는 푸른빛의 초승달을 그리기로 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 미로와 아르티가스는 스페인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관람했고, 가우디의 모자이크도 연구했습니다. 도 자기 타일의 표면이 너무 매끄럽거나 반사를 일으킬 것이 우려되었던 그들은 의도적으로 표면이 거칠거칠한 타일판을 사용하였습니다. 결국이 방법은 작품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60세가 넘은 미로는 계속해서 상황과 작업에 따라 바르셀로나 와 몬트로이그, 파리, 뉴욕을 오가며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붓칠을 시작해 완성작으로 탄생할 때까지 예술적 영감에 파묻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을 한없이 그리웠습니다. 이에 미로는 그의 어머니와 부 인의 고향인 마요르카섬에 자신의 작업실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미로의 작업실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스페인관을 만들었던 건축가 세르트 가 195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56년에 완공되었으며, 마침내 자 신이 소망했던 작업실을 얻게 된 미로는 마요르카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로의 오랜 친구인 호안 프라트는 미로에게 현대미술을 전파하기 위한 기관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고, 전 세계인들이 예술과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던 미로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이로써 1975년,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 호안 미로 재단이 완공되어 일반들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건축가 세르트가 설계한 이 건물에는 5,00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271점은 미로와 그 가족들의 기증품입니다.

점점 쇠약해져가던 미로는 여러 곳에 있는 작업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한 끝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바르셀로나에 있는 호안 미로 재단과 유사한 새로운 재단을 자신이 살고 있는 마요르카섬에 설립하 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81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호안 미로 마요르카 재단은 미로의 작품을 영구히 보 존하기 위한 살아 있는 미술연구소가 되었습니다. 1983년, 미로의 건강은 하루가 달리 악화되어 갔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앉아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물감과 연필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새로운 예술 영역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았던 미로는 1983년 12월 25일, 90세의 나이로 마요 르카섬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과 호안 미로가 이웃사촌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지휘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안익태는 공연을 위해 1946년에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였고, 여기서 스 페인 여성인 로리타 탈라베라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원래는 바르셀로나에 신혼집을 차렸으나, 곧 마 요르카 교향악단 상임지휘자직을 제안받고 마요르카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스페인과 파리,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펼친 호안 미로 역시 1956년부터 자신이 꿈꾸던 작업실을 지은 마요르카섬에 정착하여 생활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이 된 안익태와 미로는 서로의 작업실과 공연장을 자주 드나들며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음 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미로는 작업을 할 때 안익태가 작곡한 음악을 듣곤 하였으며, 안익태가 마요 르카섬에서 연주회를 열 때면 어김없이 연주회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안익태와 미로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하였을까요? 미로의 손자인 호안 푸리에트 미로는 ‘마 요르카섬에서 미로와 안익태는 이웃사촌이자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친구’였다고 하면서, ‘두 예술가는 산책하는 도중 만나 음악과 미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안익태와 미로의 우정을 통해 인종과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을 이어준 예술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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