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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달리, 초현실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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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 , 1904~1989) 생애

 

20세기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소도시 피게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리의 이름 살바도르는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는데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했던 달리의 부모는 9개월 후 새로 태어난 아이가 죽은 아들의 환생이라 믿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달리는 중산층 가정에서 어머니와 하인들에게 왕처럼 떠받들어져서 응석받이로 자라났습니다. 또한 달리는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찾아 장난치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하인들을 골탕 먹이는 것은 물론 부엌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달리는 야망을 키워나가는 꿈 많은 소년이기도 했습니다. 여섯 살 때 나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일곱 살이 되자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 내 야망은 시간이 갈수록 멈출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달리는 여섯 살 때 프랑스 신부가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에 들어가 열두 살까지 다녔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수업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어했는데요. 수업시간 동안 멍하니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고, 복도에 걸린 밀레의 〈만종을 베껴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교실 천장에 비가 새서 생긴 얼룩진 무늬를 보고 갖가지 신기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습니다. 달리는 오직 한 가지 주제, 드로잉에만 열의를 느꼈습니다. 드로잉은 그의 제한 없는 상상력을 격려했으며,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현실로 만드는 수단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달리를 격려하여 다락에 있는 작은 다용도실을 작업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1921년 2월, 열일곱 살의 달리는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깊은 상처를 안은 채 마드리드로 가서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미술을 기예로 가르치는 아카데미 교수들의 가르침에 금세 실망하고, 학교 공부보다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달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슈,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그가 존경하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지척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달리는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열정이 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는데,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도 이때 만난 친구들입니다. 달리와 로르카, 부뉴엘은 당시 에스파냐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재들로 꼽혔고,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세 청년은 마드리드의 카페와 술집에서 자유를 즐기며 학장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때부터 달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특히 달리와 로르카는 서로의 작품을 칭찬하며 격려했고, 서로의 우정이 각자의 예술을 살찌워 준다고 믿었습니다. 한때 달리는 로르카와 자신을 거의 한 몸처럼 느낄 정도였는데, 이는 〈기타를 치는 피에로라는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피카소의 입체파 화풍을 받아들여 그린 이 그림에서 달리는 피에로의 모습 속에 자신과 로르카의 모습을 섞어 놓았습니다. 바닥에는 술병이 하나 있고, 피리와 카드도 있습니다. 카드에 새겨진 하트 모양은 두 사람 사이의 따뜻한 우정을 말해 줍니다.

달리는 1925년에 바르셀로나의 달마우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달리는 평론가들의 호평 속에서 많은 그림을 팔게 되었고, 유망한 신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1926년 10월, 달리는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서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의 교수 누구도 나를 평가할 수준이 아니다. 라며 졸업시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달리의 말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달리는 이미 화가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으며, 피카소뿐 아니라 카탈루냐 출신의 미술가 호안 미로도 달리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유별난 자신감과 오만한 태도는 달리가 갖고 있는 특이한 성격 탓이었습니다.

달리는 1929년, 자신의 평생 동반자인 갈라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요. 당시 갈라는 초현실주의 시인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아내였으며, 달리보다 10살이나 연상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것에 실망한 달리의 아버지는 둘의 사이를 매우 반대하였습니다.이런 와중에 달리의 〈성심에 적혀 있는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는 문구가 아내 펠리파 도메네크에 대한 모독이라고 간주한 달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딸인 안나 마리아에게 상속한다고 유언장을 고치고 아들 달리와의 접촉을 끊어버렸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은 깨어있을 때 존경하던 사람에게 꿈속에서는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라며 초현실주의의 원칙에 따라 무의식의 명령을 좇았을 뿐이라며 자신의 작품을 정당화하려 시도하였지만 그와 아버지가 완전히 화해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작품활동

달리는 1920년대 말부터 초현실주의 미술에 관심을 갖고, 초현실주의가 내세우는 이상야릇하고 꿈결같은 이미지들을 작품에 실험했습니다 달리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던 화가 호안 미로는 달리에게 파리로 갈 것을 권했는데요 호안 미로는 달리가 파리에 가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9년 4월, 달리는 부뉴엘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초현실주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영화의 제목은 〈안달루시아의 개입니다 17분밖에 되지 않는 이 영화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이 그저 손에 개미가 기어 다니거나 죽은 당나귀가 그랜드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등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한 장면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파리에서 무려 8개월 동안이나 상영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안달루시아의 개가 안달루시아의 개 자신들의 생각을 잘 표현했다며 아주 좋아했고, 이 영화를 통해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부로 성큼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예술운동으로, 프랑스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 운동의 이론적 기초가 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25년에는 파리에서 첫 번째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렸는데요. 이 전시회에서 막스에른스트와 호안 미로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그 후 초현실주의는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또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였고, 달리는 자연스레 이 집단에 속하게 됐습니다.초현실주의자들은 그 시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안락함에 빠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데요. 이들은 특히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싫어했습니다. 마티스는 좋은 그림이란 폭신한 안락의자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에게 충격과 불안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런 충격을 통해 관람객이 단순히 그림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어울리지 않는 사물을 한데 결합해 놓은 것도 있는데, 〈안달루시 아의 개에서 피아노 위에 당나귀를 얹은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 낸 조각이나 여러 가지 실물을 그림에 붙이는 콜라주 기법과 마룻바닥이나 나무판과 같이 올록 볼록한 면 위에 종이를 대고 문지른 뒤 이때 생긴 독특한 모양이나 결위에 그림을 그리는 프로타주 기법도 사용하였습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집단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달리가 주장하는 초현실주의 미술은 정신착란과도 비슷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인데요. 그런 상태에서는 한 가지 사물이 다른 것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달리의 그림 가운데는 이런 이중 이미지를 사용해서 관람객을 혼랍스럽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1931년에 그린 〈기억의 지속을 보면 그림 중앙에 시계 하나가 희뿌연 바위 같은 것에 걸쳐져 있는데요. 자세히 보면 그것은 바위라기보다 모래 위에 웅크린 사람의 형체와 비슷합니다. 계속해서 이 작품을 살펴보면 뜨거운 바닷가에서 시계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는데, 한 시계는 죽은 나무에 걸쳐져 있고 또 다른 시계에는 개미떼가 꼬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시계들의 시각이 저마다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와 같이 이 작품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1930년에 달리는 카다케스 근처에 있는 리가트 항구에 작은 집을 사서 애인인 갈라와 함께 이사하였습니다. 이 집은 원래 어부가 살던 작은 오두막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을 고치고 넓혀가면서 나중에는 작업실까지 갖춘 아름다운 집으로 바뀌었고, 달리는 이곳에서 여러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이 집은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1934년 1월 30일, 달리와 갈라는 결혼하였습니다. 갈라는 달리가 겪고 있던 깊은 우울증을 치료해 주었으며, 달리의 많은 작품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습니다.

 

〈갈라의 만종은 갈라에 대한 달리의 깊은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입니다. 달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 그림도 구석구석 주의를 기울여서 세심하게 그렸는데요. 갈라가 입은 고운 자수 재킷이 거의 실물처럼 사실적으로 보입니다.이 그림에서 갈라는 거울 앞에 앉은 것처럼 앞모습과 뒷모습이 동시에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울은 없고, 두 명의 갈라는 미묘한 차이점을 보이는데요. 한 명은 상자 위에 앉아 있고 다른 한 명은 손수레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뒤쪽 벽에는 두 사람이 해 질 녘 들판에서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그림은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을 본뜻 것입니다.

밀레의 〈만종은 달리가 유년시절에 다녔던 학교에 걸려 있었던 그림인데, 달리는 평생 이 그림을 잊지 못했습니다. 밀레의 〈만종에서 깊은 영감을 얻은 달리는 이를 모티브로 한 여러 회화 작품들을 그렸습니다.달리는 계속된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행복한 생활을 해 나갔지만 조국의 사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에서는 국가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 사이에 끔찍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은 국가주의자들의 승리로 돌아갔고, 국가주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독재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독재정부는 그 뒤로 35년이 넘게 이어졌고, 스페인의 암울한 시대는 계속되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파블로 피카소나 호안 미로 등은 공화주의를 지지했고, 초현실주의자들도 대체로 공화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끝까지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오두막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을 고치고 넓혀가면서 나중에는 작업실까지 갖춘 아름다운 집으로 바뀌었고, 달리는 이곳에서 여러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이 집은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1934년 1월 30일, 달리와 갈라는 결혼하였습니다. 갈라는 달리가 겪고 있던 깊은 우울증을 치료해 주었으며, 달리의 많은 작품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습니다. 비록 스페인 내전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지만, 달리는 전쟁이 가져온 재앙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직후 〈가을의 식인이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괴물처럼 생긴 기괴한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뜯어먹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요. 오른쪽 사람은 왼쪽 사람의 살을 숟가락으로 뜨고 있고, 왼쪽 사람은 오른쪽 사람의 살갗을 얇게 저며 내고 있습니다. 달리는 그림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달리는 많은 곳을 여행하였고,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습니다. 1936년 런던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달리는 잠수복 차림으로 강연하였는데, 이것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브르통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달리가 지나치게 명성을 좇는다며 비난하였습니다.

이 무렵 달리는 에드워드 제임스라는 영국의 백만장자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임스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달리에게 다달이 월급을 주고 달리가 그리는 그림과 드로잉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달리는 제임스에게 초현실주의 가구도 만들어 주었는데요 입술 모양의 분홍색 소파, 바닷가재 모양의 전화기 등이 이때 만든 것입니다달리는 1938년에 런던에서 평소에 존경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만났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침략으로 프로이트 부부는 런던으로 도피해 있었는데, 달리의 후원자 제임스의 소개로 런던에 머물던 프로이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달리는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몇 점 그려 주고 자신의 작품 〈나르키소스의 변신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강대한 독일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은 히틀러와 적이 되기를 원치 않았는데요 1938년,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일부를 차지해도 좋다고 합의하는 뮌헨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 체결 후 영국으로 돌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그때 〈히틀러의 수수께끼라는 그림을 그려 뮌헨 협정이 제대로 지켜질지에 대한 강한 의심을 표현했습니다

 

〈히틀러의 수수께끼를 살펴보면 전쟁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가득 차있습니다. 접시에는 신문에서 뜯어낸 히틀러의 사진이 놓여 있고, 검게빛나는 거대한 수화기는 한쪽 끝이 바닷가재의 집게발 모양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협상과 대화를 해도 결국 전쟁은 일어나고 말 것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히틀러가 다음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는데요 바로 그것이 히틀러의 수수께끼였습니다 실제로 1939년 3월에 히틀러는 군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전 영토를 차지해 버렸고,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달리는 갈라와 함께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 독일 군대가 프랑스 전체를 점령해 버렸고, 이에 달리와 갈라는 안전한 땅인 미국으로 갔습니다.달리는 1936년 뉴욕을 방문했을 당시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으며, 그 해 말에는 『타임』지의 표지에 얼굴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940년 달리가 다시 뉴욕에 왔을 때 그는 이미 뉴욕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달리와 갈라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상류사회 사람들과 언론인에게 계속해서 초대를 받았으며, 작품 의뢰도 끊이지 않아 많은 돈을 벌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1942년 달리는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생애』라는 자서전을 내어 또 한 번 세상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책은 달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사실과 다르게 지어낸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이런 거짓 이야기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단순한 실제 사실보다 마음속으로 느낀 정서적 진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지난날에 대한 잘못된 기억은 가짜 보석과 마찬가지로 가장 진실하고 가장 빛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마지막 자취

달리와 갈라는 194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리는 봄, 여름, 가을에는 리가트 항구에서 지내며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이따금씩 갈라와 함께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또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파리와 뉴욕에서 지내면서 사교와 자기 홍보, 사업을 돌보는 생활을 하였습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달리는 종교 생활과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달리의 작품은 흔히 보는 종교 그림과는 크게 달랐는데요. 어떤 이들은 달리의 신앙심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달리의 종교 작품에서 감동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는 16세기의 성직자인 성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듯한 환상을 보았다는 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관람객에게 아찔하게 높은 곳에서 십자가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1960년대에 들어 달리는 스페인 내전으로 폐허가 된 피게레스 시립 극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자신의 미술관을 세울 계획을 착수했습니다. 달리 극장 미술관이라고 불린 이 미술관은 오랜 공사 끝에 달리가 일흔 살이 된 1974년 9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달리 극장 미술관은 그 자체로 초현실주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선명한 분홍색 외벽에는 피게레 스의 전통 빵 모양의 장식을 촘촘히 붙이고 지붕에는 달걀 모양이 장식물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미술과의 외벽에는 헬멧을 쓰고 잠수복을 입은 동상들을 었습니다. 또한 위대한 왕을 상징하는 대형 유리 돔을 세웠는데, 이 유리 돔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피게레스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달리의 다양한 회화, 조각, 금속공예품, 가구 등과 함께 그의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달리의 요청에 따라 작품들은 연대기 또는 주제별 순서를 따르지 않으며, 제목도 없이 건물 전체에 골고루 흩어져 전시되어 있습니다.

70세가 넘은 달리는 몇 차례 전립선 수술을 받은 후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달리의 주치의는 달리의 정신병리학적 성격 구조는 매우 두드러지는 우울증 양상을 보인다.라고 하며, 그의 악화된 건강 상태가 육체적 요인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달리는 신경 체계가 손상을 입게 되어 오른팔이 떨리기 시작했고, 이는 회화작업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달리의 1983년 작품 〈첼로로 변화하는 여인의 위상학적 왜곡을 보면 그의 노년을 괴롭혔던 운동장애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1982년 아내 갈라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 한 달리는 갈라가 묻힌 푸볼 성에 머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전으로 푸볼 성에 큰 불이 났고, 달리는 겨우 성을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화재로 손상된 푸볼 성에서 더 이상 지내기가 어렵게 된 달리는 달리 극장 미술관의 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그 탑에 고인이 된 자신의 뮤즈를 기리며 토레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89년 1월 18일, 폐렴이 악화되어 심장이 심각하게 약해진 달리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월 23일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달리는 달리 극장 미술관 돔 아래에 매장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러 이곳에 다녀갔습니다.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와 애니메이션 영화의 선구자 월트디 즈니가 만나면 어떤 작품이 탄생할까요?

 

1945년, 디즈니는 할리우드의 한 식당에서 달리를 만나게 되는데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달리가 마음에 들었던 디즈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필름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디즈니는 1940년 작품 〈환타지아에서처럼 유명 예술가와 고전음악을 사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그 위상을 높이고자 한 것이지요 그들은 멕시코 가수가 부른 사랑 노래 데스티노를 토대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합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달리는 디즈니의 스튜디오에서 약 8개월간 일하며 스튜디오 애니메이터였던 존 헨치와 함께 수많은 아이디어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재정적 곤란을 겪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경제적 부담을 느꼈고, 결국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달리와 디즈니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 2000년대에 접어들어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미완성된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달리가 8개월 간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남겼던 스케치와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해서 2003년에 마침내 6분 남짓한 〈데스티노 애니메이션이 완성되었습니다.

 

달리와 디즈니의 이색적인 만남으로 탄생한 〈데스티노는 달리의 초현실적인 그림과 디즈니의 서정적 분위기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 작품이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인간 여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이 작품은 비록 뚜렷한 줄거리와 대사는 없지만 여인의 춤과 함께 달리 그림에서 나타나는 황량한 사막, 녹아내리는 시계 등 달리 특유의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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