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ART-마네, 인상주의, 생애와 작품

반응형

 

 

에두아르 마네(douard Manet, 1832 ~ 1883) 생애

 

미술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모더니즘이란 기존의 도덕과 전통, 교회의 권위를 초월하여 근대 이성에서 자유로움으로 탈피하자는 운동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운동이었는데요. 여러분이 흔히 알고 계시는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가 이러한 모더니즘의 화가였습니다. 기독교 미술이 대부분이던 당시에는 모더니즘이 굉장히 혁신적인 생각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이처럼 기존의 기독교 미술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미술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모더니즘의 창시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특히 마네는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 유례없는 화가였으며,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인의 역할을 수행한 점에서 큰 공적을 보인 화가였다고 합니다. 비록 수많은 비평가들의 비난에 시달렸지만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마네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의 화목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네의 아버지는 법조관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외교관이었으며 대부는 무려 스웨덴의 왕태자였던 샤를 베르나도트였다고 합니다. 마네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는데요. 이 때문에 집안의 바람대로 법대에 진학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1848년에 아버지의 권유로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였고, 그 이후로도 화가의 꿈을 반대했던 아버지로 인해 남아메리카 항로의 선원견습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네가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1850년도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쿠튀르의 아틀리에로 들어가 미술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마네는 이 곳에서 6년간 머물렀는데요. 아카데미 파로서 커다란 역사화를 여럿 그린 화가였던 쿠튀르와는 달리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이거나 또는 역사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 미술관에서 고전회화를 모사하였습니다.

 

작품활동

마네는 아틀리에에 있는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기도 하였는데요. 이때 네덜란드 화가인 프란스 할스와 스페인의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등 네덜란드나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마네는 1856년 2월에 쿠튀르의 아뜰리에에서 독립하여 전속 화랑을 열었으며 1895년에 지금 보고 계신 작품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의 술과 대마초 예찬을 떠 올 리게 하는데요. 또한 첨단의 패션을 보여주는 화려한 사람들과 함께 파리 풍경 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부랑자, 고아 등의 무리를 대표한 그림이자 당시 프랑스의 스페인 풍 유행을 반영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는 마네의 데뷔작이자 첫 번째 살롱 출품작이었으며, 동시에 첫 번째 낙선작이 되었습니다. 거리의 술꾼이라는 점잖지 못한 주제, 물감 덩어리와 붓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꼼꼼하지 않은 마무리, 정확하지 않은 공간 표현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마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1858년~1859년까지 당시 주류 스타일이었던 사실주의를 받아들여 동시대의 현실적인 주제들, 예를 들면 거지, 가수들, 집시, 카페의 손님들 그리고 소싸움 등의 현실 속의 이야기들을 계속하여 그려나갔습니다. 마네는 1861년의 살롱전에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는데요. 스페인 가수가 입선으로 뽑힌 것입니다. 이 그림은 마네가 처음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인데요. 대담한 붓놀림과 사실주의 색채가 강렬히 드러난 작품이자 명확한 음영의 대비로 인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인물의 모습이 기억에 강렬하게 새겨지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에 대한 좋은 평가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는데요.

 

바로 1863년 낙선전에서 발표되었던 풀밭 위의 점심식사때문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네 명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요. 모든 인물들은 각자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에 누워있는 남자만이 그림 속 나머지 인물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지만 왼쪽의 남녀는 남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그저 관객을 빤히 쳐다보며 무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상의 주목을 끌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그림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었습니다. 작품의 주제와 기법 등 작품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비판이 가해졌는데요.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쏟아졌던 당시의 비판의 내용을 보면 당시 마네가 이뤘던 성과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비판은 주제가 지나치게 현실적이며 사실적이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도시인들이 소풍을 나온 장면이 과연 그림의 주제로 합당한가 라는 의문이었는데요.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마네의 주제가 그 당시에 없었던 굉장히 새로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판은 벌거벗은 여성의 모습이 입체적이지 않고 평평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이 인상파에게 적극 수용되었던 것은 바로 그 평평함이었습니다. 마네는 알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렸는데요. 거친 붓질로 여성이 그림, 즉 물감을 바른 화폭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형식주의 비평에서 이 평평함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데요. 이들에게 회화라는 매체의 근본적인 특징은 평면성이며 이것이 마네의 화면묘사에서 처음 주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세 번째 비판은 누드 여성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미술 속 등장인물들은 화면 밖의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은 마치 여성이 그림 속에서 실제 존재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을 그린 그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즉, 그녀의 시선은 그림 속 세상으로의 몰입과 동화를 막는 소격 효과를 만드는 장치인것입니다.

마네는 이 사건 이래 화단과 문단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자신을 존경하는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마네는 노년에 매독으로 인한 운동기능장애로 류머티즘으로 고생하였는데요. 1883년 3월에는 왼발이 괴사 하여 결국 발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으나 11일 만에 51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인해 마네의 찬란했던 삶은 끝났지만, 일찍이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마네의 업적은 현재에도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대상의 깊은 내면을 보는 마네

마네는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리며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을 그리지 않은다. 나는 거기 있는 것을 그릴 뿐이며, 있지도 않는 것을 그리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는데요. 이 말 그대로 마네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대상의 깊은 내면을 관찰한 화가였습니다. 지금부터 초상화 두 점을 감상하면서 모델의 내면을 꿰뚫었던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 볼까요? 마네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마네 예술의 특징 이 잘 나타나는 매우 독특한 초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방 안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초상화와는 달리 일터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인 데다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사람들로 가득 찬 홀 안에서 바와 큰 거울 사이의 좁은 공간에 홀로 서있으며, 냉담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표정으로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의 표정은 무심하면서도 우울하고, 자신에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주변과 분리되어 있는데요.

뒤의 거울을 통해 드러나듯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말을 귀담아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치 여인은 분주하고 복 잡힌 술집 내부의 산만한 풍경 속에서 술집 종업원으로서의 아무 의미도 없는 고달픈 삶을 무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여종업원은 술 마시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연인들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데요.

이런 점에서 여인의 처지가 옆에 놓인 술병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즉, 그녀는 바에 놓인 상품들의 판매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스스로가 판매되는 상품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네는 이런 그녀 앞에 장미 두 송이를 헌화하였는데요. 주위에 가득 널려 있는 술병들 사이에 여인에게 헌납된 장미꽃은 여인의 처지에 대한 묘한 비애를 느끼게 합니다.

폴리베르제르 바의 내부는 여러 디테일들로 가득 차 있는데요.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부터 발코니의 반대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이리저리 잔을 부딪치며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데요. 마네는 이들을 매우 빠르고 거친 붓 터치로 그림으로써 현장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대리석 바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맥주병들, 오렌지가 담긴 크리스털 그릇, 꽃병에 꽂힌 꽃들이 놓여있는데요. 모두 섬세한 붓 터치로 그려져 있으며 빛과 색채가 잘 어우러지도록 묘사하였습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 그려진 거울을 통해 여인 반대편의 바의 정경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거울을 통해 사람이나 사물의 반사된 형상을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는 어떤 원리가 숨어있는 것일까요?

거울의 유리 표면은 빛을 반사하여 사람의 눈에 들어가게 합니다. 빛의 반사란 진행하던 빛이 벽에 부딪힌 공이 튕겨 나오듯 매질의 경계 면에서 튕겨 나오는 현상인데요. 이로 인해 사람들은 거울에서 작품 속 술집의 내부처럼 비친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까요? 위의 그림처럼 연필의 한 점 P에서 사방으로 나온 빛의 일부가 거울에 입사하면 그 표면에서 반사하여 우리 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눈으로 들어온 연필의 반사 광선을 연장하면 거울 속 영상 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뇌는 빛이 직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울 속 영상 Q에서 나온 빛이 눈에 들어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작품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거울의 효과를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 는데요. 여인의 정면과 뒷모습, 그리고 여인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거울 속에서 겹쳐진 상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 오른편에 일직선으로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술은 정확한 과학을 표현하는 것보다 예술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마네의 재량이 들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마네의 내면을 표현하는 힘을 잘 나타내주는 또 다른 작품으로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테 모리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이자 모델인 베르테 모리조는 마네와 같은 화가였는데요. 마네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로 예술혼을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베르테는 자주 마네의 작품에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요. 마네는 베르테를 모델로 하여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테 모리조외에도 발코니, 휴식 등의 뛰어난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자의식과 자존감이 남달랐던 베르테는 모델을 설 때도 자신만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하였으며 화가의 주문에 따라 수동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았는데요. 마네는 깊이 있는 시선을 머금은 섬세하고 각진 얼굴의 베르테가 가진 색다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베르테를 감싼 검은색 의상은 그녀의 얼굴과 눈을 화사하게 빛나게 하였으며 역광에 해당하는 측면 채광을 사용하여 윤곽을 뚜렷하게 살림으로써 모델의 존재감을 강조하였습니다. 베르테는 고요하게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빛에서만큼은 도도한 분위기가 풍기며 여인의 성격을 대변하는듯한 기묘한 의상은 모델의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포즈와 만나면서 작위적인 느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마네가 표현한 베르테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인물들이 그저 화면 속의 인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비해 거친 붓질로 표현된 베르테는 옆집에서 만났던 이웃 같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즉, 베르테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초상화인 것입니다. 베르테는 자신을 그렸던 초상화에 너무나 애착을 가진 나머지 마네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테오도르 뒤레로부터 작품을 다시 사들였다고 하는데요. 이 아름다운 초상화는 199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네 루아르 가문을 떠나 오르세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경과 외곽선의 독특한 해석

마네는 스페인의 대가들 중 벨라스케스와 고야를 대단히 존경하였는데요. 특히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생각하였으며 벨리스케스의 그림을 수없이 모사하며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마네의 초기 인물화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에 해당하는 피리 부는 소년은 특히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가장 많이 나타난 그림이라고 하는데요. 배경과 외곽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들어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좀 더 자세히 작품을 관찰해 볼까요?

첫 번째 체크 포인트는 소년이 입은 바지의 외곽선입니다. 동양의 서예와 같은 한 획의 선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검은색, 붉은색, 흰색의 색조로 인물의 실루엣을 처리하고 있는데요. 그 당시 파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일본화의 영향인 단순한 색채와 강렬한 외곽선으로 인물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체크포인트는 작품의 피리 부는 소년의 뒷배경 입니다. 피리부는 소년은 배경이 없이 인물만 등장한 구성으로 그려져 있는데요. 이런 구성은 전통적인 초상화의 규칙을 위반한 것으로서 이 기법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을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나 바야돌리드의 파블리오스에서 배경을 약화시키거나 거의 없애면 중심인물이 부각된다는 점을 배웠던 마네가 작품에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네는 이 작품을 단순히 다른 화가들의 기법을 채용해서 완성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피리부는 소년의 시선을 자세히 보시겠어요? 그림에서 드러나는 소년의 표정은 관객에게 모호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여기서 소년의 순수한 마음 과 성스러움이 돋보이게 표현되었습니다. 피리를 입에 대고 부는 모습은 순간의 행동을 포착하는 마네 특유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이런 관점은 동작이나 행동의 통제를 미덕으로 생각한 마네의 취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피리부는 소년은 앞선 뛰어난 화가들의 화풍을 자기 것으로 습득했던 마네의 열린 마음과 충분히 훈련된 기교에 시대를 앞선 정신이 더하여져 탄생한 작품이었습니다. 배경과 외곽선에 대한 마네의 독특한 해석으로 인해 평범한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피리 부는 소년은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자세로 우리에게 멋진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