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Andy Warhol) 생애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을 통해 순수미술의 오랜 전통을 뛰어넘은 팝아트 예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상업 디자이너로 출발하여 영화제작자, 출판업자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예술계의 전설에 견줄만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앤디 워홀은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삼형 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루테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으로, 이민을 온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막노동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워홀의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의 탄광지대에서 일하는 광부가 되었습니다. 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워홀의 집 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민자 거주지인 도시의 소외된 빈민지역에서 워홀은 의기소침하고 소 심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런 홀에게 그림 그리기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는데요. 특히 그는 크레파스가 아닌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 을 좋아했습니다. 워홀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은 어린 시절부터 자발적 인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약한 소년이었던 워홀은 희귀병인 무도병을 앓아 학교를 자주 결석하게 되었고, 또래 친 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집에서 지내는 동안 워홀은 드로잉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워홀이 미술 분야 외에 무척 좋아하는 것이 또 있었는데요. 바로 영화 와 만화였습니다. 워홀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필름 프로젝터까지 사 주어 단편영화와 만화들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워홀은 영화배우들에게 사진이나 자서전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는 열성 영화팬이었는데, 특히 영화배우 셜리 템플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워홀의 어머니는 카메라까지 사주어 워홀이 사진 찍기에 관심을 갖게 했는데요. 집 지하실에 암실을 만들어 놓고 직접 필름을 현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비록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워홀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어쩌면 워 홀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키워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1930년대 중반에 아이가 필름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직접 사용하며 놀았다는 것은 참으 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시대를 앞서고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워홀의 예술적 성향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뛰어노는 대신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워홀을 눈여겨본 홈스 초등학교의 미술 선생님은 워홀에게 피츠버그 카네기 박물관에서 열리는 무료 예술교육과정을 수강해 볼 것을 권하였고, 이 에 워홀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카네기 박물관의 예술수업을 수 강하며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적 기초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홈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켈리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워홀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으며, 영화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졌습 니다. 영화배우들과 관련된 소품이나 자료들을 이전보다 더 많이 수집 했는데, 이러한 영화에 대한 사람이 훗날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마릴 린 먼로와 같은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그림의 소재로 삼게 한 배경이 되 었는지도 모릅니다. 194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습니다. 워홀 은 그곳에서 후에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성공한 필립 펄스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워홀과 펄스 타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알아보았는데요. 그 열정에 이끌려 서로에게 관 심을 갖게 되었고, 깊은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1949년에 카네기 공과대학을 졸업한 워홀은 펄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워홀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맨해튼의 상업미술 책임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패션 잡지인 《글래머》의 아트 디렉터였던 티나 프레더릭은 워홀 의 포트폴리오를 살펴본 후 그에게 잡지에 실을 구두 드로잉을 의뢰하였습니다. 구두 드로잉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워홀은 《글래머》지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고, 그의 삽화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뉴욕 상업미술 책임자들이 워홀을 주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워홀의 본래 이름은 체코 식으로 앤드루 워홀라였는데,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이 무렵부터 미국식인 앤디 워홀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워홀은 뉴욕의 상업 디자이너로 빠르게 성공해 나갔습니다. 그는 《글래머》지뿐만 아니라 《하퍼스 바자》 와 《보그》와 같은 유명 잡지의 삽화를 그렸으며, 뉴욕 부유층 백화점인 본윗 텔러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작업과 티파니사와 아이 밀러사의 광고 작업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워홀의 많은 작업들 중에서 특히 아이 밀러사의 구두 광고 그림은 워홀의 드로잉 기교를 충분히 과시한 작품이었습니다. 워홀은 상업미술이 순수미술에서 파생된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순수미술에서 느끼 는 고상한 감각을 상업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선의 유용함을 적절하게 활용하였습니다. 그가 지닌 이런 탁월한 감각이 잘 드러난 이 광고는 1955년에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 뜸해 워홀은 이 광고 디자인으로 상업미술가 클럽에서 상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아트 디렉터스 클럽으로부터 메달도 수여받았습니다.
작품활동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벽을 허물다.
워홀은 많은 일을 멋진 솜씨로 해내었으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조수를 고용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상 업미술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했지만 워홀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순수미술에 대한 갈망 문이었는데요. 상업미술가로 유명해질수록 그 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점점 더 순수미술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습니다.
1960년 초에 워홀은 상업적 드로잉을 그만두고 순수미술을 하기로 결 심하였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의 에너지가 지배하고 있었 지만, 이것은 워홀에게 호소력 있는 미술경향이 아니었습니다. 순수미 술 작업을 하면서 워홀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다른 사람의 그 림과 비슷한 것을 싫어했던 워홀은 동시대의 여느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워홀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신선한 충격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였습니다. (일시정지되고 클릭아이콘 제시됨) 사실 순수미술을 하기로 결심한 후에 워홀이 처음으로 그린 것은 만화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로 화랑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리고 있는 것을 뒤따라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워홀은 다른 것을 그리겠다 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그리기로 하였는데요. 무엇을 그 릿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워홀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수프 통조림을 그 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수많은 수프 통조림 중에서 워홀은 캠벨사의 수프 통조림을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캠벨사의 통조림이 80%의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제품이었기 때문입니다. 1962년 7월, 워홀은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들을 처음으로 전시하였고,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은 곧 미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워홀은 또한 순수미술의 소재로 코카콜라 병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선을 허물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술을 특정 계층의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일반대중에게도 예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1962년부터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유화 기법은 느리고 힘들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아 무리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다고 해도 유화로 그리려면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요.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 다. 무언가 새로운 형식과 방법이 필요하던 시기에 실크스크린을 이용 한 워홀의 표현기법은 순수미술 분야에서 매우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유화와는 달리, 실크스크린을 이용하면 소재로 택한 이미지가 어떤 것이든 바로 그 표현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게 다가 직접 손으로 그린 문양이 아니라 사진을 사용하면 그 작업과정이 훨씬 더 간편해졌습니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사용해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는 앞서 캠벨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 병뿐만 아니라 지폐, 브릴로 상자 등 일상적인 소비품들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연예계 스타들과 유명 인사들, 정치인도 소 재로 택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소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실크스크린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워홀은 예술을 일반대중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것은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라는 생각을 깨뜨렸습니다.
항상 주변을 살피며 작품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았던 워홀은 점차 폭력과 죽음의 형태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끔찍한 재난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해서 신문기사나 뉴스를 보면서 관 심을 가집니다. 워홀은 신문이나 뉴스의 비극적 기사나 머리기사가 가 지고 있는 흡인력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자신의 작품소재로 삼았습니다.
1962년 6월 4일, 맨해튼의 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워홀은 비행 기 추락사고로 129명이 사망했다는 『뉴욕 미러』지의 기사를 읽었습니 다. 『뉴욕 미러』지 1면에는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구름 없는 하늘에 돌출된 반쯤 부서진 날개와 전경에 실루엣만 나 온 몇 명의 경찰과 구조대원의 모습이 보이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워홀은 이 사진을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사용해 대형 캔버스에 전사하 고 붓과 물감으로 채색하여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을 제작하였고,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워홀의 재난 시리즈가 시작되었습니다. 워홀은 재난 시리즈에서 사고로 인한 희생만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 는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있었던 인권시위 장면도 재현했는데요.
1963년 5월 17일 자 『라이프』지에 실린 백인 경찰들이 사나운 개들을 끄고 나와 평화롭게 시위하는 흑인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진을 소재로 선택하여 〈붉은 바탕의 인종 폭동〉을 제작하였습니다. 워홀의 재난 시리즈 중에서 섬뜩함과 함께 죽음과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전기의자〉 시리즈입니다. 이 작 품들은 미국의 공산주의자로,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당한 뉴욕의 싱싱 교도소(sing sing prison)의 사 형 집행실에서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하였는데, 워홀은 동일한 사진에 제한적인 사진 보정작업과 배경색상의 변경만으로 〈전기의자〉 시리즈를 제작하였습니다. 워홀은 소재의 섬뜩함이나 어두운 죽음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여 사진 속 공간이 사형이 집행되는 끔찍한 장소라는 사실을 잊 게 하고, 더 나아가 환상적인 느낌마저 들게 했습니다. 그는 잔인하고 괴이한 것들조차 그 이미지를 뭉개는 색과 반복되는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의 경계선을 허물게 하였습니다. 이 는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워홀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워홀은 1962년 8월에 뉴욕의 제니스 화랑에서 열린 새로운 리얼리스트라는 팝아트 전시회에 초대되었는데요. 이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 워홀은 미술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그가 택한 일상적이 소재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대중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팝아트의 선두주자
‘팝아트는 1954년에 미술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추상미술 같은 복잡한 그림이 아닌 대중에게 친숙한 만화나 광고, 사물, 대중스타 등을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표현한 예술을 말합니다.
추상표현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의 예술계는 미술을 포함한 모 든 예술은 고상하고 심각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묻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높은 수 준의 지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취해야만 했고, 예술품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 예술의 소재와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소재, 심지어 만화나 광고 자체를 작품소재로 삼는 팝아트가 추상표현주의에 대항해서 등장했다고 보는 시각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팝아트는 교양을 중시하던 추상표현주의가 과거에 무시하고 거부하던 것들, 예를 들어 매스미디어나 광고, 상품, 음식, 영화배우 등과 같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작품의 소재로 삼 았습니다. 또한 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와 달리 번쩍거리는 화려함과 유머 감각이 있으며, 보는 이들에게 놀이처럼 재미를 줍니다. 이렇게 예술을 놀이처럼 보이게 하는 모호함이 바로 팝아트의 핵심입니다.
기존의 규범과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팝아트는 1950년대 영국에 서 그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으나, 1960년대에 미국 사회 속에서 마침내 꽃 피울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팝아트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메리칸드림과 관계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의 자동차나 미국 사람들이 먹는 음식, 미국 가정에서 사용되는 상 품들은 전쟁 후에 피폐해진 영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인 워홀에게 아메리칸드림은 부와 성공은 모두 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는 모든 미국인이 똑같이 코카콜라를 마시거나 캠벨 수프 통조림을 먹 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여기서 자신의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 흔히 사 용하는 지극히 대중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소재로 선택하여 작품을 제 작하였습니다. 부를 가진 사람이나 일반 사람이나 모두 같다는 것을 강 조한 워홀의 작품은 당시 만연해있던 아메리칸 드림을 구체화시키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마침내 그는 성공한 팝아트 예술가로 우뚝 서 게 되었습니다.
워홀의 작업은 후에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와 같은 고 전작 품까 지도 소재로 삼게 되었는데요. 이와 같은 그의 팝아트 활동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선을 없애려 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워홀은 더 많은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1964년에 모자를 만들던 공장의 꼭대기 층을 빌려 작업실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는 400제곱미터나 되는 공간을 모두 터버린 후에 천장과 벽, 창문, 파이프를 은박지로 감싸고, 은박지로 쌀 수 없는 바닥이나 캐비닛 등은 은색으로 칠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새로운 작업실을 특별한 이미 지로 꾸며놓은 워홀은 그곳을 팩토리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여기에는 그의 예술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워홀은 팩토리에서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도 제작하였습니다. 워홀의 첫 번째 영화는 상영시간이 6시간이나 되는 〈잠〉으로, 이 영화는 당시 친구로 지내던 존 조르노가 잠을 자면서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위홀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처럼 같은 장 면을 되풀이해서 보여준 셈이지요. 그는 조르노의 잠자는 모습을 아무런 연출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름에 담아냄으로써 누구나 하는 행위인 잠;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워홀의 영화 중 가장 걸작은 〈엠파이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작품은 35분짜리 필름 12통을 사용한 총 8시간짜리 영화입니다. 해가 지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외부와 사무실에 조명이 켜지고 새벽이 되자 사무실 불들이 꺼지는 모습이 전부인 이 영화는 상영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호평을 았습니다. 워홀의 영화는 실험적인 요소가 많아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혹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그만큼 그는 늘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워홀은 혹평조차도 자신과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호평이 아니라 영화 제작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능을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워홀은 〈잠〉과 〈엠파이어〉 를 포함한 5편의 영화로 독립영화제작자에게 주는 상을 받으며 마침내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워홀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7년 워홀이 제작한 영화 〈나, 남자〉에 출연했던 밸러리 솔라니스 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워홀에게 보여주며 영화로 제작해 줄 것을 요 청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영화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고, 솔라 니스는 워홀에게 시나리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고, 워홀은 시나리오를 잃어버렸다고 하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1968년 6월 3일 솔 라나스는 워홀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처음 쏜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은 워홀의 오른쪽 옆구리를 관통하였습니다. 병원으로 실려간 워홀은 비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포 함해 다섯 시간 반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후 워홀은 평생 간헐적인 통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병원을 자주 들락 거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솔라니스의 총격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워홀의 작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기 시작하였습니다. 워홀이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평소 그의 가치를 인정하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경쟁적으로 구입했기 때문입니다. 1970년 경매에서는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이 당시 생존한 예술가의 작품 중 가장 높은 가격인 6만 달러에 거래되기 도 하였습니다. 워홀은 부자가 되었지만 팩토리 운영을 위해서 계속해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그는 사교계 초상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유명 배우들과 저명인사들은 물론, 부자들과 기업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작하였습니다. 워홀은 이젤 앞에 모델을 두고 초상화를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사진을 이용했는데요. 초상화 의뢰자를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은 후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실크스크린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손질했 는데, 목을 길게 하거나, 코를 깎아 다듬거나 입술을 확대하거나 얼굴색을 밝게 하였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냉전의 기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는데요. 미국은 서구 자본주의 국 가와 연합해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수교를 원했던 중국의 요청으로 1972년 2월 21일,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을 만 났고, 이때부터 미국과 중국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워홀은 세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모두 그렸는데 요. 그중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워홀은 『붉은 책』에 실린 마오쩌둥의 사진을 가지고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오 쩌둥이 격노한 여왕처럼 립스틱과 아이섀도를 바른 것처럼 보이게끔 이미지를 수정하였습니다.
마오쩌둥 초상화를 통한 워홀의 변신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워홀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정치가의 이미지 중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독을 제거하는 데 성 공한 것입니다. 워홀이 작품으로 제작하기 전까지 마오쩌둥의 사진을 걸어놓는 것은 자유주의 체제의 전복을 주장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위였습니다. 마치 마르크스나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요. 그러나 워홀은 이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를 누가 봐도 안심할 수 있는 화사한 이미지로 바꾸어놓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누구나 사회체제를 뒤집어엎을 것이라는 느낌을 풍기지 않으면서도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워홀에게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했다 는 점에서 매우 특별합니다. 워홀의 손을 거치면 대상이 지니고 있던 이미지나 주제가 간단히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으며,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창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87년 2월, 워홀은 담낭 염증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을 싫어했던 워홀은 내키지 않았지만 수술을 받기로 동의하였고, 몸에서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 병실에 있던 워홀은 2월 22일 새벽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팝아트의 수상 자리에 앉아 있던 슈퍼스타 워홀은 이렇게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상업미술가와 순수미술가로서 모두 성공해 이름을 떨친 워홀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한 예술가였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예술과 비즈니스를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채 영원한 세계로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팝아트라고 하면 우리는 미국의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앞서 대중적 이미지를 순수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팝아트의 아버지는 바로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입니다. 1960년대 앤디 워홀로 대변되는 미국의 팝아트와 달리, 영국의 팝아트는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비주의 사회의 등장과 함께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팝아트는 사회 비판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인 대중문화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영국 팝아트의 필두에는 바로 리처드 해밀턴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시작 한 1950년대 중반에 해밀턴은 전후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며 대량생산과 대중문화를 미술에 끌어들 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TV와 오디오, 토스터기, 신문, 속옷광고 등을 미술소재로 활용하며 반복과 과 이이 특징인 소비문화의 이면을 날카롭게 직시하였습니다.
1956년에 발표한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는 그의 첫 팝아트 작품으로, 지금 봐도 당시의 시대상을 잘 묘사한 획기적인 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대 가정집의 실내모습을 콜라주로 재현한 이 작품에서 근육질의 남자가 빨간색 테니스 라켓을 들고 거 실 한가운데 서 있고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받치고 있습니다. 속옷 차림의 남자와 여자는 부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각 같은 몸을 지닌 남녀는 잡지 속의 속옷광고를 오려서 붙 인 것으로, 이는 몸매 가꾸기에 열성적인 현대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방안에는 온통 대량소비시대의 물품들로 넘쳐나는데요. 오디오, TV, 청소기, 토스터기는 현대 기술을, 커피와 토스트는 현대인의 소비주의를 상징합니다. 또한 거실에 널린 신문과 TV를 통해 현대인이 무의 식적으로 많은 매체에 노출되어 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남자가 든 테니스 라켓에 노란색 글씨로 팝이라고 쓴 것은 팝아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새 로운 미술운동인 팝아트를 시각적으로 처음 인용한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습니 다. 해밀턴은 생전에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덧없으며 확장할 수 있고, 싼 가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매력적인 큰 사업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대량생산과 복제의 이미지를 미술에 차용한 그는 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을 간파하고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던 혁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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