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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클림트, 분리파,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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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1-1918) 생애

 

구스타프 클림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에 신중한 기질을 가졌으나, 관능적인 격렬함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논쟁을 일으킨 도발적인 화가였으며, 국제적으로 전개되던 상징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클림트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클림트는 예술가로서의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클림트의 작품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에서 일곱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고 어머니는 젊은 시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클림트는 부모님의 재능을 물려받아 일찍부터 예술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두 살 아래의 남동생 에른스트와 막내 남동생 게오르크도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요. 28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에른스트는 클림트와 첫 회화적 시도들을 함께 했고, 조각가이자 세공사인 게오르크는 그림을 위한 아름다운 액자들을 제작하였습니다. 드로잉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클림트는 1876년에 오스트리아 왕립 산업미술박물관 부속 공예미술학교에 뛰어난 성적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공예미술학교는 예술 아카데미와는 성격이 다른 응용미술학교였는데요. 이곳은 수공예 및 산업문화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된 실용적인 미술을 교육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건축과 예술을 장려하여 귀족들과 경쟁하려 한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의 증가와도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클림트는 학교에서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클림트가 학교의 창립자이가 교장인 루돌프 아이 텔베르거에게 미술교사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아이텔베르거는 자네는 미술교사가 아니라 화가가 되어야 하네라고 하였으며, 클림트가 계속해서 회화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작품활동

구스타프 클림트, 우화, 1884년, 캔버스에 유채, 84.5X117cm, 빈 역사박물관

구스타프 클림트, 목가, 1884년, 캔버스에 유채, 49.5X73.5cm, 빈 역사박물관

예술적 재능 이외에도 진취적인 마인드와 자기확신을 가진 클림트는 1879년에 동생 에른스트와 공예미술학교 동급생 프란츠 마치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설립하여 링슈트라세에 위치한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클림트의 독창적인 회화 특징은 1881년에 편집자 마르틴 게를라흐에게 주문받은 『우의와 상징』의 드로잉 삽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중에서 자연주의에 입각한 인물의 신체가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상징주의의 분위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화〉나 〈목가〉는 클림트가 아카데미의 예술기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화〉에서는 여인이 오른손에 든 깃털로 뒤편 바위에 놓인 양피지에 뭔가 적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그녀는 마치 이솝우화나 라퐁텐 우화집 속에 나올 법한 야생동물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신체의 굴곡은 여인의 모습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식물 그림자 사이로 금빛 살색으로 표현된 환영과 같은 인물이 출현하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양식에 대한 참조가 나타납니다.

반면, 〈목가〉에서는 중앙의 원을 감싸고 있는 측면의 두 누드 인물상은 미켈란젤로의 신체 묘사를 연상시키고, 목가의 장면이 그려진 중앙의 원형 그림에서는 라파엘로의 신고전주의적 부드러움이 느껴집니다. 1886년, 예술가 컴퍼니의 세 화가는 빈에 새로 들어선 부르크극장의 장식을 맡게 되었는데요. 클림트 고대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는 연극의 전통을 묘사한 장면으로 계단실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리며 처음으로 예술가 컴퍼니의 화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예술가 컴퍼니는 1891년에 맡은 주문 한 건으로 성공의 길로 확실하게 들어서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황제의 방대한 수집품들이 들어가게 될 새로운 전시공간인 미술사 박물관의 내부장식을 마무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술가 컴퍼니의 세 화가들은 고대부터 바로크까지 예술사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각 시대의 풍속과 박물관 안에 소장된 작품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시대에 맞게 주제를 나누어 작업했고, 그중 클림트는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인 그리스와 이집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다루었습니다. 이 중요한 작업을 통해 클림트는 비로소 자연주의적으로 재현한 현실의 정확함, 장식적 요소의 우위, 여성 인물에의 유별난 관심이라는 독창적 성격들을 처음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892년은 클림트의 생애에서 확실한 침체기였습니다. 많은 예술사업을 함께 해왔던 동생 에른스트와 아버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삶에 대한 의욕과 창조적 열정이 고갈된 클림트는 결국 예술가 컴퍼니를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낙담의 시기에 들어선 클림트의 창작의 위기는 이후 3년간 지속되었는데요. 이러한 위기는 클림트에게 자기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자신의 예술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기 시작한 그는 스승들의 아카데미적인 역사주의 기법에서 멀어져 국제적인 모더니즘의 시기에 독자적인 미학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는 1895년부터 시작한 『우의와 상징』 두 번째 작업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작업들은 이전 『우의와 상징』 작업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데요. 이전의 작업에서는 누드에 대한 그의 관심이 확실히 고전주의와 매너리즘의 표현으로 억제되고 굳어있었다면, 『우의와 상징』 새 시리즈 작업은 가볍고 섬세한 표현을 바탕으로보다 효과적으로 공간을 구성하면서 당시의 새로운 형태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니우스의 우의화, 1896년,종이에 초크와 연필, 41.5X31cm, 빈 역사박물관

구스타프 클림트, 조각의 우의화, 1896년,종이에 초크와 연필, 41.8X31.3cm, 빈 역사박물관

구스타프 클림트, 사랑, 1895년, 캔버스에 유채, 60X44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 중 가장 유명한 작업으로 꼽을 수 있는 〈유니우스의 우의화〉와 〈조각의 우의화〉, 〈비극의 우의화〉에 서는 거대한 덩어리에 두드러진 검은색을 사용하여 강조된 중앙의 이미지가 세밀하게 양식화된 공간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클림트 양식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클림트의 최초의 걸작 〈사랑〉과 〈카를로스 의상을 입은 배우 요제프 레빈스키의 초상〉이 탄생하였는데, 이 그림들은 클림트가 화가로서 성숙기에 들어선 시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면 양쪽의 여백 틀로 인해 마치 오페라 극장의 무대와 같아 보이는 이 작품들은 이차원적이며 전형적인 장식배경과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요. 구성면에서 아카데미 전통의 고전적 대칭이 아닌, 채움과 비움 사이의 비례적 균형으로 리듬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장식적이고 표현적 역할을 하는 금색이 분명하게 나타나는데요. 클림트는 이후 작품들에서 자신의 상징처럼 광범위하게 이를 사용하게 됩니다.

특히 사랑은 클림트에게는 매우 소중한 주제인데요. 그림의 중앙에 있는 연인들 위로 떠도는 무서운 얼굴들은 질병이나 죽음과 같이 끊임없이 행복을 짓누르는 위협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금빛의 빈 공간에서 구성상 위쪽 가장자리에 있는 장미는 사랑의 정열이 꽃의 일생처럼 얼마나 깨지기 쉽고 미묘하며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팜므파탈의 전형

1897년 4월 3일, 오스트리아의 근대적이고 대담한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은 관학적인 관습과 스승들의 역사주의에 반기를 들고 구상예술에까지 확장되는 근대화에 대한 결연한 요구를 표명하였는데요. 오스트리아 구상예술가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뜻을 모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알프레트 롤러, 카를 몰, 콜로만 모저와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오토 바그너, 요제프 호프만은 공식협회들과 거리를 두고 분리파를 창설하였습니다.

분리파라는 명칭은 분리된 서민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는데요. 고대 로마에서 서민계급이 특권 귀족계급의 지배에 저항하여 도시 외곽에 자치정부를 세운 분리 운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892년에 뮌헨 분리파가 대두한 이래 이 용어는 예술의 개혁을 목적으로 뜻을 함께 한 일군의 예술가들이 보수적인 기존의 공식적인 조직과 단절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분리파의 강령은 일상의 모든 면에 새로운 예술적 감성을 확산하고 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새로운 문물에 문을 연다는 두 가지 중요한 목적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빈의 대표적인 보수적 예술가 집단은 쿤스틀러 하우스에 보낸 편지에서 클림트는 분리파의 목적을 해외 예술 발전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빈의 예술계를 이끌고 시장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예술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경향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문화적 문제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접근에 관한 것이자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환경에 지나치게 구속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보다 자유로운 발표의 장을 활짝 열어주는 것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팔라스 아테나, 1898년,캔버스에 유채, 75X75cm, 빈 역사박물관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901년,캔버스에 유채, 84X42cm, 벨벳 데레 궁전

클림트는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분리파의 상징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제2회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했던 〈팔라스 아테나〉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분리파 화가들이 아테나처럼 등장하여 미술가연맹이 판을 치고 있던 빈의 미술계를 구하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표출하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아테나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손에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은 조각상을 들고 있는데요. 이 모티프는 사실상 아테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인 승리의 여신 니케를 표현한 것이지만, 클림트는 니케를 전통적인 조각상의 모습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인간의 형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클림트는 전형적인 요소를 사용하면서도 세세한 부분에서는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했습니다.

이 작품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작품이 담고 있는 상징적 메시지와 더불어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클림트만의 회화적 특성 때문입니다. 얼굴이나 팔과 같은 인체 표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상당히 장식적인데, 대표적인 예로 금색의 갑옷에서 보이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패턴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의 배경에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양식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면적 이미지를 그려 넣음으로써 공간감을 배제하였습니다 아테나를 팜므파탈로 표현했다는 점도 클림트만의 독창적 특성입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관람객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은 창을 들고 있는 당당한 자세와 함께 아테나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성을 능히 지배할 것 같은 이러한 강한 여성의 이미지는 〈유디트〉와 같은 클림트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자주 다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바빌로니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목을 베어버린 구약성서 속 인물 유디트는 역사상 많은 예술가들이 선택한 작품 주제입니다. 클림트 이전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데 비해 클림트의 작품은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언급도 담고 있지 않아 오히려 유디트의 초상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클림트는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유디트의 혐오감이나 살해 행위에 대한 고통보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그녀를 표현하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화려한 금빛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근대 빈의 여성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슴과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인 힘을 과시하며,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유디트 얼굴의 부드러운 표현과 바빌로니아 장군의 참수를 떠올리게 하는 목걸이가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에, 관람자들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작품의 오른쪽 아래에서 유디트가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건은 약간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발견할 즈음 관람객들은 더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클림트는 8년 후 동일한 주제를 보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모습으로 다시 한번 표현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디트에서는 무지갯빛의 화려한 장식이 수 놓인 2차원적인 배경 속에 유디트의 모습이 꿈틀대는 듯한 곡선으로 그려져 있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다 분명하고 드러내고 있는데요. 굳게 다문 입술과 가차 없이 드러낸 가슴, 예민하고 긴장된 유디트의 손은 여인의 잔혹함과 복수심을 보여줍니다.

 

 

예술의 완숙기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 1899~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 의학, 1900~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 법학, 1899~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년, 캔버스에 유채, 180X180cm, 벨베데레 궁전

1900년에서 1904년 사이에 클림트는 대담한 작품 세 점으로 인해 전례 없는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떤 무슨 일이었을까요? 사건은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클림트에게 빈 국립대학 대강당의 천장화 장식을 의뢰하였습니다. 철학, 의학, 법학 학부에 대한 알레고리가 그림의 주제였으며, 이성에 의한 학문의 효용을 강조하는 내용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클림트는 모든 전통적인 규범을 배제하고 주제에 대한 실증적인 해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혼돈스러운 자연의 힘이 지배하는 장엄한 우주의 모습을 창조하였습니다.

클림트는 1900년에 미완성의 작품 〈철학〉을 공개하였습니다. 작품을 살펴보면, 고통받는 인간이 벌거벗은 신체의 긴 행렬을 이루며 텅 빈우주적 공간에 떠 있으며, 거대한 스핑크스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희미한 윤곽선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향한 무관심한 침묵은 물체에 대한 모든 인식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품 아래쪽에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여인이 영감을 받은 듯 꿰뚫어보는 자의 시선과 합리적 이성으로 가득한 시선을 관람객에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였을 때 아카데미와 언론의 반응은 그야말로 극단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대학 교수들이 원했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철학〉이라는 이름의 작품은 당연히 웅장한 사회적 프레스코이며, 차분하게 과거의 철학자들을 그려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적 개념에 반기를 든 클림트는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클림트의 작품이 포르노그래피와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화가의 예술적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대학 관계자 11명이 이 작품을 대학 대강당에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며 첨예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논쟁에 기죽지 않고 클림트는 1901년 제10회 분리파 전시회에 두 번째 작품인 〈의학〉을 출품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젊은이와 노인, 아이와 여자, 벌거벗은 남성들의 장엄한 인류가 신비한 유체의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죽음을 암시하는 어두운 인물은 검은 휘장을 감싼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전경에는 금으로 장식한 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가 그림과 관람객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파충류로 태어났기에 특히 모호한 창조물인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 가 얼마나 미묘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뱀이라는 무시무시한 상징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의학의 치료능력을 찬양하는 대신 영원의 장면 속에 분명히 감지할 수 없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여정을 담았습니다. 이 작품 역시 논쟁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언론에서는 클림트가 의학의 두 가지 주요 활동인 예방과 치유를 무시하였으며, 오른쪽 상단의 임신한 여인을 포함한 거리낌 없는 인물들의 누드로 인해 도덕성에 모욕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큰 구설수에 오른 작품은 세 번째 작품인 〈법학〉이었습니다. 클림 트는 이 작품에서 사회제도의 영광의 승리를 찬양하지 않고 무표정한 재판관들 앞에서 비정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맹목적이고 잔인한 힘을 화폭에 직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화면 아래에는 헐벗고 메마른 노인이 악의 상징인 문어에게 포획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데요. 이 노인은 위험한 범죄자이기보다는 불쌍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재판관들은 거만한 태도로 노인이 겪는 괴로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여론의 반응은 매우 거셌습니다. 결국 1904년 오스트리아 당국은 세 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법학〉의 전시를 만류하기에 이르렀고, 이번만큼은 클림트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클림트는 나는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를 괴롭히고 작업을 방해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는 뜻을 밝히며 국가로부터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구매하였습니다. 현재 이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는데요. 이 화재는 오스트리아 예술 문화재의 가장 심각한 손실 중 하나였습니다. 1905년, 분리파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분리파 내부의 분열이었는데요 사실, 분리파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양식주의자은 예술을 기하학적으로 양식화하는 성향을 점차 뚜렷이 해나갔고, 요제프 엥겔하르트를 중심으로 한 전통에 가까운 자연주의자들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개념을 충실히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1904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클림트의 대학 회화 연작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전시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 두 그룹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리파는 만국박람회에 대학 회화 연작을 대신해서 어떤 작품을 전시할 것인지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했고, 결국 클림트는 전시를 취소할 것 을 주장하였습니다. 분리파가 클림트와 그 주변인물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반발이 점점 커지자, 결국 1905년에 클림트를 지지하는 양식주의자들은 분리파를 떠나 훗날 클림트 그룹이라고 불리게 되는 오스트리아 예술가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예술가연맹은 1909년 상징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유럽예술의 경향을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쿤스트샤우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폴 고갱, 앙리 마티스, 에드바르트 뭉크, 빈 센트 반 고흐와 같은 유럽의 대가들과 함께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빈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한편, 1901년에서 1909년 사이에 클림트의 예술은 완숙기를 맞았습니다. 이른바 황금 시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 에서 금색이 화려하게 얽힌 패턴, 만화경을 들여다보듯이 다양한 색채, 역동성, 에로틱한 요소,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황금 시기의 정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는 〈키스〉를 들 수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우의화인 이 작품은 두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연인의 얼굴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여 그녀의 볼에 입 맞추고 있는 남성의 남성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종 모양을 연상케 하는 후광의 형태 역시 남성의 등 윤곽을 따라 결정되고 있어, 모든 움직임과 힘이 마치 남성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에 비해 여성의 태도가 수동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연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남성과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 사이의 신장 차이를 만족스럽게 해결하기 위해 남성의 몸 아래쪽을 모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클림트는 입맞춤하고 있는 남녀의 얼굴은 전통적인 사실주의로 처리하였지만, 그들의 의상에는 네모, 원형, 곡선과 소용돌이 문양과 다양한 색채를 마치 모자이크처럼 배치하여 장식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장식성을 통해 클림트는 남성과 여성 세계의 완전한 융화를 표현하였습니다 남성이 입고 있는 외투의 어두운 색으로 표현된 울퉁불퉁하고 네모난 무늬와 여성이 입고 있는 외투의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된 유연한 곡선과 원형 무늬들이 서로 병치되어 뚜렷한 대립을 이루고 있으나, 두 연인 간에 만들어진 조화는 두 사람의 몸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종 모양 안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달도 지나지 않은 2월 6일에 56세의 클림트는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클림트의 제자이자 긴밀하게 결속했던 친구인 에곤 쉴레가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는데, 쉴레는 병원 영안실에서 클림트의 시신 드로잉 3점을 완성하였습니다

평생토록 찬반논의가 무성했던 클림트는 대중과 주류 미술계, 평론가들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예술가입니다. 그는 종종 신랄한 비평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지나친 성도착이라는 죄명으로 외설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클림트는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화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있는 것인데요.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당 대 사교계의 인기 화가였던 클림트는 많은 귀부인과 모델들과 스캔들을 일으켰으나, 평생 동안 특정 여성에게 휘둘리거나 몰입하며 연애를 추문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클림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미스테리로 남는 여인은 바로 에밀리 플뢰게입니다. 클림트가 1918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발작을 일으켰을 때 마지막으로 애타게 찾은 여인이 바로 플뢰게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890년에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플뢰게의 언니 헬레네와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빈에서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던 플뢰게는 그녀의 진취적인 성격으로 분리파에 완전히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에른스트가 세상을 떠난 후 플뢰게와 클림트의 관계는 보다 가까워졌고, 플뢰게는 대부분의 사교모임이나 여행뿐만 아니라 클림트의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의 관계를 의심했으나, 편지든 사진이든 목격자든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플뢰게에게 쓴 편지에서 항상 근황과 건강상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냉정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았는데요. 플뢰게 역시 평생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그를 따르며 영원한 클림트의 여인으로 남았습니다. 이렇듯 클림트와 플뢰게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던 기묘한 동반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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