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金弘道, 1745년 ~ 1806년?) 생애
조선시대의 4대 화가 중 한 명인 단원 김홍도입니다. 조선 후기의 여러 화가들 중에도 특히 김홍도를 빼고는 조선회화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가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는데요. 지금부터 김홍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 화가의 생애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사능, 호는 가장 유명한 단원을 비롯한 서호, 취화사, 고면거사, 첩취옹, 단구 등을 사용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김진창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김홍도의 집안은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지만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 조선시대 후기 최고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덕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당대 최대의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였는데요. 김홍도는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으로 인해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었습니다.
1765년 스물한 살이 된 김홍도는 영조가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의 병풍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맡았는데요.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이의 화가가 임금의 큰 잔치에서 사용될 그림을 홀로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김홍도가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화가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후로도 김홍도는 1771년 정조 이산의 초상화를 그려 조선 사회에서 유명해졌으며, 스물아홉 살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 즉, 임금의 용안을 그릴 수 있는 전속 화가로 발탁되어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중요한 국정 행사에서 영조의 용안을 그리며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렸던 작업을 통해 김홍도는 벼슬길에 오르게 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화가 인생의 최대 후원자를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이산으로 불리는 조선의 임금 정조였습니다. 김홍도의 그림 솜씨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던 정조는 즉위 이후 김홍도를 본격적으로 등용하여 화원의 공식 임무였던 국가적 행사 관련 그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요. 그 이후로도 약 30년간 김홍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됩니다.
다음 작품은 정조의 어명을 받고 그린 규장각도인데요. 정조 재위 시절 김홍도가 그려낸 첫 작품으로, 백악산, 북한산, 삼각산을 배경으로 창덕궁 후원에 있던 규장각을 그린 진경산수화입니다. 그림의 모델이 된 규장각은 정조가 국정을 운영해 나갈 때 중심축 역할을 했던 곳으로 정조의 깊은 애정이 담긴 건물이었는데요. 아름다운 건물과 풍경에 김홍도의 탁월한 솜씨가 더해져 빼어난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린 서른일곱 살의 김홍도는 상으로 경상북도 안동 지방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는데요. 비록 종 6품의 말직이기는 했으나 당시 현감과 직급이 같았으며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김홍도는 그 뒤에도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계속 승승장구하였는데요. 1791년에는 정조 어진 원유관본을 그린 공으로 충북 연의 현감에까지 임명되었으며 1795년에는 정월까지 봉직했습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입니다. 김홍도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1805년 12 월에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김홍도의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06년 62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은 것뿐만 아니라 당시의 화가 중 김홍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화가들의 존경의 대상이자 넘고 싶은 산이었던 김홍도의 그림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품활동
과학자마저 탄성을 지르게 하는 치밀한 구도와 시선
여러분 지금 보고 계시는 이 친숙한 작품들은 단원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입니다. 풍속화란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상을 표현한 그림인데요. 조선후기에 서민적, 현실적 취향의 풍속화가 다양한 양상을 띠며 유통되었습니다.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는 다양한 계층의 서민들을 관찰하여 백성들의 일상을 특유의 익살과 해학을 살려, 생동감 있게 재탄생시켰는데요. 지금부터 김홍도의 풍속화를 함께 감상해 보면서 작품 속에 담겨있는 치밀한 구도와 시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까요?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씨름은 보물 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에 들어 있는 25점의 그림 중 하나로서 당시 조선 시대에서 단옷날 남자들이 자주 벌였던 씨름판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절묘하고 치밀하게 그려진 인물의 구도인데요.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씨름은 씨름꾼 두 사람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구경꾼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씨름을 구경하고 있는 군중을 네 개의 무리로 나누어 그림의 테두리에 각각 배치하였는데요. 그중 작품 상단에 위치한 두 개의 무리는 서로 다른 계층의 집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상체를 앞으로 굽힌 채 선수들을 향해 환호하고 있는 오른쪽 무리는 사람들 앞에 놓여있는 뾰족한 모양의 벙거지로 보아 하층민의 집단으로 보이는 반면, 왼쪽 무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들의 집단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모서리에 배치된 각 군중들의 숫자를 세어 볼까요? 그림 상단의 오른쪽 무리부터 시계방향으로 8명, 5명, 2명, 마지막으로 엿장수를 포함한 5명으로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는데요. 그림 속 군중들의 숫자를 대각선으로 더해보면 각각 10명으로 사람의 수를 동일하게 맞추어 제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치를 일종의 이 방진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작품 씨름은 이러한 이방진을 사용하여 그림이 지루하지 않도록 다양성을 주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김홍도는 역동적인 주제 씨름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독창적인 장치들을 작품 속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우선 씨름꾼에게로 시선이 모이도록 한 원형 구도가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오른쪽에 여백을 주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의 시선을 여러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였는데요. 씨름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다른 관중들과는 달리 열띤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전혀 다른 방향을 보며 엿을 팔고 있는 엿장수와 입맛을 다시며 엿장수를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김홍도의 치밀함과 해학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씨름 선수들을 볼까요?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두 선수 중 누가 이길 것으로 보이시나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뒤쪽에 있는 씨름꾼은 들배지기를 당하여 들려 있으며 양 미간이 일그러져 있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등을 보이고 있는 씨름꾼은 이를 악 물고 넘기기 위해 마지막으로 용을 쓰고 있는데요. 자신감 넘치고 다부진 표정을 지은 채 두 다리를 힘 있게 뻗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승부는 구경꾼이 먼저 알아챈 것 같은데요? 그림 아래 우측에 앉아 있는 두 명의 구경꾼은 다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들배지기를 당한 사람이 자기 쪽으로 넘어져 올 것을 예상하여 뒤로 물러나고자 하는 마음을 다급한 자세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작품 속에는 역동감을 주는 중요한 장치가 두 가지 더 있는데요 첫 번째는 상하 무게의 뒤바뀜입니다. 보통 그림은 아래를 무겁게, 위쪽을 가볍게 하여 안정감을 주기 마련인데요. 씨름은 아래보 다 위에 관객을 더 많이 배치하여 그림이 관객 방향으로 쏟아질 것 같은 긴박감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는 다중시점이라는 고급 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둥글게 앉아있는 판을 형성함으로써 그림 위쪽의 구경꾼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림 아래쪽의 구경꾼들은 바닥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는데요. 한 가지의 그림에 다른 두 개의 시점을 배치한 것입니다. 승리와 패배, 이에 따른 환호와 안타까움, 그리고 야단법석 가운데 무관심 등 각 인물에 대한 절묘한 상황설정과 탁월한 심리묘사는 작품 씨름의 가장 큰 매력이며, 등장인물의 감정이 주변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화면 속에 그대로 녹아 있는 김홍도의 풍속화의 특징이 잘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홍도의 두 번째 풍속화인 무동은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흥겨운 장면을 그 린 작품으로 피리 둘,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구성되는 삼현육각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동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동을 그린 필체는 서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필력을 보여주며 신묘한 율동감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과감한 필치로 강렬하게 처리된 긴 소맷자락과 휘날리는 띠의 옷 주름은 무동의 신명 나는 춤사위를 더욱 흥겹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동이 들어 올린 오른쪽 발끝에서는 한국 무용 고유의 춤사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악단을 볼까요? 피리 부는 악인의 볼록한 뺨, 악기를 연주하면서 무동을 응시하는 눈매 등의 표현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요. 무동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신체적 특징과 심리상태를 힘 있고 간결한 필선으로 재현하였습니다.
무동의 전체 구도는 나선형으로 도는 원형의 구도로 그려져 있는데요. 특히 화면 가운데에 비워진 공간이 이 작품 구성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사들은 안정감 있게 ㄱ자로 꺾여 배치되어 있으며 ㄱ자 중앙의 대각선 쪽으로 떨어진 곳에 무동을 배치함으로써 전체적인 균형과 아울러 중심을 잡아 깊은 공간감을 연출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무동은 먹의 농담으로도 구도를 나타낸 작품인데요. 앞에서 춤을 추는 무동의 필체가 가장 진하고 그 옆 아래쪽 해금 타는 사람이 다음으로 진하며, 이어 대금 부는 사람, 피리, 장구, 좌고 순으로 명암을 나선형으로 점점 옅게 그려 역동감을 표현하였습니다
무동을 감상하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바로 그림 오른쪽 하단에 등을 보이고 해금을 타는 사람의 손입니다. 해금은 기타처럼 목을 왼손으로 밑에서 감싸 쥐는데요. 연주자의 왼손이 마치 오른손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씨름에서도 나타납니다. 작품 오른쪽 아래에 앉아 있던 두 구경꾼의 손이 이상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왼손과 오른손이 바뀐 상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두 그림 모두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 그린 셈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같은 형태로 보이지만 손바닥을 펼친 상태로 겹쳐보면 완전히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거울에 비친 상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화학 분자에도 적용되는데요. 유기화학물질 중 화학식은 동일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물질이 동일하지 않는 것을 광학이성질체라고 합니다. 사례를 통해 좀 더 쉽게 알아볼까요? 1960년경 유럽에서는 입덧완화제로 쓰이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을 복용한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리도마이 드는 광학 이성질체를 갖고 있는 물질인데요. 오른손 형태의 탈리도마이드는 입덧완화의 순기능을 하는 물질이었으나 왼손 형태의 탈 리도마이드는 유전자변형을 일으킨다는 무서운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탈리도마이드 같이 광학이성질체가 포함된 입체이성질체는 화학식이 같은 두 분자가 결합 순서만 바뀌어 다른 형태를 이루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형태와 물리화학적 물성은 매우 비슷하지만 생리의학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치밀한 구성에 해학을 곁들여 감칠맛 나게 표현한 김홍도의 풍속화는 중 국화와 차별되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스승 강세황에게는 여염 백성들의 일상 풍속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을 본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김홍도는 정말 고금의 화가 중에 없던 사람이었다. 라고 극찬받았다고 하니, 김홍도가 풍속화에서 이룬 업적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화가 김홍도가 오른손과 왼손을 바꿔 그리는 실수를 두 번이나 하다니, 잘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어쩌면 혹시 김홍도가 똑같지만 겹쳐지지 않은 것! 유기화학의 광학이성질체의 철학을 그림 속에 나타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산수화
우리는 김홍도의 그림을 대부분 풍속화로 알고 있지만 김홍도는 못 그리는 분야가 없는 만능화가였으며 산수화, 인물화, 기록화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던 천재적인 화가였는데요. 특히 산수화에서 아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김홍도의 놀라운 산수화를 함께 감상해 볼까요?
김홍도의 그림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데요. 전기에는 풍속화나 신선도가 많이 그려진 데 비해 산수화는 후기에 많이 그려졌습니다. 김홍도의 산수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문인 취향입니다. 김홍도는 중인 출신의 화원으로서 양반 사대부가 아니었는데요. 나이를 먹고, 지방관리 생활을 거치면서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시, 글, 그림을 겸비한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안목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전기에도 타고난 예술가였던 김홍도가 후기에는 자의식까지 깨어 있는 예술가가 된 것입니다. 1788년에 김홍도는 정조에게서 금강산을 사생해 오라는 어명을 받았는데요. 정사일에 바빠 금강산을 직접 가 볼 수 없던 정조가 가장 신뢰하던 김홍도에게 직접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어명을 받은 김홍도는 스승인 강세황과 선배 화원인 김응환과 함께 동해안 일대 관동 10군의 명승지를 직접 발로 밟으며 정성을 다해 금강산도를 그려 바쳤는데요. 당시 김홍도가 정조에게 바친 금강산도는 수십 길이 넘는 두루마리 그림으로 화려한 채색이 일품이었다. 고 문헌상에서 언급되어 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게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비록 정조에게 바쳤던 금강산도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을 짐작하게 하는 진경산수화 여러 점이 남아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명경대도 그중 하나입니다. 명경대 독립봉은 대담하게 먹으로 쓸어내리지 않아 가냘프고 약한 느낌을 주고, 나무는 김홍도 특유의 세세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김홍도의 진경산수는 대상을 충실히 옮겨 놓고 꼼꼼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인데, 활달한 필치와 더불어 세부묘사에 있어 확인되는 빼어난 표현력이 돋보입니다. 김홍도는 금강산 여행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과 관동팔 경 지역의 다양한 경치를 직접 대하였으며 이전과 다른 창작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금강산 여행 이후 김홍도의 개성 있는 산수 표현은 더욱 깊이를 얻게 되었으며, 다양한 실제 경치의 표현에 적합한 화법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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