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1898-1939) 생애
사람들에게 스케치북과 물감을 주고 사람을 그리고 색칠해 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은 검은색, 피부는 살색으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화가들 또한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색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은 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가 그린 인물의 피부색은 주황색과 파란색,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배경도 형형색색의 색깔을 사용하여 강렬하게 표현하였는데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도 있는 강렬한 색채기법은 눈에 보이는 색보다 화가의 감정을 담은 색채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화가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화가는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입니다. 앙리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의 카토에서 곡물상을 하는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마티스는 당시 대부분의 중류층 젊은이처럼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고향에 돌아와 법률사무소의 서기가 되었는데요. 맹장염으로 입원해 있던 중 어머니가 가져다준 물감으로 처음 그림을 그 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미술의 매력에 흠뻑 빠진 마티스는 수술 후 법률사무소에 복직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요. 매일 아침 섬유 디자인 학교에서 데생을 배운 뒤 출근하였고, 점심시간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으며 퇴근 후에는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결국 마티스는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둘 테다.라고 소리치며 반대하였던 아버지와 안정된 직업을 뒤로하고 미술을 공부하러 파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1892년 마티스는 프랑스 최고의 미술 명문 에콜 데 보자르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또 다른 미술 학교 에콜 데 자르 데코라티프의 야간부를 다녔는데요. 이곳에서 마티스의 평생의 친구가 된 화가 알베르 마르케를 만나게 됩니다. 마티스는 재도전 끝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전통적인 기법만을 가르치는 분위기에 곧 실망하였습니다. 그 뒤 마티스는 1895년 3월 상징주의 대가인 귀스타프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요. 모로는 단순한 손재주보다는 훈련된 눈과 지적인 통찰력을 강조하여 마티스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상을 화폭에 옮겨 담는 데 급급하지 말고 대상의 내면과 동화될 때까지 화가와 모델과의 교감이 이루어진 후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으며 대가들의 작품에 몰입하여 모사를 많이 해볼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거친 후에야 마티스는 비로소 자기의 주관적인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으며 색채화가로서의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모로의 또 다른 제자 루오와 쌍벽을 이루는 수제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으며, 학생들 사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18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서 상을 받은 마티스는 자신감이 생겼고 여러 모임에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신인상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피사로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마티스는 피사로에게 인상 깊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를 통해 세잔도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누군가 마티스에게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가 누구냐고 묻자 주저 없이 세잔이라고 답하였다고 하는데요. 특히 색채 대비와 조화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마티스는 시냐크에게서 신인상파 점묘풍을 고흐에게서는 그림의 강렬한 느낌에 대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티스는 일관된 단순함과 강렬함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는데요. 이러한 색에 대한 열정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라 평가 받는 원색의 대담한 병렬을 강조하는 야수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티스는 차츰 강렬하고 개성 있는 색채 효과의 표출을 절제하기 시작하였고 화면은 조화와 평온을 추구하며 성숙해졌습니다. 마티스는 1910년 뮌헨에서 열린 이슬람미술전과 그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여행의 영향으로 통일된 색채의 장식적인 요소,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의 독특한 작품을 창조하였는데요. 순도 높은 삭면들이 서로 인접하면서 독특한 색감을 창조하는 마티스 만의 예술을 확립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현대미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말년에 마티스는 관절염으로 인해 병상에서 지내게 되었는데요. 누워 있을 때도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에 목탄 조각을 매달아 침대 위의 천장에 거대한 인물상을 스케치하였으며 원색의 색종이로 멋진 형상을 오려내어 커다란 콜라주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독특한 화풍으로 창조되어 새로운 회화의 지평을 열었다고 하는데요. 몸이 아파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색채의 새로운 표현에 대해 고민했던 마티스를 야수파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활동
색채만으로 입체를 표현하다
마티스, 삶의 기쁨, 1905~1906년, 캔버스에 유채, 175X241cm, Barnes 재단 소유
마티스, 호사, 평온, 쾌락, 1905년, 캔버스에 유채, 98X118cm, 퐁피두 센터 국립협대미술관
르누아르는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너는 색채의 언어로 말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티스는 첫 야수주의 풍경화부터 말년의 색종이 작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밝은 색채를 추구하였는데요. 색채라는 것이 결코 우리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대신 색채를 통해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부터 마티스의 감정이 담겨있는 다채로운 색채의 향연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마티스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가치는 생명력을 색채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지중해에 있는 콜리우르라는 작은 해변 마을에서 햇빛 가득한 여름을 지낸 뒤 색채를 발산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느낌을 삶의 기쁨이라는 그림에 담아내었는데요. 눈으로 관찰한 사실뿐만 아니라 화가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색채의 리듬으로 표현한 이 작품을 기점으로 마티스의 야수파적인 화풍이 꽃 피게 되었습니다. 마티스는 남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빛의 표현에 대해 나름대로의 화풍을 확립한 호사, 평온, 쾌락을 남겼습니다. 시냐크에게서 점묘법에 대한 영향을 받았던 마티스는 이 작품을 통해 신인상파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화풍을 창조하였음을 드러내었으며 동시에 보색 효과를 중심으로 한 대비 효과가 매우 뛰어나게 구사된 색채의 향연을 보여주었는데요. 신인상주의를 대표했던 화가 시냐크는 이 그림을 아주 높이 평가하여 1905년 앵데팡당전의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답니다. 1905년에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을 살롱 도톤느 전시회에 출품하였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마티스와 함께 드랭과 루오 등의 화가들이 작품을 출품하였는데요. 이들의 작품은 색채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도발적이고 다양한 초기의 야수파적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전시회의 작품에 나타난 충격적인 색채를 본 예술비평가 루이 보셀은 야수 같다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야수파란 용어가 탄생하였습니다. 초기 실험작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너무나도 과격하였는데요. 마티스가 자신의 부인이 이 전시회를 관람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난 관객들은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이것은 여인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요. 마티스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맞받아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여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이 말은 20세기 미술의 기본 개념을 이루는 사고의 혁신이었는데요. 이때부터 미술이란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색채들이 다소 마구 널려 있는 모자를 쓴 여인과 달리 마담 마티스는 전체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마티스는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조화시켜 균형을 이루게 한 이 작품에서 색채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색채는 형태도 무게도 없지만 마티스는 색채만으로 형태와 입체감, 그림자, 원근, 심지어 모델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마담 마티스를 녹색 선이라고도 부르는데, 인물의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얼굴 가운데에 녹색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녹색 선을 중심으로 얼굴과 화면을 둘로 구분하고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 즉 빨강과 녹색, 노랑과 보라를 대비시켜 얼굴의 입체감과 모델 내면의 긴장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붉은 방입니다. 원색의 방 안에서 한 여인이 식탁을 차리고 있으며 붉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식탁, 그리고 파란색의 커다란 장식이 테이블보에서 벽으로 화려하게 이어지며 그림을 지배하고 있네요.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까지가 식탁이고 어디까지가 벽인지알 수 없게 식탁과 벽의 구분이 모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요. 뒤쪽에 있는 파란 원색의 하늘과 집, 초록 들판과 하얀 나무가 창문인지 아니면 그림 액자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빨강이라는 색채인데요. 실제로 벽지와 식탁을 빨갛게 해 놓은 집은 보기 드물 것입니다. 이전의 많은 화가들은 자연의 색깔을 화폭에 담거나 사실을 그림으로 실감 나게 옮기려고 하였지만 마티스를 비롯한 야수파에게 색은 자연의 색을 옮기는 것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색을 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붉은 방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작품에는 명암 표현과 원근법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회화는 화폭 안에 실제 공간을 실감나게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마티스는 실제 공간을 2차원의 화폭에 제대로 담을 수 없으며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서 사실 공간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며 형태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고, 그림 전반에 붉은 색채를 사용하여 본인이 느낀 감정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서 마티스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내려온 그림의 형식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색채를 보였던 초기의 마티스의 작품과는 달리 목욕하는 사람들과 거북은 평면의 변조를 거부하고 단순한 형태를 채택하였으며 명료함을 주장하는 작품입니다. 수수한 색채와 간소하게 단순화한 구도 역시 선명한 색조와 현란한 화법으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그림은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편에 속하는 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거칠게 표현 배경과 벌거벗은 인물들은 목욕하는 사람보다 는 오히려 미지의 곳에서 태어난 태고의 창조물들처럼 보이며 특히 중앙에 있는 인물의 원시적인 용모는 이런 느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그림 속 거북이에 의해 더욱 효과가 커집니다. 원시시대부터 존재한 거북은 생명력, 다산, 변화 그리고 성적인 것과 대지를 상징하는데요. 그림 속 세 인물이 거북에게 쏟는 관심은 거북의 정력적이고 어딘지 틀에 박히지 않은 생명력과 결합해 주제의 외적인 고요함과 격렬한 내적인 긴장 간의 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추측하기는 어려운데요. 비록 신화적인 양식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어떤 예와도 특별히 관계되는 것을 거부하며 의미를 창조하는 작업의 몫을 관람객에게 남겨 둔 채, 그림을 독립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다음 작품인달팽이는 마티스가 처음으로 종이작업을 시도한 작품으로 1941년 큰 병에 걸려 입원을 하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침대에 누워서 가위만으로도 작업이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자신의 종이작업을 가위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표현하였는데요. 가위가 일종의 붓 대신인 셈입니다. 이 작품은 흰 종이에 불투명 물감인 과슈를 칠하여 색종이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 화면에 붙이면서 제작되었는데요. 주로 밝은 원색을 썼으며 될 수 있으면 두드러지는 부분 없이 평평하게 보이도록 색을 칠했습니다. 간결하고 명확한 질서를 표현한 종이 오려 붙이기는 단순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마티스가 원하는 효과를 얻기에 손색이 없었는데요. 특히 색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물체가 가진 원래의 색 대신 새롭고 강렬한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 마티스의 작품세계가 종이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티스의 현대적인 화풍과 예술 이론은 본격적인 모더니즘 미술이 꽃피는 데 크게 기여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색의 주기율
마티스, 춤, 1909~191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91cm, 상트 페테르브르크 미술관
마티스, 음악, 1910년, 캔버스에 유채, 260X389cm, 상트 페테르브르크 미술관
르누아르는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너는 색채의 언어로 말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티스는 첫 야수주의 풍경화부터 말년의 색종이 작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밝은 색채를 추구하였는데요. 색채라는 것이 결코 우리가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대신 색채를 통해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부터 마티스의 감정이 담겨있는 다채로운 색채의 향연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대표작 춤에는 크게 3가지의 색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바로 파란색, 붉은색, 초록색인데요. 마티스가 사용한 이 세 가 지 색깔은 빛의 3 원색으로서 세 가지 색의 원리를 활용하면 수 많은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춤에 나타나 있는 3원색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그림을 꾸준히 사들이던 러시아 부호 세르게이 시츄킨의 의뢰로 탄생하였는데요. 마티스 예술의 진수인 단순성과 강렬함이 극대화되어 나타나 있는 그림입니다. 푸른 하늘과 녹색 언덕이 극도로 단순화되었고, 다섯 명의 무희는 강렬한 붉은색으로 도드라져 있으며, 서로 손을 맞잡고 돌아가는 무한의 생명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마티스는 색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면을 평면화하였으며, 빨강, 녹색, 파랑의 빛의 3원색 즉 RGB 색을 사용하였는데요. 마티스의 작품에는 이처럼 RGB만을 사용한 그림이 많습니다.
이러한 색채 표시법에는 RGB 체계와 CMY 체계가 있는데요. 컴퓨터를 사용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컴퓨터로 색채 작업을 할 때면 둘 중 어느 하나로 지정해 주어야 합니다. RGB는 모니터 상에서 작업할 때의 빛에 의한 가산혼합의 색채이고, CMY는 잉크나 물감을 사용할 때의 감산혼합 색채로 시안, 마젠타, 옐로를 말합니다. 즉, RGB는 빛에 의한 색채, CMY는 잉크나 물감에 의한 색채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론적으로는 물감을 섞을 때 이 세 가지 색으로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감산혼합과 가산혼합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RGB의 빛의 혼합을 이루는 3개의 빛을 다 섞으면 흰빛이 되는데요. 빛이 합해지면 광자가 더 증가하는 방식이므로 가산혼합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CMY를 다 섞으면 검정이 되는데, 이런 혼색을 감산혼합이라고 합니다. 물감의 색소가 다른 색은 흡수하고 특정한 색만 반사하므로 두 색을 섞으면 양쪽의 색소가 각기 특정의 흡수대가 있어서 색을 나타내는 광자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감산혼합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결국 가산혼합과 감산혼합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색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감산혼합과 가산혼합 외에도 빛의 혼합에는 한 가지의 원리가 더 있습니다. 마티스는 단색의 색채는 의미가 없으며 색과 색이 만나면서 색들 간의 관계에 의해 진실된 색이 나타난다고 믿었는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인상파 화가들은 색을 섞을 때 감산혼합이 되어 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병치혼합을 사용하였습니다. 병치혼합이란 순색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병치시키는 방법인데요. 우리 눈의 망막에 여러 가지 색을 동시에 닿게 하여 빛의 혼합이 된 색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마티스의 작품 춤에 대한 비화를 한 가지 말씀드리면서 오늘 감상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티스에게 작품을 의뢰했던 세르게이 시츄 킨 은 춤을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 계단에 걸어놓았는데요. 이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시츄킨은 마티스에게 이 그림과 짝이 될 만한, 음악을 주제로 한 그림을 다시 의뢰하였습니다. 마티스는 번잡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현관과는 달리 2층에 올라서서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요. 이로 인해 춤과 같은 색, 같은 형태의 구성이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의 음악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두 작품 속에 사용된 빛의 3 원색을 보시면 아마 오늘 배우셨던 색의 주기율에 대해 쉽게 떠올리실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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