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 1890) 생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빈 센트 반 고흐 미술관입니다. 삶은 행복만 있는 것도,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그랬는지 화가의 삶을 함께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남부의 준데르트에서 목사 테오도르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전 고흐의 부모는 첫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는 곧 죽게 되었고, 1년 뒤 같은 날 고흐를 낳자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지어 주었습니다. 첫아들의 대리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생 출발이었습니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진지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고흐는 어린아이 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습니다. 고흐의 가족 중에는 미술과 관련한 사람이 많았는데요 외사촌 안톤 모브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였고,. 3명의 삼촌들은 미술품 판매상이었으며, 평생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도 미술품 판매상이었습니다. 이렇듯 고흐의 집안은 목사였던 아버지와 미술업계에서 일하는 삼촌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적인 활동과 미술을 추구하였습니다.
고흐는 준데르크의 마을학교에서 제벤베르크의 기숙사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지만 고흐는 초등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 당시 고흐는 그림을 종종 그렸지만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13살이 되었을 때 틸뷔르흐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한 고흐는 어학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다음 해 알 수 없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두 번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고흐는 삼촌이 있는 구필 화랑에서 수습사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한 고흐는 유능한 직원으로 자리를 잡았고 4년 뒤 헤이그 지점에서 런던 지점으로 옮겼습니다. 런던 지점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고흐는 첫사랑에 실패하였습니다. 상심한 그는 신앙에 빠지게 되었고, 업무를 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런던 지점에서 파리 지점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해고를 당했습니다. 화랑을 나온 고흐는 영국 램스게이트에 있는 남자 기숙학교에서 보조 교사 로도 일을 하였지만, 삶의 뚜렷한 목표도 없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신앙의 길로 들어서고자 결심한 고흐는 187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단기 목사 양성 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이후 벨기엘 남부 탄광지대인 보리나즈에서 부목사로 일하게 된 고흐는 그곳의 광부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가난을 공유하였습니다. 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은 물론, 가진 것을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너무 진보적이고 과격한 선교 태도로 동료 목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중의 이해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소품 스케치와 드로잉을 함께 보냈습니다. 성직자의 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고흐에게 테오는 그림에 집중하라고 조언을 하였고, 마침내 고흐는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고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하였는데요. 가난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삶은 그의 초창기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1882년 초 고흐는 임신 중인 시엔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고흐의 모델이자 연인이 되었습니다.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되었어.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어. 하루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었단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이야.
그러나 고흐는 시엔과의 관계로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이제 막 화가에 입문한 고흐는 동료화가나 후원자가 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지만, 시엔과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그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지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흐는 시엔과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1886년 고흐는 동생 테오가 사는 파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로트렉, 베르나르, 고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색채가 밝아졌습니다. 이전까지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인 렘브란트와 밀레의 영향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네덜란드 화풍의 어두운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러나 색을 섞지 않고 병치하여 밝은 색채를 구현하던 인상파를 만나 깊이 감명받고,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고흐가 파리에 온 1886년을 끝으로 인상파 회원전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고흐의 영원한 후원자인 동생 테오도 더 이상 고흐의 무절제하고 과격한 태도를 참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는데요. 아무도 고흐의 집을 찾아오지 않게 되자 그는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지방의 아를로 떠났습니다. 아를은 파리와 달리 강렬한 태양이 노랗게 이글거리는 곳으로, 여기에서 고흐의 이글거리는 독특한 화풍이 완성되었습니다. 고흐는 오래전부터 남쪽 지방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했었는데, 그의 친구인 호리스 리벤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봄이 되면 프랑스 남부로, 푸른빛과 눈부신 색채의 땅으로 갈 생각이네.
이 무렵 고흐는 밀레를 의식한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노란색과 보라색의 보색 대비를 극명하게 사용하여 더욱 강렬한 인 상을 주고 있는데요. 이 노란색은 해바라기 시리즈와 함께 고흐의 트레이 드 마크가 되었습니다.고흐는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들과 함께 자기 자신의 밝은 색채와 눈부신 햇살이 어울리는 곳에서 사는 것을 꿈꿔 왔는데요. 그래서 자신과 마음이 맞는 화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경제적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화실을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1888년 5월 라마르틴 광장에 집을 빌렸는데, 외벽의 색채를 따서 노란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노란 집은 고흐의 희망이자 동시에 비극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고흐는 고갱과 함께 생활하였는데요. 어느 날 고흐는 고갱과의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흐는 정신병원에 들락거렸으며, 결국 아를을 떠나야 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지러운 하늘 아래 펼쳐진 밀밭을 그리고 있으며, 지독한 슬픔과 고독을 그리고 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들판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쏜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통과 외로움이 담긴 예술
일생 동안 고흐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어린 시절은 넉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자 성직자의 길을 택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몇 몇의 여자들과 사랑을 했지만 모두 비극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고흐의 삶은 대부분의 고통과 외로 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작품활동
빈센트 반 고흐.감자 먹는 사람들,1885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시면, 색채를 강렬하게 쓰지 않고 오히려 어두운 색채로 농민의 마음을 표현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농부와 농가의 모습을 일관되게 그리면서 현실의 밀착하여 가난한 삶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나는 불빛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어. 고흐는 밀레처럼 농촌의 애환을 그리는 농민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진실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고흐는 파리 생활 당시, 유행하던 압생트를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부작용으로 황시증이 생겼다고 합니다. 황시증으로 병원에 가게 된 고흐에게 의사는 지나친 음주에 대해 나무랐지만 오히려 고흐는 작품 때문이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노란 높은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라오. 올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황시증은 사물이 노란색으로 퍼져 보이는 시작장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고흐의 작품에서 노란색이 많이 보이는 게 아닐까요? 고흐는 해바라기의 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해바라기 연작을 그렸습니다. 고흐가 해바 라기를 그리게 된 것은 고갱의 방을 치장해 주기 위해서였는데요. 고갱 역시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했 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다른 성격이었던 그들의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계속되는 다툼 끝에 고갱은 고흐를 떠나갔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은 고갱이 떠나간 뒤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던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특유의 뱀처럼 꾸불거리는 스펙트럼 색띠를 병치하여 이글거리는 독특한 필치가 보이는 이 그림은, 화면의 모든 색이 꿈틀거리며
분노로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광기가 느껴집니다. 이제 참을 수 없는 환각은 사라졌고, 악몽을 꾸는 일 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나를 바로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던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 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 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보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아니면 내 영혼을 주겠다.
귀를 자른 고흐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이 경찰에 고발하여, 결국 고흐는 아를의 요양병원에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이 시기에도 끊임없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를에 있던 2년의 기간 동안 간질 발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무려 200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이프러스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징이었습니다.
나는 해바라기 연작을 그린 것처럼 사이프러스를 주제로 연작을 그리려 한다. 왜냐하면 아직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사이프러스를 그린 화가가 없기 때문이야.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구나.
위대한 예술과 고통의 함수 관계
예술에서 고통은 병과 잃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에게는 칭송받는 덕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울과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있던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오늘날 천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매독, 포피린증, 귓병, 정신착란 등 고흐에게는 수많은 질병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고흐의 정신질환은 고흐의 대표색이라 불리는 노란색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고흐는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주로 연백이나 크롬 황색처럼 납 성분이 높은 페인트를 섞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런 색소들은 독성이 강해 납중독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납중독은 노출된 기관과 몸속의 납 농도에 따라 증상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납중독은 신경계에 상을 일으키며, 정신이상, 신체마비, 빈혈, 구토와 같은 증상들을 보인다고 합니다. 신경계 증상이 나타나면 회복이 힘들고 심한 흥분과 정신착란, 경련, 발달 등을 동반한다고 하는데, 이는 고흐가 겪었던 증상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흐의 다른 그림을 보면 당시의 심적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오베르 교회를 보면 직선을 그리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선, 채도 높은 노란색을 많이 사용했으며, 보색 효과를 극대화하는 보라색이나 진한 코발트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등의 비극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보면 이글거리는 밀밭 위를 검푸른 하늘이 짓누르고 음침한 한 무리의 검은 새떼가 낮게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랑과 파랑, 녹색의 강렬한 보색 대비에서 고흐의 슬픔과 고독, 분노가 느껴집니다. 고흐처럼 자신의 고통을 작품에 표현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알브레히트 뒤러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 증세와 악몽에 시달리기 전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우울증이 위대한 천재성을 빛낼 수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판화 작품인 멜랑콜리아 Ⅰ에서는 과학적 예술적 소품에 둘러싸인 한 사람이 고독과 고통에 차서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우울을 의미하는 멜랑콜리아이며, 작품 속에서도 멜랑콜리아란 팻말이 찬란한 태양과 아름다운 무지개에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7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었고, 18살 때는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작품의 주제로 하여 예술로 승화하였습니다. 작품 부러진 척추를 보면 황홀한 색채와 초현실적인 오브제, 슬픔과 고통, 사랑이 모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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