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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뭉크, 표현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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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99-1900) 생애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유년시절 경험한 질병과 광기, 죽음의 형상들을 왜곡된 형태와 격렬한 색채에 담아 표현하면서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 인물입니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이 마치 일기장처럼 꼭 들어맞는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하였는데요. 그의 모든 작품은 엄청난 고백의 편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뭉크는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존재자로서의 고독과 불안, 공포 감정에 깊게 파고들었으며, 인생 가운데 영원한 진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헤드마르크 뢰텐에서 군의관이었던 크리스티안 뭉크와 선원의 딸이었던 라우라 카트리 네 비욜스타드 사이에서 2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뭉크가 다섯 살이 되던 1868년에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망하자 뭉크의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분열로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하면서 종교적으로 집착하는 증상을 보였는데요. 이런 영향으로 뭉크는 악몽을 꾸거나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1877년에는 뭉크의 두 살 위 누이 소피에 역시 어머니와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유년기 시절에 두 번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뭉크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죽음의 공포와 불안은 평생 동안 뭉크를 사로잡았으며, 그가 제작한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가 되어 작품 속 곳곳에서 표출되었습니다 허약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레가 잦았던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류머티즘에 의한 고열과 만성 기관지천식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주로 집에 머무르며 학업을 병행하였습니다 일찍이 여읜 어머니 대신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간 이모인 카렌 비욜스타드가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어 어린 시절부터 뭉크는 집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요 이때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의 소재는 주로 집안의 내부와 주변풍경이었습니다 유난히 죽음이 자주 찾아온 뭉크의 집안에서 막내 여동생 잉에르는 뭉크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한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뭉크는 여동생 잉에르를 모델로 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습니다 뭉크는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1879년에 크리스티아니아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중퇴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뭉크는 1881년에 오슬로 미술공예학교에서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인 크리스티안 크로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크로그를 통해 프랑스 인상주의를 접 하게 되었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여름밤, 해변의 잉에르, 1889년,캔버스에 유채, 126.5X162cm, 베르겐 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아침, 1884 년,캔버스에 유채, 96.5X103.5cm, 베르겐 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화가 젠센 히옐의 초상,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90X100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년,캔버스에 유채, 190X100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3년,캔버스에 유채, 134.5X160cm, 뭉크 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 1892년,캔버스에 유채, 84.5X121cm, 베르겐 미술관

 

뭉크는 1884년 가을에 열린 크리스티아니아의 살롱전에 〈아침〉을 출품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에 한 소녀가 침대 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빛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뭉크가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 왼쪽에서부터 빛이 떨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창가 의자 위에 높인 포도주가 담긴 유리병과 잔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방에서 피어나는 빛은 그 밖의 다른 일상적인 모티프들을 거의 관속에 있는 물건들처럼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한편,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 오던 화가 프리츠 탈로는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하게 되었는데, 탈로의 도움으로 뭉크는 1885년에 3주 동안 파리로 가서 그림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머문 3주간의 경험은 뭉크로 하여금 그의 모든 감각을 기민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뭉크가 유럽의 새로운 미술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파리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 예술가들의 메카로, 모든 새로운 예술사조가 만들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뭉크는 아르누보 디자인을 비롯한 프랑스의 새로운 예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등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그동안 해 왔던 작품과는 달리 자연주의적 요소와 인상주의 표현기법을 하나의 방식 안에서 서로 녹아들게 하는 시도를 하였 는데요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화가 젠센 히옐의 초상〉에서 모델이 착용하고 있는 안경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보이지 않게 표현한 점에서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통합하고자 하는 뭉크의 시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빛의 효과에 주목하며 사진처럼 정교하게 표현했던 벨라스케스 이후 내려오는 초상화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배경이 없이 인물만 등장하는 구성을 보이는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화 작품을 뭉크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 초상화는 예술을 파괴하는 그림들, 즉 인상주의의 일례가 되는 그림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뭉크는 사실의 자연주의적인 재현을 넘어서려는 의지로 개인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의 가장 극명한 예가 되는 작품이 바로 〈병든 아이〉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체념하듯이 창밖을 바라보는 병든 소녀의 모습과 그 소녀의 손을 부여잡은 채 흐느끼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은 뭉크가 어린 시절 겪었던 누이의 죽음에 대한 경험과 이로 인해 자신을 에워싸게 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뭉크만의 강렬한 표현기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뭉크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존재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죽음을 겪으며 번뇌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통해 삶의 쓸쓸한 단면을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마치 연극무대를 연상케 하는 〈병실에서의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정적 속에 담아냈다면, 〈임종의 자리에서〉는 환자가 아닌 주변인물에 구도적인 초점을 두어 어두운 죽음의 기운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 두 작품을 살펴보면 뭉크는 직접적으로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 이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고, 죽음을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비통해 하는 모습을 연극적인 구성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고통보다는 주변인물을 통하여 자연의 섭리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여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뭉크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순간의 일상을 직접 재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요구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뭉크는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본 것을 그린다.라고 하면서 점차적으로 감정을 다루는 주제들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카를 요한 거리를 배경으로 한 뭉크의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당시 프랑스에서 접하게 된 유럽의 새로운 예술이 향후 그의 표현기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카를 요한 거리의 봄날〉에서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처럼 빛을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색채로 표현된 봄의 거리가 연상됩니다 반면,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에서는 불안해하는 작품 속 군중의 심리를 대변하는 공간으로써 냉랭하고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로 표현되었습니다. 확연하게 다른 두 작품을 비교해 봄으로써 뭉크가 점차 주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경과 인물의 심리가 일치하도록 표현한 〈카를 요한 거리의 저녁〉은 보는 이를 향해 다가오는 등장인물들의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경직된 자세에서 인간 내면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뭉크는 그들과 동떨어져 있는 곳에 자신을 그려 넣었는데요. 그것은 무표정의 군중을 등지고 홀로 대방향으로 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으로 대변되어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화가의 고독함을 느끼게 합니다. 1892년에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협회의 초청으로 〈키스〉와 〈그다음 날〉포함하여 총 55점의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독일에서 강렬한 정서와 자유분방한 회화적 형상을 펼친 뭉크의 작품은 미완성된 작품으로 보여져 예술가협회 회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급기야는 투표로 전시회를 중단시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는데요. 이 뭉크 스캔들로 인해 뭉크는 조롱의 대상의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지도가 상승하여 표현주의 화가로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작품활동

삶과 죽음과 사랑의 시

에드바르트 뭉크, 키스, 1897년, 캔버스에 유채, 99X81cm, 뭉크 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년,판지에 파스텔과 템페라와 유채, 91X73.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1886년에 열린 화가들의 축제에서 허무주의자인 노르웨이 작가 한스 예거를 만나게 된 뭉크는 그가 이끄는 급진적인 문학그룹인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들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갈구하는 사상가들로 구성된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들은 상징주의, 니체의 철학, 죽음의 환상 등에 몰두하였는데요. 이 모임의 참여는 곧 뭉크 자신의 심리에 강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뭉크는 자신의 영혼의 일기에 생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성장기의 기억, 사랑, 죽음 등에 관한 기록들은 훗날 그의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생의 프리즈〉 연작의 아이디어가 뭉크의 내면에서 자라나기 시작하였는데요. 뭉크가 삶과 죽음과 사랑의 시라고 표현한 〈생의 프리즈〉는 사랑, 불안, 죽음, 고독 등 인간이 지닌 여러 단면과 감정을 다룬 장식용 그림 연작으로, 고독한 생을 살았던 뭉크가 바라본 인간 본연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도 현대인의 어둡고 쓸쓸한 영혼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진실성이 깃든 작품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키스〉를 보면 뜨겁게 입맞춤을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갈망하는 감정이 느껴집니다. 뭉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서로 엉킨 하나의 형태로 시각화되어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순간에서 오직 두 사람의 모습만 존재하는 듯 그들은 사랑을 나누는 것에 깊이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원으로 기억될 현재의 순간은 창밖의 밝은 바깥세상과 격리된 실내의 어두운 색채와 적막한 분위기를 통해 나타나며,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남녀의 현실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생의 프리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모든 표현주의적 요소가 응집된 작품으로, 소리 지르면서 절규하는 뭉크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그린 것입니다. 해골에 가까운 형상을 한 인간이 양귀를 틀어막은 채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토하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까지 불안과 공포의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짙푸른 해안선,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이 병치된 배경은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여 주인공을 공포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화면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절규하는 남자와 이와 대조적으로 고통스러운 절규를 듣지 못하고 저 멀리 앞서 가고 있는 두 친구의 모습의 극적인 구성도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의 불안감을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인물은 뭉크 자신이자 불안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도 겹쳐 보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절규〉속 인물의 부르짖음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는 시대의 대표작이 되어 잦은 스트레스와 각종 정신질환으로 인한 불안정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에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생명의 춤, 1899~1900년,캔버스에 유채, 126X190.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다리 위의 소녀들, 1900년,캔버스에 유채, 100X102cm, 개인소장

에드바르트 뭉크, 다니엘 야콥슨의 초상, 1909년,캔버스에 유채, 204X111.5cm, 뭉크 미술관

〈생명의 춤〉은 〈생의 프리즈〉 연작에서 중심이 되는 작품입니다. 뭉크는 1899년에서 1900년 사이에 이 작품을 제작한 후 1925년에 새로운 버전을 제작하였습니다. 1899년 당시 상징주의에 매료되어 있는 뭉크는 〈생명의 춤〉에서 사랑과 열정을 뜻하는 붉은색, 젊음과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고독과 죽음을 나타내는 검은색 등 인간이 지닌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상징성을 띤 색채를 사용하였습니다.

화면의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녀는 과목하고 웃음기가 없는 채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커플들과는 달리 여성의 붉은 드레스에 휘감겨 헤어 나올 수 없는 이남성과 신비로운 달과 바다에 비추어진 달빛, 그리고 춤을 추고 싶어 하지만 축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양쪽 가장자리의 암울해 보이는 두 여성은 작품의 분위기를 외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으로 옮긴 프랑스 화풍과는 달리 뭉크는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감상과 경외의 대상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본 주관적인 자연을 작품 안에 녹여내었습니다 특히 뭉크의 인물이 있는 풍경화 속에서 자연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비교적 비관적인 시각으로 삶을 대했던 뭉크였지만 소담한 풍경과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인물들이 어우러지는 〈다리 위의 소녀들〉은 밝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화사한 소녀들의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에 비친 어두운 그림자와 집을 삼키고도 남을 크기의 나무에서 역시나 뭉크가 자연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리기를 좋아했던 뭉크에게 〈다리 위의 소녀들〉은 애착을 지녔던 주제로, 그는 비슷한 테마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1902년, 뭉크는 〈생의 프리즈〉 연작을 전시할 수 있는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북유럽의 새로운 미술에서 뭉크가 차지하는 의미를 확고하게 하였으며, 독일에서의 화려한 성공의 시작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뭉크는 베를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지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후원자가 된 막스 린데와 알 베르트 콜만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과의사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린데는 훗날 『에드바르트 뭉크와 미래의 미술』이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신비주의자이자 예술애호가인 콜만은 독일 사람들에게 뭉크 를 소개하면서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뭉크가 독일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뭉크의 예술에서 중요한 일역을 담당한 또 한 사람으로, 구스타프 쉬플러를 꼽을 수 있습니다. 린데 박사의 소개로 뭉크와 친분을 맺게 된 쉬플러는 평생 동안 뭉크에게 온정과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뭉크의 변론자이자 조언자로서 뭉크의 복잡한 계약관계를 해결해 주었으며, 불안정했던 뭉크가 겪은 수많은 난관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쉬플러는 뭉크의 수많은 판화작품을 목록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뭉크는 굉장히 신경질적이었고 어떤 해동을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물을 이루어내기까지 쉬플러의 대범한 인간적 관대함과 포용력이 요구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경쇠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1908년 가을, 뭉크에게 정신분열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8개월동안 코펜하겐에 있는 다네일 야콥슨 박사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심리재활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뭉크는 자발적으로 마음의 병을 그림으로 치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뭉크의 담당 의사였던 야콥슨의 초상화에서는 야콥슨의 오만하고 자존감 강한 성격을 불같이 이글거리는 색채에 담아 주관적인 감정을 투영시켜 표현하였습니다.

 

 

삶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

에드바르트 뭉크, 태양, 1911~1916년,캔버스에 유채, 455X780cm, 오슬로대학

에드바르트 뭉크, 별이 빛나는 밤, 1922~1924년,캔버스에 유채, 140X119cm, 뭉크 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캔버스에 유채, 110.5X120.5cm, 뭉크 미술관

뭉크는 1909년에 고국 노르웨이로 돌아와 크라게뢰에 정착하여 심리적 육체적으로 회복을 하면서 다소 밝은 분위기의 작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 뭉크가 노르웨이에서 보고 그린 밝은 주제들은 공포와 불안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노동의 즐거움 등을 다루며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뭉크는 1911년에 오슬로대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강당 신축벽화의 공모전에 초안을 가지고 참가하였는데요. 뭉크의 초안은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모에 당선되었고, 1916년에 마침내 벽화가 완성되었습니다 노르웨이 회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벽화는 〈태양〉, 〈역사〉, 〈모교〉의 3부로 구성된 11면 연작 벽화입니다. 이 작품들은 뭉크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의 자연과 뭉크의 새로운 만남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1912년에 뭉크는 현대 서구미술의 발전단계를 포괄적으로 개관할 수 있는 최초의 전시회인 쾰른 분리파 전시회에 초대되어 단독 전시실을 할당받았습니다. 이는 곧 그가 현대미술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당대의 화가로서 소개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920년대와 1930년대의 뭉크는 오슬로 근교의 에켈리에 넓은 저택과 정원, 농사지을 공간까지 구비된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뭉크는 에켈 리에 머물면서 소수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회적인 접촉을 피 하고 완전히 작업에 심취하여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에 뭉크는 그동안 그려왔던 상징성을 띠는 풍경화가 아닌 전형적인 풍경화를 제작하였는데요

특히 에켈리의 정원을 그린 그림에서는 폭발적이고 다채로운 생명력이 느껴집니다.사회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말년의 뭉크는 노르웨이 피요르드의 해안을 담은 아름다운 바다와 겨울의 밤을 작품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도시와 바다를 비추는 하늘의 별, 눈 속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베란다의 계단, 그리고 그 난간 위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것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년의 화가가 느끼는 고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시 너머 보이는 푸른 하늘과 노란빛의 바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보랏빛 선으로 밤풍경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으며. 푸른색이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감성 위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더해 드러내었습니다 뭉크는 해마다 변화하는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자화상은 자아에 대한 탐구의 표출로써 마치 일기를 써 내려가듯이 순간의 감정과 내면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입니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은 아주 어두운 배경 속에서 소묘로 표현된 수도승 분위기의 창백한 얼굴만이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 자화상은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해 온 그의 내면을 팔뼈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신경쇠약으로 한창 힘든 시기에 제작한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에서 뭉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을 체념하는 듯 주변상황과 어울리 지 못하고 홀로 고독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원근법이 적용된 테이블의 선을 따라가 보면 관람자의 시선이 뭉크의 찌푸린 미간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를 통해 신경이 날카로운 뭉크 자신이 극도의 고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병원에서의 자화상, 1909년,캔버스에 유채, 100X110cm, 베르겐 미술관

〈병원에서의 자화상〉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서서히 자신의 심신을 회복하고 있는 뭉크의 모습이 보입니다. 보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이 있는 눈빛에서 회복기에 접어든 뭉크가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뭉크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여러 번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화가로서 최고의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여러 미술관과 미술수집가들로부터 수차례 작품의뢰를 받아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던 무렵이었습니다 자신감을 회복해 가고 있는 뭉크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뭉크는 시간이 흐르고 점점 젊음과 멀어지는 순간에도 그림으로 자신을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년기에 들어서는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복잡한 심정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에켈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당시에 제작한 작품들은 대부분 세상과 동떨어져 고독하고 불안해하는 본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 창가의 자화상, 1940년경,캔버스에 유채, 84X108cm, 뭉크 미술관

〈창가의 자화상〉에서 보여지는 머리숱이 많이 빠져버린 뭉크의 모습에 서는 세월의 흐름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뭉크는 화면의 왼쪽과 오른쪽의 색채 대조를 통한 화면분할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임박하자 뭉크는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를 제작하며 곱게 차려입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침대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공간으로,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나타내 는 모티프로 사용되어 현세와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그가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죽음에 대한 공포로 늘 불안에 떨었던 뭉크가 시기별로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기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명철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았던 그는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습니다. 본인의 자아를 잃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뭉크의 모습에서 늙고 힘없는 노인의 모습보다는 삶을 쟁취한 진정성 있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뭉크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1월 23일에 에켈리의 집에서 홀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작품들은 오슬로 시에 기증되었으며, 1963년 뭉크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가 낳은 최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진품 작품을 공항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있는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과 뭉크 미술관은 2017년 12월부터 향후 10년간 뭉크의 작품을 공항에 전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 측은 발표문을 통해 노르웨이 최고 작가의 작품을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 전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밝혔으며, 뭉크 미술관 측에서도 아주 새로운 관람객들에게 뭉크를 소개하는 독특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며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공항에 전시되는 뭉크의 작품은 매년 교체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2017년 12월에 제일 먼저 전시될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일까요?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과 뭉크 미술관의 이러한 시도가 세계적 거장의 작품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들이 계속해서 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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