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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쇠라, 신인상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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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 1859~1891) 생애

 

우리나라 속담 중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죠? 작은 모래알이 쌓여 큰 모래성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이면 나중에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 속담은, 오늘 만나볼 화가의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화가는 바로 여러 가지 색깔의 작은 점을 무수히 찍어 한 폭의 멋진 그림을 그려낸 점묘법을 탄생시켰던 화가 쇠라입니다. 쇠라는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을 했던 화가답게 코시모나 고흐와 같이 기행을 일삼던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침착하고 과학자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항상 규칙적인 생활과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던 바른생활사나이 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주인공 쇠라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화가의 생애에 대해 알아볼까요?

 

쇠라는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가정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다른 동료 화가들과는 달리 넉넉한 집안환경 덕분에 재정적인 어려움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쇠라는 주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요. 관리였던 아버지가 퇴직한 후 시골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즐기며 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1875년 쇠라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파리 시립 미술학교에 들어가 3년 정도 공부하였으며,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는 앵그르의 고전주의 회화 기법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미술학교였는데요.

1879년 처음으로 인상파 전시회를 방문했던 쇠라는 에콜 데 보자르의 고전주의 회화 기법과 다른 인상주의의 화풍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 나머지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 브레스트에서 군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미술 이론과 색채 이론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때부터 2년간 흑백화를 그리는 데에 노력을 쏟았습니다. 쇠라의 흑백화는 검은색만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요. 특히 화가의 어머니는 쇠라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1881년경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는데요. 이러한 이론을 작품창작에 적용하여 1883년 점묘화법에 의한 최초의 작품인 아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발표하였습니다. 쇠라는 이 그림을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아쉽게도 낙선하고 말았는데요. 이후 앙데팡당 전시회에 다시 출품하여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쇠라는 이후 주류파에서 벗어나 파리의 독립적인 예술가에 가담하게 되었고, 이때 만났던 예술가들과 1884년에 독립 예술가 협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쇠라는 이곳에서 동료 예술가인 폴 시냐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요. 서로 점묘주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공유하였다고 합니다. 1884년 여름 쇠라는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습작을 그렸으며, 작업 기간만 꼬박 2년이 걸렸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쇠라는 클리쉬 거리에서 가까이에 있는 작업실로 옮겨 젊은 모델 마들렌 크노블로흐와 비밀리에 함께 살다가 1890년 2월에 아들을 갖게 되는데요.

마들렌을 모델로 한 화장하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통통하게 그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아들을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쇠라는 1891년 작품 제작과 전시 작업으로 인한 과로에 감기가 겹치는 병에 걸렸는데요. 이것이 후두염 등 합병증으로 발전하여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 탓에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서커스는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쇠라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기에도 부족한 짧은 일생 동안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는데요. 그래서 쇠라의 인생과 예술은 더욱 위대하며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쇠라가 탄생시킨 점묘법은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데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오랜 기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는데요. 1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쇠라의 활동 기간을 생각해 보면 화가가 남긴 업적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점을 통한 색의 분할

쇠라는 점묘법을 탄생시킨 화가였으나 동시에 신인상주의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는 빛을 그리는 미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요.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고 그 물체의 표면이 반사한 빛이 만드는 순간적 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빛을 그려야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도구는 물감이었는데요. 자연에서 보는 빛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밝았고 물감으로는 그 빛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미묘하고 다양한 색이 필요하였는데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물감을 섞을수록 색이 어두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19세기의 슈브뢸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색과 광학 효과, 지각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이 논문에 는 프리즘에 의한 스펙트럼 분광에 관한 연구결과가 적혀있었는데요. 그 중 색을 섞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분광분석법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분광분석법이란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되어 있는 빛을 분광기를 이용하여 단색의 빛으로 분할하는 방법으로 분광분석법에 의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각각의 원색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화면에 병치하면 물감을 서로 섞지 않고도 우리 눈의 망막에서 혼합된 중간색이 나타나게 되는 혁신적인 방법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슈브뢸은 어떻게 이러한 원리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슈브뢸이 오래된 태피스트리를 복원하는 일을 했던 화학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태피스트리란 여러 색깔의 위사를 사용하여 손으로 짠 회화적인 무늬를 나타낸 미술적 가치가 높은 직물을 말하는데요.

태피스트리들을 복원하면서 슈브뢸은 올바르게 어떤 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없어진울 주위의 색상들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색의 실이 살짝 포개지거나 매우 가깝게 병치된 경우 그것을 멀리서 보면 다른 색깔로 보이는 병치혼합 효과를 낸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현상의 발견은 쇠라를 비롯한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점묘화 테크닉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슈브뢸은 또한 관찰자가 한 색을 본 뒤에 정확히 반대되는 보색의 잔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는 데요. 예를 들어 지금 보고 계시는 색 대조표에서와 같이 붉은색의 사물을 본 뒤에는 원래 사물에서 녹색 잔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색들의 상호작용에 흥미를 가진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보색을 강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물리, 광학, 화학 같은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쇠라는 어떻게 하면 이 학문들의 학술적 내용을 바탕으로 그림을 재해석하여 색채 사용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였는데요. 특히 슈브뢸의 이론에 심취하였습니다. 쇠라는 회화의 과학적 접근에 대한 색채 이론가들의 개념을 명심하였습니다. 음악가가 음악의 화성을 위해 소리와 템포에서 변주를 하듯이 화가도 미술에서 조화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 고유의 발견적 방법들을 기초로 지각 대상에 대한 인식과 광학 법칙으로 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요. 선과 색채의 강도, 색채 도식을 사용하여 이 언어를 실제로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슈브뢸의 연구결과가 담긴 논문의 영향으로 모네는 짧게 끊어지는 터치를 병치하였고, 르누아르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터치의 삭면을 병치하였으며, 고흐는 곡선의 긴 선을 병치하였는데요. 이러한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쇠라나 시냐크 같은 신인상주의자들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색점들을 과학적인 비율로 병치하여 혼합의 효과를 극대화하였습니다. 즉, 색을 분할하는 모네의 기법을 분광법이라고 한다면, 쇠라의 점묘주의는 고성능 분광분석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90년 쇠라가 모리스 보부르에게 보낸 서한에서 쇠라가 감성과 조화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어떻게 느끼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미술은 조화이다. 조화는 톤이 비슷하거나 요소들에서, 그리고 색채와 선에서 유추한다. 명랑함과 고요함, 슬픔의 혼합에서 이러한 것들이 빛의 영향과 지배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

 

 

과학자들의 실험 정신으로 행한 습작 활동

쇠라는 스스로 자기 고유의 방법을 찾은 뒤, 이를 작품에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쇠라의 연구결과가 집약된 놀라운 작품들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음악에서는 음의 조화를 이론화한 화성학을 배우듯이 미술에서도 색의 조화를 이론화하여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슈브뢸과 블랑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미 팔레트에 단색을 늘어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모 네와 르누아르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있었지만 이 화가들보다 더욱 밝고 더욱 깊은 색을 내고 싶어 했던 쇠라에게는 슈브뢸이나 블랑의 연구가 특히 유용했습니다. 물감이 감상자의 눈에서 혼합되도록 하면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슈브뢸과 블랑은 이를 시각적 혼합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슈브뢸은 빨간색과 녹색, 주황색과 파란색 등 소위 보색 동시대비를 적용하면 색의 심도는 더욱 높아진다고 말하였는데요. 이 기법들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쇠라처럼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화가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연구를 하고자 하는 쇠라에게 큰 동기가 되었으며, 쇠라가 애착을 가지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쇠라는 더 밝게 만들고 싶은 색이 있을 경우 그 색깔에 하얀색 점을 찍어 감상자의 눈에서 혼합되도록 만들었는데요 이처럼 색을 점으로 나누는 기법을 점묘법, 즉 분할주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쇠라의 연구결과가 담긴 작품들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작품활동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년,캔버스에 유채, 207.5X30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어느 맑은 일요일 오후 그랑드자트 섬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나들이 옷을 입은 파리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실제로 많은 파리 시민들이 일광욕이나 뱃놀이를 즐기던 그랑드자트섬입니다. 그랑드자트는 커다란 그릇이라는 뜻인데요. 섬의 지형이 커다란 그릇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작품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면, 측면, 뒷모습까지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은 산책하거나 잔디밭에 앉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림 중앙에서 붉은 윗옷과 치마를 입고 한 손에는 붉은 양산과 쇠라, 다른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요. 이로 인해 마치 이집트의 고대 벽화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한 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보았을 때 자연의 빛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보다 마치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그림자를 그려 넣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이는데요. 이러한 구성은 사람들의 포즈와 그림자, 배경에서 보이는 모든 수평수직선들을 수학공식처럼 정확하고 이상적인 구도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각 부분을 위한 습작까지 합하면 준비 습작품이 30점 이상이나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쇠라는 좋은 구도를 찾기 위해 그랑드자트섬을 여러 장소와 각도에서 바라본 지형도 습작을 그렸는데요. 마침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배경이 결정되자 쇠라는 인물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마치 빈 무대 같은 풍경화를 하나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풍경만을, 그것도 스케치가 아니라 완성된 그림 형태로 그린 것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순간적인 인상을 현장에서 빠른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밀한 계산에 의하여 연출된 화면을 완성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쇠라의 모습은 마치 연구실과 현장을 뛰어다니며 물질을 채취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순간의 인상에 집중했던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쇠라는 수많은 인상을 합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그려냈던 것입니다.

쇠라, 아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 1883~1884년, 캔버스에 유채, 200X30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아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 오후의 무료한 시간을 표현한 작품으로서 쇠라가 최초로 점묘법을 사용하여 완성시킨 작품입니다. 붉은 모자를 쓴 채 강 속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는 소년과 물에 다리를 반쯤 담근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 그리고 모자를 쓰고 잔디 위에 앉거나 누운 채로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권태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쇠라는 이 그림을 통해 한여름 오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완벽하게 재현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풍경을 볼까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림 속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멀리 보이는 공장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오른쪽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때 약한 바람이 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림 속에 불고 있는 바람은 그림의 전반에 가득 차있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이네요. 소년의 얼굴은 뜨거운 햇빛에 익어 완전히 붉게 변해 버렸고, 짙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는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밝게 내리쬐는 태양으로 인해 군데군데 그림자를 드리운 풀마저 빛이 바랜 것 같아 보입니다. 강물 또한 밝은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는데요. 소년 뒤에 있는 흰 옷과 더불어 햇빛을 반사시켜 마치 작품을 보는 사람도 태양에 눈이 부신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쇠라는 풀밭을 묘사한 부분에서 굵은 붓을 사용하여 사선 형태로 음영을 넣는 등 다양한 미술기법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색채의 배합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쇠라는 점묘법을 사용하여 세부 묘사를 더하였는데요. 두 손을 입에 대고 나팔을 부는 소년이 쓰고 있는 모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렌지와 옅은 주황색, 그리고 강물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짙푸른 색의 작은 점들이 촘촘히 찍혀 각각의 색들이 서로 다르면서도 한데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네나 시슬레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장에 이젤을 세워두고 이곳에서 그림을 완성하였는데요. 이에 비하여 쇠라는 매일 야외에 나가 스케치를 했지만 채색은 꼭 아틀리에에 돌아와서 재료와 구도를 정밀하게 조합하며 연구하면서 꼼꼼하게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구도를 완성하기 위해 아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유화 습작이 14점이나 남아있다고 하니, 완벽을 위한 화가의 집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쇠라, 서커스, 1891년, 캔버스에 유채, 185.5X152.5cm, 오르세미술관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작으로 남은 서커스는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페르낭도 서커스를 양식화하여 묘사한 작품입니다. 쇠라는 비록 미완성의 상태였지만 이 작품이 1891년에 열렸던 앙데팡당전에 충분히 출품될 만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전시회가 끝난 후에 다시 완성시키려는 계획으로 전시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이

그림이 전시 중이었을 때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정적이었던 쇠라의 초기작에 비해 이 작품은 모든 것이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실제로 서커스의 묘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함과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붉은색과 노란색의 점이 점차 강하게 그려지면서 차차 화폭 아래로 내려오는 특이한 공간감각을 연출하였는데요. 안정감이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원형 곡마장과 전경의 광대가 들고 있는 색 테이프의 곡선이 빙빙 도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러한 움직임은 안장 없는 말에 올라탄 곡예사와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에 의해 계속됩니다. 쇠라는 포스터 예술에 영향을 받아 인물들을 점점 더 캐리커처처럼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러한 모습은 특히 관중석 맨 앞 줄의 값비싼 의자에 뻣뻣하게 앉아 있는 여자들부터 맨 뒤에 축 늘어져서 서 있는 노동자들까지, 계급에 의해 좌석이 갈려진 관중들에게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쇠라에게 있어 상승하는 선 V자는 기쁨을, 수평선은 고요함을, 거꾸로 된 V자 모양인 산 모양은 슬픔을 나타내었는데요. 여성의 네크라인, 남성의 콧수염과 머리모양, 팔의 자세 등을 보았을 때 이 작품이 서커스의 기쁨을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쾌활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음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곡마사들의 강요된 유쾌함과 관중들의 활기 없는 무관심이 교차하고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쇠라가 화가로서의 자신을 속물적이고 따분해하는 대중의 기분전환을 위해 놀라운 기교와 재능을 펼쳐놓는 곡마사들과 동일시하여 작품 속에 숨겨놓은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쇠라는 고전적인 전통과 당시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던 인상주의에 의존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반 고흐와 고갱, 로트렉 등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러한 이유로 미술사학자 펠릭스 페네옹은 쇠라가 남긴 분할주의 및 점묘주의를 새로운 인상주의라는 뜻의 신인상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록 쇠라가 색채에 큰 관심을 갖기는 하였지만, 색채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림의 구조와 형식에 대해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요. 이는 후일 큐비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화가가 시도했던 과학적인 접근 방식은 이후 등장할 현대미술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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