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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장승업, 조선말기,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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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1843-1897) 생애

여러분 혹시 취화선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 영화는 바로 오늘의 화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배우 최민식이 배역을 맡아 열연한 작품입니다. 취화선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이라는 뜻인데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한평생을 자유롭게 떠돌며 신선처럼 살다 간 오늘의 주인공에게 걸 맞는 제목으로 느껴집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영혼을 가진 천재화가 장승업입니다. 
장승업은 1843년 헌종 9년에 태어났습니다. 출생지라든가 부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대원 장씨의 무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승업이라는 이름은 가업을 잇는다는 뜻인데요, 장승업의 집안이 무반이었음을 고려할 때 부친은 자신의 아들이 무인으로서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장승업의 부모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장승업이 무인의 길에 들어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이리저리 떠돌며 자란 장승업은 출생에 관해서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장지연의 『일사유사』에 장승업의 생애와 사람됨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어 이 구절을 통해 장승업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일사유사』에 의하면 장승업의 본관은 대원이며 선조는 무반이었고 자신의 호를 지을 때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의 오원으로 스스로를 칭할 만큼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장승업은 처음에는 일가들을 찾아 다니며 얹혀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동안 친척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다가 차츰 나이가 들자 친척들의 눈치가 보이고, 워낙 한 군데 붙어 있기를 싫어하는 성미였던지라 장승업은 홀연히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20대 무렵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는 역관 이응헌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에서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자를 못 배운 장승업은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이응헌은 중국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을 지닌 문인이었는데요,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 있던 원나라, 명나라 이래의 명인들의 서화를 접하고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림에 나타난 천재성을 확인한 이응헌은 비록 천한 신분의 하인이지만 장승업의 숨어 있는 재능을 아끼며 지속적으로 후원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장승업은 신들린 듯 걸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하였으며 단숨에 조선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글을 쓰지 못해 장승업의 그림에 쓰여 있는 글은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지만, 타고난 천재적 감각과 기량으로 산수화, 동물화, 인물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에서 주옥같은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오원 장승업의 호 가운데 취명거사가 있는데요, 이는 술에 매우 취하여 살아가는 선비라는 뜻입니다. 술을 매우 좋아했던 화가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데요. 어찌나 술과 여자를 좋아했는지 장승업은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장승업은 아무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는 장승업의 작품 속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장승업이 얼마나 관습에서 이탈한 기인이었는지는 고종황제와의 일화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함께 이 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작품활동

장승업의 명성이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궁에서는 고종의 명령으로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준 후 장승업에게 궁궐에서 병풍 그림을 그리게 하였습니다. 혹시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고종은 장승업에게 산해진미와 술을 조금씩 주면서 감시하였는데요. 궁궐 생활이 답답했던 장승업은 그림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궁 안의 사람들을 속이고 궁궐에서 도망치고 말았는데요, 이후 장승업을 다시 잡아와 더욱 엄한 감시 하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지만 어디에 매이는 것을 극히 꺼려했던 장승업은 엄한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궁을 빠져나와 고종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장승업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는데요, 조선 말기의 문신이었던 민영환이 왕 에게 간곡히 청하여 자신의 집에서 책임을 지고 그림을 완성시키겠다고 빌어 가까스로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민영환은 약속한 대로 장승업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요, 장승업은 결국그림을 끝내지 못한 채 민영환의 집에서마저 도망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장승업은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마흔 살을 전후하여 한 번 결혼한 적이 있으나 구속을 싫어하여 첫날밤을 치른 뒤 도망갔는데요, 그 후 아내와 다시 만나지 않았는지 남겨진 자손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직과 명성도 구속으로 여길 만큼 세속적 권위와 명성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뜬 구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장승업은, 1897년 55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죽 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장승업은 그림의 스타일이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여운이 감돌아 조선 후기 말엽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집니다. 조선 초기 세종 때 솟아오르던 국운과 찬란했던 문화시대의 회화 예술을 이끈 사람이 안견이라면,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인 영 정조 시 절 회화 예술을 대표했던 사람은 단원 김홍도인데요, 장승업은 김홍도보다 더 후대인 고종 재위 당시인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화가입니다. 장승업은 과학기술을 앞세운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청나라의 틈에 끼어 서서히 멸망해 가던 조선의 끝자락에서 불꽃같은 예술혼을 태우고 간 화인이었으며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을 섭렵한 천재화가였습니다.
장승업은 과학기술을 앞세운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청나라의 틈에 끼어 서서히 멸망해 가던 조선의 끝자락에서 불꽃같은 예술혼을 태우고 간 화인이었으며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등 모든 장르의 그림을 섭렵한 천재화가였습니다. 장승업은 패기에 찬 의욕적인 화가였는데요, 그림에서 대상을 표현할 때에도 아름다움보다 힘의 상태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호취도는 장승 업의 천재적 감각이 100% 나타난 걸작으로서 나뭇가지가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으로 흘러내리고 그 대각선상에서 두 마리의 새가 대칭으로 표현되어 친근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선을 끄는 기술도 굉장히 탁월한데요, 땅의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시선이 나무 기둥을 따라 올라가서 나무 위 공중에서 끝나도록 하였고 사용한 색채도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세련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힘은 두 마리 매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두 마리 매는 암수 부부관계가 아니라 서로 패권을 다투는 수컷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의 하단부에 위치한 매가 여유가 있고 위엄 있어 보이는 것이 기득권을 가진 대장인 것으로 보이고, 상단부에 위치한 매는 온몸에 힘을 주고 있으며 발톱 매무새와 눈빛이 잔뜩 긴장된 것으로 보아 대장 자리를 노리는 젊은 수컷으로 보입니다.
장승업은 이 둘의 관계를 그들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의 굵기에서부터 암시하고 있는데요, 대장 매가 앉은 나뭇가지는 굵고 안정돼 보이며, 도전자 매가 앉은 가지는 가늘며 불안해 보입니다.방금 감상하신 호취도와 같은 종류의 그림을 영모화라고 하는데요, 영 모화란 꽃이나 풀, 나무를 배경으로 동물이나 새, 벌레 등을 함께 그리는 그림을 뜻합니다. 여기서 영은 새의 날개 털을 의미하며 모는 짐승의 털을 의미하는데요, 장승업은 특히 이런 영모화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인 화가였습니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볼까요? 장승업은 옛 성현의 재미있는 일화나 책에 담긴 이야기, 명시 등을 그림으로 현하였는데요. 19세기에 유행했던 문인문화의 고전적 경향을 알려 주는 증거입니다. 고사세동도는 중국의 원 말기에 활 동했던 네 명의 문인화가 중 한 명이었던 예찬의 일화를 그린 것인데요.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는 모습의 예찬과 수건을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가고 있는 어린 하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도대체 저 아이는 어떤 이유로 나무를 닦으려고 하는 걸까요? 지금부터 그림 속 예천의 일화 속으로 들어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찬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흰옷을 입었고, 청비각을 드나들 때 마다 버선을 갈아 신었는데요, 예찬의 시동은 늘 집 안팎을 청소했으며 심지어 뜰에 있는 오동나무까지 매일 깨끗하게 닦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예찬은 시동에게 오동나무를 다시 씻도록 명하였는데요. 이미 아침에 오동나무를 씻었던 시동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자 예찬은 방금 자신의 친구가 나가면서 오동나무 앞에서 재채기를 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조금의 더러움도 용납하지 못했던 예찬의 성격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화입니다. 일화를 알고 나니 그림이 색다르게 보이시지 않으신가요? 그림 속의 풍경은 바로 하인 에게 오동나무를 다시 닦을 것을 말한 직후 석상에 기대어 앉아 흐뭇하게 웃고 있는 예찬과 지시를 받은 시동이 다시 나무를 닦기 위해 수건을 들고 오동나무를 오르고 있는 순간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장승업은 고사세동도에서 예찬의 일화를 담채와 담묵으로 은은하게 재현하였는데요. 꼼꼼하게 붓으로 묘사된 인물의 모습과 오동나무에 사용한 군청, 녹청의 빛깔은 예찬의 깔끔한 성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장승업은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요. 그 명성은 한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황후의 친정인여흥 민 씨 집안까지 알려졌습니다. 특히 민영환은 장승업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장승업을 고종에게 소개하여 궁중회사에 참여시키는 계기까지 마련하였는데요. 이에 천한 신분이었던 장승업은 왕실 직계 미술조직인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이 되어 왕실용 세화를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장르의 그림에 능숙했던 천재 화가 장승업에 대해 후대의 미술가들은 모든 장르에 있어서 조선 후기의 화단에 수묵담채화의 전형을 마련한 화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승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당한 제자들을 키워냈으며, 장승업의 작품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화가들이 조선 말기의 문예부흥을 이뤄냈다고 합니다.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예술만을 추구해 온 장승업의 기이한 인생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술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먹의 퇴색을 오랜 세월 억제하는 한지의 고유성

서양화가들의 그림을 빛나게 해준 대표적인 종이가 캔버스라면, 우리나라에도 이에 못지않게 뛰어난 종이가 있습니다. 이 종이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한지입니다.
한지는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내는 매우 아름다운 종이인데요. 오늘 보았던 장승업의 다양한 작품들 또한 한지에서 매력을 더욱 발산할 수 있었습니다. 한지는 특히 수묵화에서 그 진가가 나타나는데요, 단순히 먹물의 색을 잘 드러내도록 한 것뿐만이 아니라 먹의 퇴색을 억제하여 그림의 색이 변하지 않아도 록 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나라의 자랑 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한지의 기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우선 한지에 사용되는 먹에 대해서 알아야겠죠? 먹은 문방사우 중 하나인데요, 문방사우란 글과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네 가지 물건으로 붓, 먹, 벼루, 종이를 뜻합니다. 그중 먹을 한자어로 묵이라고 하는데요, 벼루에 물을 부은 뒤 갈아서 사용하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종의 검은 물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태웠을 때 나온 검댕을 모아 아교로 개어 건조한 뒤 굳혀서 만드는데요, 오래될수록 품질이 좋다고 합니다. 무엇을 태웠느냐에 따라 먹의 종류가 달라지고 그 성질과 색감도 달라지는데요. 송연묵은 소나무를 태워 만들고, 유연묵은 기름을 태워 만듭니다. 그 외에도 오동나무 기름인 동유를 태워 만든 동화묵 또는 동매가 있으며, 석유 또는 칠 등을 써서 만든 것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동양의 묵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아이보리 블랙이라 하면 코끼리 상아를 태워 만든 흑색 인데, 상아가 비싸므로 소뿔이나 다른 짐승의 뼈를 태워 만들면 본 블랙이라고 부릅니다. 피치 블랙은 복숭아나무를 태워 만들고, 바인 블랙은 포도나무를 태워 만든 것입니다. 램프 블랙은 기름을 태워서 만든 검댕으로, 동양의 유연묵과 같습니다.
 
먹도 다른 물감과 같이 시간이 오래 지나면 빛깔이 퇴색되는데 여기서 우리나라 한지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동양권의 나라에서도 한지를 사용해 왔는데요. 그중 우리나라 한지의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한지의 원료부터 알아볼까요? 한지의 원료는 닥나무인데요, 한반도의 닥나무는 중국이나 일본의 닥나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섬유가 가늘고 길다는 것인데요, 우리나라의 한지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먹물이 거칠게 스며들지 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스며드는 이유가 바로 이 섬유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섬유가 한 방향의 구조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한지는 90도로 서로 엇갈린 구조를 하고 있으며 종이가 더 얇으면서도 질기고, 물감의 번짐도 사방으로 일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는 대개 산성을 띄고 있는데요, 물감에 산화를 일으켜 문서의 보존에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는 반면, 한지는 중성을 띄고 있어 산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지 제조에 사용되는 각종 잿물의 pH를 측정한 결과 전통 식물성 잿물은 메밀대, 볏짚, 목화대 순으로 알칼리 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잿물 을 사용해 한지의 원료인 닦을 삶게 되면 점차적으로 한지의 pH가 떨어지게 되는데요, 최종적으로 완성한 한지는 pH 7.89의 중성을 띈다고 합니다. 즉, 중 성을 띈 한지가 먹의 산화를 막아주었고 그로 인해 고서화들이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승업을 비롯한 우리 옛 화인들의 작품 속에는 그 예술성 못지않게 먹과 한지에서 비롯한 정밀한 과학까지 담겨 있습니다.옛 화인들의 작품이야말로 예술과 과학이 한데 빚어내는 최고의 품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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