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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마그리트, 초현실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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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발한 생각이나 독특한 제목,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담았다면, 마그리트의 작품은 계획에 따라 만들어져 논리적이고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마그리트를 ‘그림 그리는 철학자’라고도 부릅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해야’ 하는 그림입 니다. 또한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의 레진에서 삼 형제 중 장 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양복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상인이었습니다. 마그리트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남아 있는 기억은 모두 별나고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일종의 환상처럼 특히 그 가 기억하는 것은 요람 가까이에 커다란 나무상자가 나타나는 환상을 본 것과, 가죽옷을 입고 헬멧을 쓴 사람들이 탄 열기구가 그의 집 지붕 위에 불시착한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마그리트의 상상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훗날 그의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마그리트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12년에 그의 어머니가 상브르강에 몸 을 던져 자살하였습니다. 어린 마그리트는 어머니의 시체를 강에서 건 져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고 하는데요. 새하얀 잠옷치마에 얼굴이 덮인 채로 건져진 어머니의 모습은 마그리트의 내면에 깊은 충격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훗날 그의 그림에 종종 재생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그리트의 가족은 샤를루아로 이사하였고 1913 년, 샤를루아의 마을 축제에서 장차 아내가 될 조르제트 베르제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샤를루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마그리트는 아 테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을 공부하였으나 수업에 흥미를 느 끼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테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브뤼셀로 가서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아카데미 데 보 자르에서 미술을 공부하였습니다. 1920년, 마그리트는 브뤼셀의 식물원에서 조르제트와 우연히 다시 만 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가깝게 지내면서 조르제트는 마그리트의 유일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2년 후인 1922년에 둘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1926년에 그린 〈길 잃은 기수>는 마그리트의 첫 번째 초현실주의적 작 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수가 거대한 난간 기둥과 같은 나무 숲 속에 있는데, 이 나무들은 계단이나 다리의 가로대를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된 난간과 유사해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거꾸로 뒤집힌 탁자 다리나 확 대된 체스 말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이러한 작은 기둥들은 마그리트의 작품 전체에 걸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요소’ 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이 그림은 실제로 보이는 것 이상의 신비하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탄 기수의 모습은 1965년에 〈백지 위임장>에서 정식 승마복을 입 고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말과 나무가 모호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말이 나무 앞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무 뒤에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보입니다. 마그리트는 인간의 사고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파악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요. 이처럼 그는 회화를 이용해서 생각을 가시화하였습니다. 1927년에 마그리트는 브뤼셀에 있는 르 상토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길 잃은 기수>를 포함하여 〈카옌의 새벽>, 〈위험에 처한 암살자>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습니다. 비록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때 화랑 주인인 반 헥케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에, 마그리트는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사색하는 화가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여긴 마그리트는 1927년 8월에 초현실주의자 무리와 합류하기 위해 브뤼셀을 떠나 파리로 갔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과 교류 하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그러나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과 마그리트의 교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초현실 주의자들의 정기모임에 마그리트의 부인 조르제트가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황금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참석하였는데요. 광신적인 천주교 반대자였던 브르통은 종교적인 상징을 걸고 다니는 것 은 나쁜 취향이며, 초현실주의적이지 않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점차 브르통과의 관계가 멀 어져가던 중에 파리에서 마그리트를 후원하던 카미유 괴망스의 화랑이 1929년에 파산하여 문을 닫게 되자 더 이상 파리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된 마그리트는 1930년에 다시 브뤼셀로 돌아왔습니 다.초현실주의자들이 새로운 사실과 개념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고안해 낸 방법은 우연의 기법에 바탕을 둔 ‘자동기술법’인데요. 이것은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그리고 미학적·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데, 여기서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는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들 꿈과 우연, 원시적인 이야기 등에 서 힌트를 얻어 불가사의한 이미지를 자유로이 전개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펼쳐나갔습니다.그러나 마그리트는 자동기술법의 바탕이 되는 무의식 상태를 신용할 수 없었고,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초자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탐구한 우연의 기 법보다는 이탈리아의 형이상학적 화가인 조르조 데 키리코의 회화기법을 지지하여 또렷한 의식이 만들 수 있는 허구의 유희에 충실했습니다. 마그리트에게 있어 데 키리코는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가?’보다 ‘무엇 을 그려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 최초의 미술가였습니다. 데 키리 코의 작품에서는 익숙하고 평범한 물건들을 세상에서 이들에게 부여된 기능으로부터 떼어내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배치하여 정체 모 를 이상한 존재로 느껴지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노래>에 서 건축적인 배경 안에 벨베데레 아폴로의 석고상 머리, 외과의사의 고 무장갑과 초록색 공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은 비합리적인 사건의 심오 한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마그리트는 데 키리코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 인 사물을 그린 것 같지만 사물들을 예기치 않은 배경에 놓아 낯섦과 기묘함을 느끼게 하여 관습적인 사고의 일탈을 유도하는 작품을 그려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이라고 합니다. ‘추 방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데페이즈망’은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물체를 본래의 일상적인질서에서 떼어내 예기치 않은 문맥으로 제시하여 보는 이들에게 심리 적인 충격을 주는 기법을 말합니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한 마그리 트의 작품은 시각적인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 사고의 혼란을 가져오는 동시에 그림 속에 위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의 배반>은 마그리트의 초현실 주의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익 히 알고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데요. 그 아래에는 프랑스어로 ‘이 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모순어법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그림은 실제 파이프가 아 니라 파이프를 그린 이미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관습에 따르면 파이프 를 재현한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마그리트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 는 문장을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 합니다.〈인간의 조건>은 방 안에서 바라본 창문 밖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나무와 풀밭이 있는 들판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요.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친근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창문 앞 에 배치되어 있는 또 하나의 캔버스를 인지하는 순간, 캔버스 안에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는 점이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캔버스 안 의 그림은 바로 창문 밖의 들판의 풍경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캔버스 의 그림이 실제로 창문 밖의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나무와 풀밭은 풍경의 한 부분으로, 창문 밖에 있기도 하고 캔버스 속에 있기도 합니다.〈전원의 열쇠>에서도 창문 바깥의 풍경이 유리창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창은 깨져 있고, 나무와 들판, 하늘이 조 각난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깨진 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이 고 있는데요. 여기서 관람자들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진짜 바깥 풍경이 맞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통해 과연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붉은 모델>에서는 인간의 발 모양을 하고 있는 한 짝의 변형된 신발이 보입니다. 이것은 신발이기도 하고 발이기도 한데요. 이렇듯 마그리트 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양가성’이 자주 드러납니다. 이렇게 발과 신발이라는 익숙한 관계에 놓인 두 대상을 하 나로 합성시켜서 보는 이를 당황하게 만드는 합성작품은 그의 작품에 서 자주 관찰되고 있습니다.

 

〈통찰력>은 화가로서 작업 중인 마그리트 자신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작품 속 마그리트는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물이 얹어진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알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마그리트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를 보면 이 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캔버스에는 알이 아니라 날갯짓하고 있는 새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 이렇게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처럼 보 이지만 실제로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관람자에게 순간적인 충격을 던져 줍니다. 이를 통해 마그리트는 화가라는 직업에 내재된 정신과정에 대 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티프가 된 알은 화가에 의해 번역되어 새의 형상으로 캔버스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즉, 화가는 알을 보고 부화하여 하늘을 나는 새가 될 미래를 통찰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 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그리트는 일상의 물건들을 독특한 존재로 바꾸어 자신만의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태도라 할 수 있는 ‘시적 이미지’를 창조해 나갔습니다. 소설가나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처럼 화가로서 마그리트는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통념과 상식을 끊임없이 분석해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한 마그리트는 화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대가의 기발한 작품세계

마그리트의 회화는 1920년대 중반에 채택한 양식에서 거의 변화 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다만 1940년대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을 사용한 것과 일종의 야수주의의 서투른 풍자를 시도했던 것이 예외였는데요.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법들은 자신의 실제 관심사인 ‘인식의 변화’에 부 적절한 요소를 덧붙인다는 이유로 몇 년 후에는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 지 않았습니다. 마그리트는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했던 1942년경에 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한 실험을 했는데, 이것은 당시 팽배했던 패배의식의 심리적 압박에 대한 일종의 저항행위였습니다. 즉, 그는 군대의 ‘공포’에 ‘기쁨’을 맞부딪쳐 히틀러의 야망을 반격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회화와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의 오랜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는데요. 마그리트는 “독일의 점령은 나의 예술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의 경험으로 인하여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매력을 표현하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고, 내 작품은 그 세계에 대한 반격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관념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악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만연하는 순간에 매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이러한 생각은 단지 어처구니없는 익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쁨과 행복의 이미지를 통해서 도발적인 의도를 지닌 음울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기의 마그리트의 작 품은 화려하고 타는 듯한 색채와 우람하고 소용돌이치는 붓놀림으로 특 징지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르누아르에 대한 호감이 반영되어 있는 데요. 마그리트의 누드작품들은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성을 연상시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세계에서 이 시기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켜서,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는 1965년에 마그리트의 회고전을 기획하였을 때 인상주의 시기, 즉 ‘르누아르 시기‘의 모든 작품들을 전시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벨기에의 한 평론가는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화가의 마지막 개화이자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영혼의 최후의 빛을 표현했던 것이 이제 가장 편협한 규율가의 우스꽝스러운 도구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마끄리 특가 르누아르를 탐구한 것은 명백한 유린 행위라고 평가하였는데, 이 는 당시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1947년부터 마그리트는 야수주의의 그림들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해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어로 ‘야수’를 의미하는 ‘포브’라는 단어의 패러디로 ‘암소’를 의미하는 ‘바슈’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었고, 스스로 이 시기 자신의 작품 활동에 ‘바슈 시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매우 현란하고 밝은 동시에 공격적이고 쾌락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당시 파리 시민들이 그들의 예술적 취향과 관습에 있어서 지나치게 자기만족적이고 득의에 차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이 파리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성난 붓놀림의 공격적인 기법으로 야수주의 양식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시 기에 제작된 작품은 1948년 파리의 포부르 화랑에 전시되었는데, 전시 회는 프랑스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없는 작품’, ‘벨기에 식의 재치’라는 조소 섞인 악평을 받았습니다. 르누아르 같은 회화를 보여준 ‘인상주의 시기’나 야수주의를 모방한 ‘바 슈 시기’ 동안 마그리트에게 쏟아진 비난은 무엇보다도 그가 한때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화가였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초현실주의자들조차도 그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마그리트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그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는 다시 1930년대 때 자신의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복귀하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마그리트는 예전부터 꾸준히 관심을 가지던 소재를 다 시 변용해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중산모를 쓴 남자’는 전 시기에 걸 쳐 마그리트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하였습니다. 마그리트는 이러한 모 티프를 좋아했으며,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자신 역시 그림과 유사한 중산모를 쓰고 사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 안에서 중산모를 쓴 남자는 대체로 인물의 개성이 전 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는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마그리트 자신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에서는 인물의 얼굴을 교묘하게 다른 물체로 가려놓았으며, 〈골콩드>에서는 작은 크기의 중산모를 쓴 남자의 형상을 빗줄기처럼 무수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모험정신>에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 인물의 개성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물을 그린 그림은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마그리트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예상을 뒤집어 관람자가이 의문을 가지도록 유도해내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만의 기발한 발상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레슬러의 무덤>을 보면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방 안을 꽉 채 우고 있는데요. 이런 황당한 설정은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 작 품과 유사한 구도로 연둣빛 사과가 방 안을 가득 채운 〈리스닝 룸>이 앞서 제작된 바 있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크기의 장미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인 ‘레슬러의 무덤’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 장미꽃 과 실내라는 재현 대상은 관객들의 인습적 기대치를 배반하고 있습니 다. 마그리트는 사물을 평범하지 않게 보여주는 방법에 관해 계속해서 고민하며 일상의 사물을 자신의 그림 속에서 독특한 존재로 바꾸어 버 렸습니다. 따라서 투사나 무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거대한 장미꽃 그림의 목적은 관람자의 오랜 인습에 순수한 시각적 충격을 던져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밤과 낮의 공존 역시 마그리트가 지속적으로 다루던 주제였습니다. 밤 의 땅과 낮의 하늘이 공존하는 〈빛의 제국>은 1949년부터 마그리트가 세상을 떠난 1967년까지 스무 점 넘게 반복해서 그려졌습니다. 그림 의 아랫부분은 어두컴컴한 밤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가로등과 주택 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달과 별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구름이 푸른 하 늘 속에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밝고 푸른 낮의 하늘이지요. 어 둡게 채색된 나무는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그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이미지인 밤과 낮이 강한 심리적 긴장감 속에서 묘하게 조화 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이와 같이 밤과 낮이 함께 있는 장면 에 대해 “이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밤에 대해, 낮의 하늘에 대해 생각하 게 한다. 내 생각에 이 낮과 밤의 동시성은 우리의 허를 찌르고 마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힘을 시라고 부른다.”라고 하였습니다. 1950년대 들어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마그리트의 명성은 점차 높아져 갔습니다. 마그리트 스스로도 많은 전시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952년 후반부터 1954년 봄까지 마그리트는 12차례 이상 전시 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특히, 1954년 3월 뉴욕에서 열린 ‘언어 대 이미지’ 전시에서 마그리트 는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마침내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마그리트는 모든 초현실주의 예술가 중 가장 역설적인 인물이었는데요.

다른 예술가들이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어 낼 때에도 그는 눈에 띄지 않 게 조용히 생활하며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마끄리 브뤼셀에서의 생활은 여느 누구의 삶과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고 오후에는 카페에 가서 체스를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경하며 몇 시간씩 앉아 있었으며, 토요일마다 몇몇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 참석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집에 별도의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아 침실이나 부엌에서 작업하곤 하였습 니다. 작업 역시 단지 이젤 하나에 팔레트, 붓, 스케치용 목탄 몇 조각 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변화와 맞물린 자신의 상상력과 더불어 살았습니다.이렇게 주목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마그리트는 1967년 8월 15 일, 브뤼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르네 마그리트는 생전에도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유명했지만, 그의 작 품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 사후에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 다. 그의 작품은 몇 세대에 걸쳐 많은 예술가들과 영화제작자들에게 영 감을 주었는데요. 이 때문에 마그리트의 작품은 ‘대중문화의 자양분’이 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마그리트의 작품은 영국의 록 그룹 '비틀즈'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마그리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과는 비틀즈의 창조적 음악 스타일 을 상징하는 로고로 선정되었고, 자신들의 음반회사 이름을 '애플 레코 드'라고 붙였습니다.미국의 밴드 ‘스틱스’는 앨범 '더 그랜드 일루전'의 재킷표지로 마그리 트의 〈백지 위임장>을 변형하여 사용하였고, 미국의 록 그룹 ‘롤링 스톤즈’의 유럽투어 포스터에도 마그리트의 〈강 간>이 차용되었습니다. 한편, 전 세계에서 1억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엄청난 흥행수입을 올 린 영화 '매트릭스 3'은 마그리트의 〈골콩드>에서 영감을 받았는데요. 그림 속 장면은 영화 속에서 스미스 요원이 자기 복제를 통해 여러 명으로 동시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연출되었습니다. 일본에서 큰 흥행수입을 거둔 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과 〈올마이어의 성>에서 모티프를 얻었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음악과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모티프를 제공하며 광범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나의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바람이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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