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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프리다 칼로, 페미니스트 작가,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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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Frida Kahlo) 생애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합니다. 소아마비로 어릴 적부터 다리를 절었고,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러진 후부터 그녀의 삶은 고통과 병마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으며,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 다. 역사상. 외로운 예술가 중 한 명이었던 칼로는 자신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자주 외롭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생을 몸과 마음의 고통과 싸워야 했던 칼로는 피 흘리고 찢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남서쪽의 코요아칸에 있는 푸른 집에서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혼 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 명의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셋째 딸에게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 었습니다. 푸른 집은 칼로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04년에 아버지가 지은 저택은 로, 밝은 푸른색 담장에 연두색 덧문이 달린 U자형 단층건물입니다. 칼로의 아버지는 멕시코 정부의 의뢰를 받아 활동하는 사진작가로 성공가 도를 달리고 있던 인물로, 무일푼으로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던 이방인으 로서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칼로를 낳은 후 연이어 아이를 출산했던 칼로의 어머니는 아이를 돌볼 수 없을 만큼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어린 칼로 는 인디언 유모의 손에 키워졌습니다. 칼로는 이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요. 훗날 칼로이 그림에서 유모는 멕시코 전통의 상징으로, 칼로는 그 젖을 빠는 아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자신의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추가시켰던 것입니다.

한편, 칼로가 세 살 되던 해인 1910년 10월에 발발한 멕시코 혁명은 고요하던 멕시코 사회를 한 순간에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1911년 5월, 멕시코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그 후 1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자 관공서의 일을 맡아 출세 가도를 달리던 칼로의 아버지는 생계를 잇기조차 힘든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1913년, 척추성 소아마비에 걸린 칼로는 아홉 달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고통이 칼 로의 삶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투병생활 후 칼로의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쇠약 해져서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칼로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가늘어진 다리를 감추기 위해 양말을 서너 켤레씩 덧신고, 오른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녀를 나무다리 프리다라고 놀렸고, 가늘고 쇠약해진 다리는 평생 동안 칼로를 고통과 열등감에 시달리게 하였습니다. 1922년,. 1922년, 칼로는 멕시코 최고의 명문 교육기관인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35명이었는데요 칼로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칼로는 이 학교에서 생물학, 해부학 등을 공부하며 장차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무렵,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의 대강당인 볼리바르 원형극장에서는 대형벽화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작업은 멕시코 문화 부흥운동의 선두주자이자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디에고 리베라가 담당하였습니다 리베라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으며, 멕시코와 혁명을 대표하는 미술가라는 명성과 함께 분방한 여성편력으로 악명도 함께 드날리고 있었습니다. 벽화작업. 중에는 학생들의 원형극장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칼로는 갖가지 방법으로 숨어 들어가 리베라에게 장난을 치거나 작업하는 모습을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보곤 하였습니다 훗날 디에고는 자서 전에서 칼로와의 첫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작품활동

프리다칼로의 부서진 몸

칼로가 18살이던 1925년에 일어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멕시코의 진보적인 여성의사로 인 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운명은 계획한대로 그녀의 삶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1925년. 1925년 9월 17일, 칼로가 하굣길에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칼로는 척추 세 군데와 갈비뼈, 쇄골이 부러졌고, 왼발 11군데에 골절상을 입었으며, 오른발은 탈구되고 으깨졌습니다. 또한 왼쪽 어깨가 빠지고, 골반뼈도 3군데나 부러졌으며, 버스의 손잡이용 쇠막대 가 튕겨 나와 칼로의 자궁을 관통하였습니다. 의사는 이런 중상을 입고도 살아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칼로에게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고의 심각성에 비추어 보자면 이미 예 고된 운명이라고 해야 할 일이었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서 이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칼로는 이 사고로 꼬박 9개월 동안을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 했고, 평생 미국과 멕 시코를 오가며 30차례가 넘는 외과수술을 받았습니다. 칼로는 이 사고로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 서진 것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는 시간들이 그녀를 덮쳤습니다.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칼로의 부모는 그녀를 위하여 침대의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 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부착해 주었습니다. 칼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칼로는 자신의 운명이 그림에 있음을 느끼고,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칼로가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입니다. 그 림 속에서 칼로는 고통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강조하는 어두운 보랏빛 배 경 위에 몹시 연약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요. 누군가 잡아 주기를 바라 는 듯 오른손을 앞으로 살짝 내밀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칼로는 혁명의 이념과는 무관함 삶을 살아왔습니 다. 그러나 병실에서 고독과 맞서 싸우면서 혁명의 세계에 한걸음 다가서게 되었는데요. 신문과 잡지를 통해 칼로는 멕시코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 다툼, 북아메리카의 위협, 민중세력에 가해진 탄압 등 바깥 세계에 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수차례의 수술 끝에 칼로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된 칼로는 1928년 1월, 공산주의 소모임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임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출신의 사진작 가이자 여류 공산주의자인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의 소개로 칼로는 리베라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림을 정확히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칼로는 리베라에게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평가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칼로의 작품에서 예기 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 을 보았다. 며,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라고 평했습니다.. 리베라는 칼로에서 그림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 주었고, 마침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습니다. 1929년 8월 21일, 스물두 살의 칼로는 그 녀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마흔세 살의 리베라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미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리베라와 칼로의 결합을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조용하고 행복한 삶은 칼로와는 먼 것이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여성편력을 가지고 있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칼로는 질투와 분노를 넘어선 고독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훗날 칼로는 나는 일생 동안 두 번 의 중대한 사고를 겪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리베라를 만난 것이다.라고 술회하였습니다. 칼로는. 리베라와의 결혼 후 멕시코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멕시코 여성 이 입는 전통복장인 테우 아나를 즐겨 입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신중하게 의상을 골라가며 의식을 치르듯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칼로에게 있어서 의상은 일종의 팔레트였으며, 자신의 개 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연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1930년,. 1930년, 칼로는 3개월 된 태아의 위치에 문제가 생겨 중절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의사의 말이 사 실로 확인되면서 칼로는 깊은 슬픔과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1930년 11월, 리베라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의 런천클럽 벽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어 칼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떠 났습니다. 중절수술 이후 우울증에 빠져 있던 칼로에게도 미국행은 큰 기분전환이 될 만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칼로에게 샌프란시스코는 기대했던 자유와 환상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여자를 거 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리베라 모델들과 심심찮게 염문을 뿌리며 며칠 씩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혼자 남은 칼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칼 로에게 샌프란시스코는 멕시코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외롭고 낯 선 이방이었습니다. 이. 무렵 칼로는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를 그렸는데요. 그림 속에서 리베라는 팔레트와 붓을 솜씨 있게 다루는 위대한 화가로, 칼로는 천재 화가를 사모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몸무게 136킬로그램의 거대한 남편 곁에 키 162센티미터, 몸무게 44킬로그램에 불과한 신부는 너무도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 리베라의. 커다란 두 발이 개선문의 초석처럼 굳건하게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데 반해, 앙증맞은 슬리퍼를 신은 칼로의 두 발은 너무나 연약해 서 서 있기조차 힘겨워 보입니다. 1931년. 1931년 6월, 멕시코 대통령인 오르티스 루비오가 리베라에게 왕궁 대 계단의 프레스코화를 마무리할 것을 재촉하는 전보가 날아오자 칼로 부부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지낸 일곱 달 동안 고독 과 향수에 괴로워했던 칼로는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모처럼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931년 11월, 리베라가 디 트로이트 예술원에 프레스코화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과 뉴욕현대미 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할 것을 제안받게 되어 칼로는 다시 미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디트로이트. 생활 중 칼로는 간절히 원했던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어 나, 3개월 만에 유산되었습니다. 절망에 휩싸여 몸부림치던 칼로는 유 산 후 몇 주 동안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데생을 하였습니다. 그림은 그녀가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리베라와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점차 그림으로 승화되 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헨리포드 병원〉은 낳아보지도 못한 채 잃은 자식에 대한 사무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칼로는 피를 흘리며 철제로 된 병원침대에 나체로 누워 있습니다 굵은 눈물이 뺨 위로 흐 르고 있고, 임신 때문에 배는 아직도 불러 있습니다 불룩한 배 위에는 여섯 개의 핏줄 같은 붉은 줄이 태아골반기계 등과 연결되어 모성의 실패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칼로가 유산 직후 완성한 또 하나의 중요한 그림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입니다 디트로 이트에서의 삶과 멕시코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상처받고 있는 자신의 삶을 표현한 이 자화상에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가 달린 구식장갑을 낀 채 서 있는 칼로는 파티에 참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예 절 바른 차림을 하고 있지만, 왼손에는 예절을 비웃는 담배를, 오른손에는 조그만 멕시코 국기를 들고 있습니다 무심한 시선에서는 멕시코의 고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와 함께 자연의 빛이나 공기, 생명보다 기계문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사회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칼로는 두 세계 사이에 서서 어느 때보다 극심한 향수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국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칼로의 간절한 소망은 대단히 비 극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유방암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칼로는 기차를 타고 멕시코로 떠났습니다 칼로가 멕시코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인 1932년 9월 15일, 결국 어머니는 세 상을 떠났습니다 5주 동안 가족 곁에 머문 칼로는 그 해 10월에 다시 디트로이트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칼로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림이었습니다 칼로는 디트로이트에서 〈나의 탄생〉을 완성하였는데 요 그림에서 산모의 머리가 침대 시트로 가려진 것을 칼로는 내 머리를 가린 것은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 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림 속 산모가 어머니인 동시에 칼로 자 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은 칼로를 출산하는 어머니를 표 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출산하는 칼로 본인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는 어머니의 죽음과 자기 아이의 죽음이라는 두 번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고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던 칼로로 인해 결국 1933년 12 월, 칼로와 리베라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몸 을 실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칼로는 세 차례의 입원과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경 험해야 했는데요. 바로 맹장수술과 또 한 번의 중절수술, 그리고 오른발을 잘라내는 수술이었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와 함께 코요아 칸의 푸른 집에서 지내고 있는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회복기 동안 칼로의 곁을 지켰습니다. 이. 무렵, 칼로에게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여동생 크리스 티나와 리베라가 연인관계가 된 것이었습니다. 리베라의 수많은 여성 편 력으로 인내했던 칼로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분신 같은 존재인 여동생의 배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35년, 칼로는 집을 나와 멕시코시티 중심가의 조그만 아파트로 옮겨갔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첫 번째 별거였습니다. 1939년, 리베라는 칼로에게 이혼을 요구하였습니다. 리베라의 수많은 외도와 배신을 참아가면서도, 언제까지나 리베라의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칼로의 바람은 무너져버렸습니다. 이혼에 합의한 칼로는 분노와 상 실감에 피폐해져 갔고, 리베라와 헤어진 상실감으로 인해 이 시기에 피와 상처, 죽음이 작품의 주제로 드러난 작품들을 다수 그렸습니다. 칼로는 리베라와 이혼 후 고독 속에서 〈두 명의 프리다〉라는 이중 자화 상을 그렸습니다. 오른쪽에 테우 아나를 입고 있는 칼로는 리베라가 사 랑하는 여인을 나타낸 것인데요. 그녀의 심장은 온전한 채로 드러나 있습니다.. 반면, 왼쪽에 유럽풍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칼로는 리베라 가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녀의 심장은 반토막이 났고,, 동맥에서는 피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피투성이로. 고통스러워하는 한쪽 심장은 온전한 다른 쪽 심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괴로워하는 왼쪽의 칼로는 꿋꿋한 오른쪽의 칼로의 손을 꼭 쥐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데요. 통제하기 어려운 사랑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그녀만의 독특한 방 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혼. 후에 그린 또 다른 작품 〈짧은 머리의 자화상〉에서 칼로는 남편이 사랑하던 긴 갈색 머리를 짧게 잘랐고, 디에고의 옷이 아닐까 싶은 커다 란 남자양복을 입은 채 독방 한가운데 죄수처럼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림. 맨 윗부분에는 알겠지, 내가 널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 다는 걸. 이제 넌 대머리가 되었으니 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칼로의. 손에 들린 가위와 주변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처절한 자기부정을 택한 그 속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0년 12월, 칼로와 리베라는 서로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고 서로의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재결하였습니다. 그리고 1941 년 4월 14일, 칼로의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나자 칼로 부부는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정착하였습니다. 리베라와의 재결합 후 칼로는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아갔습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칼로의 명성은 높아져 갔습니다. 멕시코와 미 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쌓여갔고, 이제는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로서의 칼로의 입지가 확고해졌습니다. 또한 1943년부터는 교육부 부설 회화 및 조각학교인 라 에스메랄다의 교사로 취임하 10년간 재직하였습니다. 1946년 10월에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국립예술원에서 열린 국 전에서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특별 결정에 따라 칼로의 작품 〈모세〉 가 입상하여 5천 페소의 상금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리베라의 외도는 여전했지만 이제 그것은 칼로에게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이 칼로를 내리찍어 오로 지 자신의 척추와 그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데 요. 건강이 악화되어 척추 통증에 시달리게 된 칼로는 1944년에 의사로부터 강철로 된 척추 교정용 보정기를 착용할 것을 처방받았습니다.. 고문기구와도 같은 척추 보정기는 〈부러진 척추〉에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칼로는 척추에 철근이 박히고 온몸에 못이 꽃 힌 채 완전히 메마르고 갈라진 풍경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등을 지탱하고 압박하는 천을 댄 금속 벨트들이 그녀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는데, 이, 기구들은 한가운데에 드러나 있는 붕괴로부터 그녀의 몸을 지켜내도 록 돕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칼로의 나체에서 고통스러움과 에로 티시즘은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고 있는데요. 보는 이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근원이기도 한 이 기묘한 균형과 거기에서 나오는 완벽한 아름다 움을 통해 칼로는 일종의 고통 속의 쾌락을 구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1950년부터 칼로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오른발에 괴 저가 생겨 결국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이후 영국에서 또다시 척추수술을 받던 중 세균에 감염되는 바람에 여섯 차례나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 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 만 칼로는 그림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하루에 서너 시간씩 그림을 그려 나갔습니다. 급격히. 악화되는 병세로 칼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리베라는 1953년에 멕시코에서 칼로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습니다. 일어나 지도 앉지도 못하게 된 칼로는 침대에 누운 채 전시회장으로 옮겨져 개막식 축하연에 참석하였습니다. 전시회 직후 칼로는 오른발의 괴저가 도져서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1년. 1 후인 1954년 7월 12일, 칼로는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 면서 한 달 여 남은 결혼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했던 선물을 리베라에 게 먼저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칼로는 폐렴증세의 악화로 47년의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의 일기 마지막 장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칼로가. 사망하고 1년 후 리베라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 집을 국가에 기증하였는데요. 그녀의 집은 현재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으로 개조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칼로는. 칼로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발견되었는데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불행한 일생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히 개척해 나간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리다 칼로와 까미유 클로델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 예술가이자 다른 예술가의 뮤즈였다는 공통점 이 있는데요. 두 여인의 삶은 마치 평행우주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로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18살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중상을 입고 수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클로델 역시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고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 모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칼로는 스물두 살에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였고, 클로델은 열아홉 살에 자신보다 스물네 살이 많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성편력이 심해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 남편이 끝내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된 칼로는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는데요. 클로델. 역시 평생을 로댕 곁에서 헌신한 로즈 뵈레라는 여인 때문에 로댕과 끝내 결혼하지 못하였습니 다.

 

그녀의 작품 〈중년〉을 보면 늙은 남자가 나이 든 여인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고, 그 뒤로 젊은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는 자신과 로댕의 비극적인 관 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평생.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감내해야 했던 칼로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눈을 감으며 세상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클로델은 일흔 아홉 살에 사망하였는데, 그녀의 생의 마지막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습니다.. 로댕과의 관계가 파탄 난 후 피해망상과 함께 이상 증세를 보였기 때문인데요. 결국, 마흔아홉 살부터 세상과 연이 끊긴 채 살았던 셈이지요. 두. 여인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 우리는 생에 대한 갈망과 함께 사랑에 대한 절망을 느낄 수 있는데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마련인 인생의 모습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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