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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로트렉, 포스터,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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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94 ~ 1901) 생애

 

포스터는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아도 벽이나 게시판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미술 장르인데요. 이런 포스터 그림이 19세기의 한 화가로 인해 비로소 그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거리의 작품 포스터의 아버지이자, 몽마르트르의 영혼으로 불리는 화가 툴르즈 로트렉입니다. 로트렉의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아마도 중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몸과 짧은 팔다리 때문일 것입니다. 로트렉은 어렸을 적의 사고로 인해 152cm의 작은 키와 상체에 비해 매우 짧은 다리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어린 로트렉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은 긴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인 알퐁스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태어난 뒤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던 로트렉은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올라와 열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요. 미술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던 어린 로트렉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마는데요. 바로 마차에서 떨어지면서 척추를 다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고로 인해 로르텍의 하반신은 발육이 정지되고 말았는데요. 성인이 된 후에도 키가 152cm밖에 자라지 않았으며, 상체에 비해 다리가 굉장히 짧은 기형적인 외모를 갖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고로 얻게 된 장애는 로트렉에게 큰 절망을 안겼으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열등감과 귀족 신분으로서의 자존심이 뒤섞여 사회에 반항적이고 관습에 따르지 않는 외곬의 성격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로트렉의 신체적 장애는 다른 한편으로 화가가 미술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요. 로트렉은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로트렉은 모네, 고흐, 드가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 시기에 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인상파 화가와 교류를 나누었지만 그의 화풍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애로 인해 집안의 자랑에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로트렉은 자유롭게 카바레, 술집, 빈민가 등을 돌아다니며 사회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내면의 슬픔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세탁부는 로트렉의 재능이 잘 나타나있는 그림으로 화가의 초기 유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세탁부가 느끼는 삶의 고단함을 일하는 순간이 아니라 책상에 기댄 채 쉬고 있는 모습 속에서 드러냈습니다. 세탁부의 얼굴을 볼까요? 꼭 다문 입과 방향 없는 무표정한 시선에서 삶에 대한 절망감과 내면의 슬픔에 녹아 있는 분노까지 보이는 듯합니다. 또한 탁자에 손을 짚은 어깻죽지에 힘이 들어가 있고, 왼쪽 골반도 힘을 주어 다리 한쪽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세탁부가 꽤 오랫동안 서 있었기에 다른 한쪽 발의 힘을 빼고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누구의 시선도 없는 장소에서야 비로소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고단한 세탁부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20대의 로트렉은 작업실을 파리에 위치한 몽마르트로 옮기게 되었는데요. 이곳에서 로트렉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 외곽에 자리한 시골 마을인데요. 집세가 다른 곳보다 저렴하여 반 사회 정치인이나 예술가, 매춘부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몽마르트르는 사람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계층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로트렉에게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로트렉은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몽마르트르의 영혼으로 불 려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로트렉은 동시대의 파리 생활을 화폭에 담는 데 전념하였는데요. 이 시기의 로트렉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예리한 데생과 역동적인 움직임, 강렬한 색채와 대비 효과, 그리고 기묘한 인공조명에서 파생된 푸른색 그림자 등의 특징은 로트렉이 존경했던 화가 드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로트렉은 빈센트 반 고흐와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 동안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는데요. 로트렉의 거침없는 데생 기법이 고흐의 기법과 많은 부분에서 굉장히 유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90년에 로트렉은 보나르를 따라 포스터 작업을 시작 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무용수 라 굴뤼 와 곡예사 발랑탱, 카바레의 가수 아리스티드 브뤼앙을 그린 포스터는 현재까지도 로트렉이 남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로트렉은 반항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생애 동안 주위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와 술에 빠져 지냈습니다. 수많은 포스터를 석판화로 제작하며 파리를 정복해 나갔지만 반대로 로트렉의 신체는 알코올에 점차 정복당하고 있었습니다. 서른이 넘어서는 알코올중독에 의한 정신이상 증세까지 생겼는데요. 이로 인해 요양소에도 들어가게 되었으며 결국 어머니의 지극한 돌봄에도 불구하고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알코올중독으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로트렉의 짧았던 삶은 미술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가는 평생 책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로트렉을 연구하고 묘사한 책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로트렉은 액자 속에 있던 미술을 미디어의 세계로 이끌어 낸 선구자로서, 어쩌면 현대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작품활동

미술 애호가의 수집품이 된 유흥업소 포스터

동시대 다양한 계층의 문화와 예술에 몸을 담고 살아갔던 로트렉의 회화에는 절충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로트렉만의 독창적인 감각이 빛을 발한 분야는 바로 석판화로 제작한 포스터 작업이었는데요. 이전에 포스터의 유행을 이끌던 그림에는 로코코 회화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 등장한 반면, 로트렉은 이러한 18세기적 포스터를 대담하고 직접적인 20세 기적 그래픽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트렉의 포스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여러분이 보고 계신 물랭 루주, 라 굴뤼입니다. 1891년 가을 시즌 개막을 알리는 주문을 받아 제작된 물랭 루주, 라 굴뤼는 로트렉에게는 포스터 분야의 첫 작품이었으며 로트렉을 파리의 유명인사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포스터의 문구를 해석해보면 상단에는 물랭 루주 카바레에서 매일 저녁, 라 굴뤼라는 댄서의 무대가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하단에는 수요일, 토요일마다 가면무도회가 열린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는데요. 글귀의 내용으로 보아 물랭 루주에서 매일 밤 진행했던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스터의 문구에 나타나있던 물랭 루즈는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의 카바레 겸 무도장을 가리키는데요. 물랭 주르란, 프랑스어로 빨간 풍차라는 뜻으로 건물 옥 상에 있는 빨간 풍차 장식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889년 조셉 올 려와 샤를 지 들러라는 인물이 개장한 물랭 루주는 로트렉의 포스터로 인해 곧 밤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무대의 중앙에서 캉캉 춤을 추고 있는 이 여성은 욕심이 많다는 별명을 가진 루이스 웨버라는 댄서인데요. 손님의 술을 자꾸 마셔버리는 버릇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 합니다. 웨버는 나중에 프랑스 캉캉 춤의 전형이 된 샤이 라는 춤을 춰서 유명해집니다. 다음으로 포스터 맨 앞부분에 중절모를 쓴 채 서있는 남성은 뼈가 없다는 별명을 가진 댄서 발랑탱인데요. 코, 턱, 광대뼈가 뾰족한 독특한 외모에 반짝이는 중절모와 양복을 입고 다니며 춤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추었던 댄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트렉은 석판화 속 인물들을 거리 미술인 포스터의 성격에 맞게 먼 거리에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인물의 핵심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크고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작품 속 스타들의 모습을 크고 작게 배치하는 것만으로 공간의 깊이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랭 루주, 라굴뤼는 당시 석판화로 약 3,000장 정도를 제작하여 파리 전역에 붙여졌는데요. 로트렉의 독특한 색채와 예술 감각으로 큰 인기를 일으켰으며 당시의 많은 수집가들이 거리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뜯어가 버리는 일이 빈번하였다고 합니다.

 

로트렉, 선술집의 아리스티드 브뤼앙, 1893년

두 번째 포스터는 선술집의 아리스티드 브뤼앙입니다. 프랑스의 카바레 가수이자 코미디언이며 선술집 주인이기도 했던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미르리통이라 불리는 작은 카바레를 차렸으며 몽마르트르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브뤼앙은 로트렉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이었는데요. 로트렉에 게 자신의 카바레에서 열리는 공연의 광고 포스터를 다량으로 주문하였으며 그 포스터를 카바레의 내부에도 진열해 놓을 정도로 로트렉의 작품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로트렉은 특히 이 공연 포스터에서 재기 넘치고 익살맞은 관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요. 부분별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포스터의 주인공인 브뤼앙은 매우 냉소적이며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지는데요. 날카로운 표정으로 곁눈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브뤼앙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브뤼앙은 항상 헐렁한 검은 모자를 쓴 채 검은 벨벳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스카프 망토를 걸쳤으며, 짧은 장화를 신고 다녔다고 전해지는데요. 로트렉의 포스터에서 브뤼앙의 옷 스타일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브뤼앙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붉은색 스카프가 부각되면서 포스터에 생동감을 주고 있네요. 특히 이 공연 포스터에서는 당시 일본 판화집의 형태와 단색적인 영역이 자아내는 유희에 매료되었던 로트렉의 화풍을 볼 수 있는데요. 배경표현이 생략되었고, 굵고 검은 선으로 인물의 실루엣이 부각된 점 이 일본의 판화에서 볼 수 있는 효과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트렉, 잔 아브 릴, 1893년, 로트렉, 물랭 루즈 를 떠나는 잔 아브 릴, 1893년

왼쪽의 여성은 화려한 옷을 입고 무대에서 캉캉 댄스를 추고 있고, 오른쪽의 여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우울한 표정으로 어두운 밤거리를 걷고 있네요.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여성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 그리고 표정을 보면 두 명의 여성이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데요. 사실 이 두 여인은 놀라운 관계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는 두 여성은 서로 어떤 관계로 느껴지시나요?

두 명의 여성은 놀랍게도 동일 인물이었는데요. 바로 잔 아브릴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방금 감상하셨던 두 작품의 모델인 잔 아브릴은 물랭 루즈의 대단히 인기 있는 캉캉 댄서였다고 하는데요. 로트렉은 앞선 두 개의 작품 외에도 잔을 모델로 여러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잔 아브릴은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흥미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녀의 지적인 면에 반한 로트렉과 이후 연인 사이로 발전합니다. 잔 아브릴처럼 로트렉의 모델이 되었던 인물들은 대부분 화류계 여인들로서 가수, 곡예사, 창녀들이었는데요. 로트렉은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은 채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터 속의 여인의 모습에서는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화려한 밤을 보내는 댄서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면 물랭 루주를 떠나는 잔 아브릴이라는 작품에서는 무대가 끝나고 난 뒤 아무도 주목해 주는 사람 없이 어두워진 밤거리를 걷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쓸쓸하고 고단했던 댄서들의 숨겨진 삶의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잔 아브 릴의 굳어있는 표정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모습은 잔의 모습을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로트렉은 포스터를 통해 미술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로트렉에 의해 일러스트 혹은 포스터라 불리는 장르가 예술로서 대접받게 되었으며, 석판화의 기법적 완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포스터 장르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스터물감 속에 숨겨진 화학

로트렉은 나는 인물에만 관심이 있다. 풍경이란 단지 부가물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요.

이러한 로트렉의 신념은 인물에 집중했던 로트렉의 포스터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로트렉은 석판화 포스터를 만들기 전 그림을 먼저 그렸는데요. 인물의 모습을 역동적이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크레용, 파스텔, 유화, 수채화 등 거의 모든 재료를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스터는 선명한 인쇄 효과를 위해 광택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요. 이러한 이유로 광택이 났던 유화나 수채화 물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디자이너즈 과슈라는 첨단 화구였습니다.

디자이너즈 과슈란 쉽게 말하자면 무광 불투명 수채물감인데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쉬운 용어로 포스터컬러라고 부릅니다. 포스터컬러는 포스터 도안 등의 제작용으로 만들어진 불투명화구로서 안료를 아라비아고무나 아교 등의 수용성 매제로 잘 갠 후 백색안료를 섞어 칠의 얼룩을 억제함으로써 거듭 칠해 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터컬러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요. 바로 물감이 쉽게 굳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포스터컬러는 화이트를 섞은 레이키성 안료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안료를 아라비아고무로 반죽함으로써 지면에 대한 정착성을 높이고 물을 섞어 적당한 농도로 엷게 풀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포스터 칼라 안에 들어있는 증류수가 증발하면서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라비아고무의 수분이 사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물감이 굳게 되는 것입니다.

굳어버린 포스터컬러를 다시 부드럽게 되돌릴 수는 없을까요? 포스터컬러의 성분인 아라비아 고무는 수용성이므로 물에는 잘 녹지만 알코올에서는 녹지 않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요.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굳어있는 포스터물감에 따뜻한 물이나 정제수와 같은 수분을 공급해 주면 이전과 같이 부드러운 물감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메디움이라는 포스터 칼라 용해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메디움이란 예술표현을 위한 모든 재료를 의미하지만 회화에서는 물감을 풀어 개어쓰는 재료를 말하며, 수채화의 글리세린, 아라비아고무, 유화의 린시드, 테레핀, 페트롤 등을 매재로 하는 용액을 말합니다. 메디움은 굳어 있는 아라비아고무를 녹여 물감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물을 넣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물감의 변질을 막아주며 물감이 굳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아라비아고무를 녹이기 때문에 좀 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포스터물감은 비록 물감이 쉽게 굳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유화 및 수채화 그림보다 인물을 감각적이고 대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트렉이 살아있을 당시 포스터물감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포스터물감이 로트렉의 대담하고 직접적인 20세기적 그래픽에서 느껴지는 색채의 감동을 표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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