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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가우디, 건축가,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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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 (Antoni Gaudí i Cornet, 1852~1926) 생애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에서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는데요.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시골이었는데, 그곳의 자연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를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입니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고 이해했으며,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 자연물을 자신의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습니다. 특히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몬세라트산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그 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가우디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일을 도와주곤 했는데요.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됩니다. 비록 아버지에게서 예술적인 면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다양한 재료들을 다룰 기회를 많이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우디가 어떠한 재료도 겁을 먹지 않고 사용할 줄 아는 창조적인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습니다. 1869년에 가우디는 건축학교 진학을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주하게 됩니다. 카탈루냐 제일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중세의 흔적이 많은 보수주의적 문화를 간직한 동시에 일찍이 산업혁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위해서는 예비과정을 통과해야 했는데요. 이때 가우디는 비교적 실력 있는 학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익힌 기술과 공간감, 고고학적 관찰을 통해 얻은 예술적 감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874년 10월 24일, 가우디는 건축학교 예비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정식으로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바르셀로나에서 후대까지 이름을 떨친 유명한 건축가들을 배출한 명문 건축학교였는데요.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러하듯 대부분의 교육이 고전주의 건축을 그대로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열정과 창의성이 넘치는 학생 가우디는 여러 교수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는데요. 가우디를 인정하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튀는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형편없는 성적으로 간신히 졸업하고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고, 에우달드 푼 티의 공방에서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스페인의 명품 브랜드 곤잘로 코메야의 장갑 진열대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벨벳 생산을 독점하던 중요한 직물공장의 소유주였던 에우세비 구엘 백작이 새로운 생산기계와 생산품에 대한 관심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장을 찾았는데요. 이곳에서 장갑 진열대를 본 그는 가우디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최대의 후원자가 됩니다.

 

작품활동

구엘 공원, 1900~1914년 / 성가족 성당, 1882~1926년

1883년 구엘 가문의 건축가로 임명된 가우디는 구엘 별장, 구엘공원 등 구엘 가문에 속한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카사 비센스,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등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면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 간이라 말하는 성가족 성당입니다. 가우디는 1918년 이후부터는 실제로 다른 모든 작업을 포기하고 건축현장을 지키면서 오로지 성가족 성당의 건축에만 매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현재 가우디의 건축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카사비센스, 구엘 저택, 구엘 성당의 납골당, 구엘 공원,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성가족 성당 이렇게 7 작품입니다. 이 중, 가우디의 사망으로 미완성으로 남은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작업을 계승하는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도계 속 건축 중에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우디의 7개의 건축 유산을 포함한 다양한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그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건축과 시공기술의 발전에 매우 창조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안토니 가우디만의 독특한 건축양식

카사 비센스, 1883~1888년 / 구엘 별장, 1884~1887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던 가우디는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괴짜로 통했는데요. 건축계의 이단아 혹은 건축의 광인이라는 혹평이 난무하는 한편에선 금세기 최고의 건축가 혹은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천재라는 극찬을 듣기도 한 가우디의 작품세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가우디의 전반기 작품들은 대체로 이슬람풍의 그리스도교 건축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요. 1883년부터 1888년에 지은 카사 비센스와 1884년부터 1887년에 지은 구엘 별장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이들 건축물들은 언뜻 보면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카사 비센스는 순수한 가우디만의 조형적 감각이 드러난 작품입니다. 이 저택의 건축을 의뢰한 마누엘 비센스는 그 당시 타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이 때문에 카사 비센스에는 타일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우디는 초록색과 크림색의 타일과 더불어 짙은 황토색의 돌과 붉은 벽돌을 조화롭게 꾸며 장식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가우디는 건축물이 자연환경과 조화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하였던 건축가였는데요. 실제로 가우디가 카사 비센스의 건축부지를 답사했을 때 그곳에는 노란 아프리카 금잔화가 양탄자처럼 깔려있었고 그 가운데 거대한 야자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우디는 이 모티프를 디자인에 적용하여 야자수 잎 모양의 철책을 만들었습니다. 실내 역시 자연적 모티프가 중심이 되는데요. 여기저기에 꽃과 새들이 넘쳐나고, 벽면 가득 덩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온갖 장식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으며, 특히 돌과 유리 조각으로 되어있는 모자이크 바닥은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기까지 합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장식을 추구하였던 가우디는 조명의 조절을 통해 빛나는 장식의 신비로움을 선보였습니다. 구엘 별장은 1884년 구엘이 가우디에게 확장공사를 부탁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특히 재료의 사용 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운데요. 가우디는 돌, 벽돌과 회반죽을 이용해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카탈루냐어로 '트렌카디스'라고 하는 깨진 타일 조각을 이용한 모자이크 장식을 사용했는데, 이 장식은 이후 가우디의 작품을 대표하는 표현방식이 되었습니다.

 

구엘 별장에는 다양한 색깔의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감 속에서 결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아 신비감마저 들게 합니다. 벽돌에는 노란색이나 빨간색과 같은 강렬한 색을 배합하고 타일을 덧붙이는 경우에는 청색, 녹색과 같은 차가운 색을 배합시킴으로써 통합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구엘 별장은 재료의 질감이나 색상 이외에도 구체적인 장식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데요. 별장의 대문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강철대문을 부수고 나올 것 같이 생생합니다. 뱀 옆에 우뚝 솟은 벽돌기둥에는 황금사과나무가 조각되어 있는데요. 이러한 신비롭고 커다란 장식은 제우스가 헤스페리데스(Hesperides)라는 세 명의 요정들과 뱀 라돈에게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헤라클레스로부터 지키도록 했다는 그리스 신화를 재현한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구엘은 이처럼 신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자신의 별장을 너무나 좋아했고, 이 일을 계기로 구엘은 자신의 성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가우디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게 됩니다. 1900년, 바르셀로나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한 펠라다산을 구입한 구엘은 그곳을 아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르나소스 산처럼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구엘은 아폴로가 사악한 뱀과 용을 죽여 땅에 묻은 자리를 기념하여 그리스인들이 그 위에 도리아식 신전을 세운 것처럼 바르셀로나에 아테네의 델포이와 같은 전원도시를 재현시킬 것을 제안했는데요. 가우디는 구엘의 의견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여 구엘 공원을 만들게 됩니다. 펠라다산은 해발 120~150미터에 달하며 경사가 상당히 진 험악한 지형으로, 공원이 들어서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 곳입니다. 가우디는 부지가 가진 풍부한 자연미를 보존하기 위해 초목을 잘라내지 않은 채 산을 오를 수 있도록 구불거리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공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던 부지가 점차 지상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공원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구엘 공원은 곡선의 아름다운 길과 동화책에서나 나옴직한 형상들이 특이한 껍질로 싸여 있기 때문에 마치 환상적인 동화 속 나라에 온 것과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줍니다. 기본 장식에 덧붙은 카탈루냐 전통의 트렌카디스 장식은 가우디의 건축언어를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카탈루냐의 미장공들이 개발한 물고기 비늘 같은 이 타일장식은 그 기법과 형태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데요.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가우디는 인부들에게 출근하는 길에 깨진 타일 조각이 있으면 주워오라고 지시하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배달된 베네치아 타일을 받자마자 산산조각을 내버려 운송업자들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우디의 노력으로 다양한 색의 깨진 타일들은 온통 구엘 공원을 덮고 있습니다. 구엘 공원의 대 계단은 1984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독특한 것으로, 활기찬 조형감과 함께 타일 조각의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 계단에 있는 분수는 구엘 공원을 더욱더 활기차게 만들고 있는데요. 지상에 떨어진 빗물이 모이면 세라믹 재질로 된 용의 입으로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 역시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해 매장된 용이 땅속에서 물을 지키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용의 형태는 반짝거리는 색색의 타일 조각들로 인해 더욱더 생생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인간의 건축은 직선이지만 신의 건축은 곡선'이라고 주장했던 가우디의 생각은 더욱더 강해져 갔는데요. 모서리 없이 계속되는 연속된 곡선으로 만들어진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보노라면 마치 돌을 깎아 만든 조각과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바르셀로나의 실업가 요셉 바트요는 가우디에게 자신의 저택을 정말 보수하는 것을 의뢰하였습니다. 1870년에 지어진 이 저택은 워낙 구조적으로 낡은 건물이었기에 고민 끝에 가우디는 건물 전체를 확장하고 현대화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개의 층을 증축하고 정면을 새로 단장하며, 집주인이 거처하는 2층 내부를 정비하기로 하였습니다. 단순한 정비만으로 새로운 건축물을 탄생시켰다는 점은 경탄해 마지않을 일입니다. 카사 바트요는 전체가 마치 원시시대에 있었던 거대한 동물의 뼈를 심어놓은 듯이 보입니다. 외관에 있는 동물의 뼈와 같이 생긴 기둥들이 단순히 장식이 아닌 구조적 요소로 구성되었는데요. 그래서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이 집을 '뼈로 된 집'으로 부릅니다. 카사 바트요의 발코니에는 눈 부분이 숭숭 뚫린 괴물의 머리뼈가 돌출되어 있고, 2층에 튀어나온 창가에는 뼈 모양 같은 기둥이 흘러내릴듯한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가우디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옥상에는 짙푸른 빛의 기와가 덮여 있는데, 이것은 용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유약 처리된 세라믹과 수정 같은 유리조각으로 덮인 건물 외벽의 물결은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을 낼뿐만 아니라 그 굴절 효과는 무지개 색으로 반사되어 물결처럼 흔들립니다.

카사 바트요에서 나타나는 상상력의 표현은 민간 건축에서 가우디가 가장 최전성기였음을 가리키며, 그의 환상적인 건축양식에 시적인 감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우디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갔습니다. 평소에도 가우디의 작품을 좋아했던 사업가 페레 밀라는 카사 바트요를 보고 한눈에 매료 당해 가우디에게 공동주택 건설을 의뢰하게 됩니다. 가우디의 마지막 민간 건축물인 카사 밀라는 천 평방미터가 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굉장한 관심을 끌었으며, 가우디가 건설한 민간 건축 중에 가장 중요한 공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건축된 스페인 도시의 주택들은 대칭, 직선, 직각이 특징이었는데, 이와는 달리 카사 밀라의 외관은 '멈추지 않는 선'으로 묘사될 정도로 물결치는 듯한 리듬을 건물 전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크림색 돌로 만들어져 다른 색을 찾아볼 수 없어, 채석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카사 밀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반적인 건축방식에서 벗어나 어떠한 양식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건축을 조각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카사 밀라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아르누보의 원리가 건물의 형태나 볼륨감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성당의 건축은 출판업자인 호세 마리아 보카베리야의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기계화와 근대화로 점차 타락해져 가는 도시생활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집' 뿐이라는 그의 확신에서 출발한 성가족 성당은 그 명칭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가족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의 주제 또한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사람의 성스런 가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당의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한 공식적인 모금이 시작되었고, 1881년 성당 건축을 위한 기금이 모이자 바르셀로나 외곽이었던 산 마르틴 지역에 대지를 구입한 보카베리야는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델 빌라르에게 설계를 의뢰하였습니다. 빌라르는 신고딕 양식의 성당을 설계하여 1882년 성요셉 대축일에 초석을 놓았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지하 예배당을 짓기 위해 땅을 팠습니다. 그러나 빌라르는 기술고문인 마르토렐과 의견 충돌로 성가족 성당의 감독직을 사퇴하고, 자신의 후임자로 제자인 가우디를 추천합니다. 그렇게 가우디가 본격적으로 공사에 참여한 것은 1883년, 지하의 납골당 기둥이 반 정도 건립될 무렵이었습니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으면서 빌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은 폐기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가우디의 머릿속에는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성가족 성당을 통해 카탈루냐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가우디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인해 작업은 결코 대충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공사의 느린 진행은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인 상징을 완벽하게 설계에 반영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경험을 모아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였습니다.

1906년, 건물의 계획이 마무리되면서 가우디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과 영광을 의미하는 세 개의 파사드 중 '탄생 파사드를 작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가족 성당의 정면이 될 '탄생'은 하늘을 찌를 듯 한 4개의 보물 첨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첨탑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는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정교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가족 성당은 돌과 종교와 예술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작품으로, 가우디는 성서에 기록된 장면들과 가르침 등을 상징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883년부터 1926년까지 43년간 가우디의 일생은 성가족 성당 건설 공사에 바쳐졌습니다. 특히 1918년부터는 작업실을 아예 건설 현장으로 옮기며 성당 건축에만 매진하였습니다. 이 당시 가우디는 가족과 구엘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는 극도의 슬픔을 이겨내야 했는데요. 속세에 미련을 버린 듯 성당을 건설하면서 가우디는 종교에 모든 것을 의지하였습니다.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지나가던 제38호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전차 운전수는 허름하게 차려입은 가우디를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가우디를 노숙인으로 생각한 택시기사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4번째 잡은 택시기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에서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을 치료하는 열악한 시설의 무상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하며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하였습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은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라며 그대로 빈민병원에 남았고, 결국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죽게 만든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기사 3명과 그의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평생을 신과 건축을 위해 살았던 '신의 건축가' 가우디의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성가족 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가족 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습니다.

1878년, 건축학교 졸업 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 개인 사무실을 열고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향한 힘찬 날갯짓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사용할 개인 명함과 작업용 책상을 직접 디자인했는데요. 이는 중세시대 장인들이 자신의 연장을 직접 만드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휘갈긴 듯한 표면 장식이 있는 베이지색 개인 명함은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스타일이었고, 작업용 책상은 섬세한 세공을 바탕으로 실용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에우달드 푼 티의 공방에서 제작된 이 작업용 책상은 관처럼 무거운 형태의 판이 뾰족한 네 다리 위에 걸쳐 있어 기능과 형태 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우디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금속을 사용하여 책상을 만들었는데, 뱀, 덫에 걸린 새, 다람쥐, 도마뱀, 나비, 꿀벌, 덩굴손과 월계수 가지 등을 조각하여 동식물의 왕국을 구현하였습니다.

이 작업용 책상은 가우디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78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가우디가 설계한 곤잘로 코메야의 장갑 진열대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에우세비 구엘은 우연히 들른 에우달드 푼 티의 공방에서 가우디의 책상을 본 후 그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확신하게 됩니다. 가우디와 구엘은 곧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의 우정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예술가와 후원자의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이 스페인을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에우달드 푼티의 공방에서 시작된 구엘과 예술가 가우디의 각별한 관계는 1918년 구엘이 사망하기까지 4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구엘과 가우디의 관계는 단순한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 그 이상으로, 어쩌면 예술에 대한 공통된 사명감으로 맺어진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과 같은 재력가 집안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것처럼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겸비한 재력가 구엘은 자신의 열정을 가우디를 통해 불태웠던 것이지요.

구엘은 1910년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가우디 전시회'를 개최할 만큼 그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으며, 가우디의 완벽한 후원자로서 변치 않는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1918년, 구엘은 절친한 친구 가우디와 함께 만든 구엘 공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가우디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 맞는 죽음이었기에 구엘은 결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우디는 구엘을 문예부흥시대의 왕자라고 지칭하며 최대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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