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 1669.104) 생애
빛과 어둠의 화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 네델란드 의 황금시대에 활동했던 가장 유명한 화가인 그의 철학과 인생을 떼어놓고 작품만을 감상할 수는 없습니다. 약 400여 점의 유화와 300여 점의 판화를 비롯해 무수한 드로잉을 남긴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렘브란트의 아버지인 하르멘 헤리츠존 판 레인은 제분업자로 라인 강 근처에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라인 강의라는 뜻의 가문 이름인 판 레인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렘브란트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판 사위트브로에크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부유한 부모 덕에 렘브란트는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기술 교육을 받은 형제들과는 달리 렘브란트는 일곱 살에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고, 열네 살에는 레이덴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림과 드로잉에 온 마음을 빼앗겨 학과공부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레이덴의 화가 스완넨부르크의 도제로 들어간 렘브란트는 그곳에서 1623년까지 3년간 머물면서 그림의 기본을 익혔습니다.
1624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그 당시 역사화로 명성을 얻은 라스트만의 아틀리에에서 6개월 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라스트만은 이탈리아의 화려한 색채를 구사한 화풍을 선보였는데, 그의 자그마한 패널화는 인물과 풍경이 잘 어우러져 정밀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인물들과 다양한 디테일이 살아 있기 때문에 풍경은 아주 풍요롭게 구성되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스승의 이런 경향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작품활동
어떤 그림에서는 정교한 표면 처리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꼼꼼한 묘사보다는 물감에 의한 풍부한 표현을 더 선호했습니다. 견습 기간이 끝나자 고향인 레이덴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렘브란트의 초기 작품을 분석하면서 스와넨부르흐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는 데 동의하는 반면, 라스트만은 주제의 선택과 처리라는 측면에서 그에게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 역시 종교적 주제의 소규모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후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법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레이덴으로 돌아온 렘브란트는 라스트만의 문하생이었던 얀 리벤스와 함께 작업실을 열고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1631년까지 지속된 렘브란트와 리벤스의 동업은 렘브란트의 초기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둘은 그림 주제를 놓고 많은 의견을 교환했는데요. 렘브란트는 인물의 전신이 드러나는 작은 그림을 많이 그린 반면, 리벤스는 반신까지 드러낸 큰 그림을 자주 그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그림을 비교하고 연구하면서 시대를 보여주는 의상이나 특이한 복장을한 모델들의 두상을 주로 연구했습니다.1628년, 렘브란트와 리벤스의 작업실에 네덜란드의 외교관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문학인인 콘스탄테인 하위헌스가 방문합니다. 그는 젊은 두 화가의 타고난 재능을 칭찬하면서 좀 더 질 높은 교육을 받기위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는 것을 권유하였으나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지금의 일이 너무 바빠서 유학을 다녀올 시간이 없으며, 이미 네덜란드에 이탈리아 작품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이탈리아 회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하위헌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렘브란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그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그림의 아이디어들을 자그마한 화폭에 구현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른 화가들이 커다란 그림 속에서 헛되이 추구하는 간결한 형태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렘브란트를 리벤스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역사화 분야에서 리벤스는 뛰어나다. 하지만 생생한 창조적인 힘이라는 면에서 그가 렘브란트에 필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평은 현대 비평가들의 의견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실제로 리벤스는 곧 실물 크기의 대형화를 포기하고 렘브란트를 따라 작은 크기의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1625년부터 렘브란트는 에칭화를 실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칭은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금속면을 부식시켜 오목하게 하여 판을 완성하는 기법입니다.
그는 이 기법을 1661년까지 사용하였는데, 숙달된 테크닉과 창의력이 넘치는 세련된 표현들로 인해 에칭화의 새 장을 여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상당히 큰크기의 에칭화를 몇 번 제작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작은 크기를 선호하였습니다. 동판 조각용 칼인 부린은 다루기가 어렵지만, 에칭은 그런 점에서 해방감을 주어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에칭으로 만든 선들은 드로잉을 한 것처럼 아주 다양한 결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1632년 리벤스는 네덜란드를 떠라 런던으로 갔습니다. 같은 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기고 화랑중개인인 헨드리크의 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암스테르담 체류 초기에 렘브란트가 받은 가장 중요한 주문은 외과 길드 조합에서 한 의뢰였습니다. 이들은 해부학 강의라는 주제로 단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7세기의 수술실 안에서 벌어지는 움직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니콜라스 툴프 박사는 인체 의 팔을 해부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힘줄을 들어 올리면서 왼손으로는 그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7명의 청강생들은 해부 과정을 꼼꼼히 살피면서 해부학 교재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작품 속 모델들이 화면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지않는 것입니다. 모델들은 모두 화면 좌측에 배치되어 있고, 화면의 우측에는 해부대 위의 시신과 해부학 강의 중인 니콜라스 툴프 박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단체 초상화는 인물들을 병렬로 배치하지만 렘브란트는 그림 속의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동작을 취하는 역사화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구도와 다양한 각도에서 보이는 인물의 표정은 작품을 보다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 다.그림 속에서 시체를 둘러선 사람들을 살펴보면,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검증을 위해 참석한 검시관입니다. 그의 위치와 약간 왼쪽으로 기운 듯한 자세는 시체가 수평으로 누워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기운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검시관의 시선은 시체를 보는 것 같지 않고, 마치 해부학 교과서나 더 많은 그림 앞쪽의 군중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검시관 오른쪽으로 서류를 든 사람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이 검시가 공공성과 객관성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시체에 바짝 붙어서 보는 두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이렇게 바짝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역동적이고 부산한 표정은 바로 인접한 시체의 경직성과 무생물성과 대비되어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 해부된 팔의 정확도는 현대 의학자들도 감탄할 정도라고 합니다. 과학적인 정밀성과 둘러선 사람들의 권위를 위하여 당시 해부학 교과서가 오른쪽 아래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외과 의사협회 사무실에 걸려있었습니다. 기존의 단체초상화의 경우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피라미드의 정점에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렘브란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주인공을 오른쪽에 치우쳐 넣고도 군중과 구별된 특별한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천재성과 창조성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벽면에는 렘브란트 1632라는 글이 보입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일률적으로 작가의 사인을 아래쪽 구석에 하지만, 당시의 그림들은 작가의 사인이 그림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도 작가의 사인이 결혼증서같이 교묘히 들어가 있습니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으면서 렘브란트의 이름은 네덜란드를 넘어 전 유럽에서 유명해졌고, 그는 부유한 귀족들을 위한 초상화 제작을 독점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630년대 내내 초상화 제작은 렘브란트의 주된 사업이 되었고,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습니다.렘브란트는 1634년 암스테르담의 명문 부호의 딸이자 화랑중개인 헨드리크의 조카 사스키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사스키아는 밝고 명량한 성격이었으며, 그녀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따뜻하고 화려하고 밝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642년에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사수협회로부터 민병대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와 그의 휘하에 있는 장교들의 단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이미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도 그러했듯이, 렘브란트는 이 집단 초상화를 하나의 역사적 장면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는 장교들의 모습을 기념사진 찍듯이 나란히 세워 그리는 대신, 정오에 성벽 경계를 위해 부대를 나서는 모습을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구성을 시도하였습니다.화면 중앙의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 옆에 있는 빌렌 반 로이텐부르흐 부대장이 부대의 출동을 지시하고 있고, 저마다 다른 복장의 대원들이 각자 다른 동작으로 화면 뒤에서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대열을 정비하는 순간을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와는 별개로, 질서정연하고 영웅적인 멋진 모습으로 출격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작품에 실망을 했습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자신들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상징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으며, 초상화 속의 인물을 보면 모두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단체 초상화인 경우는 인물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당시의 천편일률적인 화풍을 따르지 않은 이 작품은 시민방위대로서 권위와 명예를 나타내고 싶어했던 사수협회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그림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는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을 비롯한 15명의 대원들 이외에도 10여 명의 가공인 물을 그려 넣었는데, 당시 돈을 지불하지 않은 인물을 초상화에 그려 넣는 것은 다른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가히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부대원 외에 시대 복장을 하고 있는 이차적 인물들은 그림의 서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특히 그림 중앙의 노란 옷을 입은 소녀는 그림 속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소녀는 허리에 닭을 차고 있는데, 여기에 표현된 닭의 발톱은 바로 사수협회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렘브 란트는 이 작품에서 초상화와 우화, 그리고 역사를 결합하여 당시 네덜란드의 모습을 기록한 역사화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렘브란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사수협회 대원들은 그림에 대한 불만을 보이며 결국 그림 구입을 거절하였고, 사람들은 더 이상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지 았습니다.
이때부터 렘브란트의 세속적 명성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제작한 같은 해에 그의 부인인 사스키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지나친 낭비벽으로 결국 말년에는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렘브란트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성공과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시체를 주제로 한 그림이 성공과 행복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또한 그의 최고의 걸작인 야경이 그를 몰락으로 들어가게 한 그림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렘브란트를 성공시킨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그를 몰락시킨 야경은 모두 단체 초상화인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외과의사협회의 단체 초상화이고 야경은 사수협회의 단체초상화라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또한 모두 죽음과 관계가 있는데요. 죽음을 늦추려는 집단과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집단을 캔버스 안에서 넘나들던 렘브란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느껴집니다.
진실을 말하는 얼굴, 자화상 렘브란트는 그려진 자서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각각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자화상 제작에 임하였습니다. 초기의 자화상들은 얼굴 표정과 생김새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자신과 가족들을 모델로 한 트로니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오로지 화가로서의 자신을 탐색하듯 응시하는 자화상만을 그렸습니다. 부와 명예를 누렸던 렘브란트는 규모 없는 생활로 집과 작품, 수집품들을 처분해야 했고, 자신의 그림을 마음대로 팔 수도 없는 상황인 1656년, 결국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년의 십여 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낸 렘브란트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그의 자화상에는 아무런 감정 없이, 얼굴과 빛만으로 위엄을 전달하는 화가의 모습이 화면 밖으로 살아나올 듯 생생합니다다소 냉소적이면서도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렘브란트는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과 부를 누리던 젊은 시절부터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시달리던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 여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말년에 제작된 자화상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성찰이 배어나옵니다. 흥미를 끄는 작품은 렘브란트의 나이 예순인 1665년에 제작된 자화상입니다. 그를 끝까지 이해하고 배려해주던 두 번째 아내와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처절한 시기에 문득 거울 앞에 선 늙은 화가의 자조어린 심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에 부와 명성을 떨치던 자신감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금빛 휘장과 터번은 이제 왜소하고 희극적인 늙은이의 모습과 대조되어 헛된 추억만을 상기시킵니다.
빛을 어둠으로 바꾼 화학반응
렘브란트의 최대 걸작 야경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는 암스테르담 민병대 본부의 현관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1715년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시청의 전쟁 협의회 사무실로 옮겨졌는데, 시청 내부의 비좁은 공간에 수용하기 위해 왼쪽 가장자리 50센티미터가 잘려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 야경은 원래 잘못 붙여진 것입니다. 원래 이 그림은 밤 풍경이 아니라 낮 풍경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야경이라는 제목은 100년이나 지나서 군대나 경찰이 야간 순찰을 하던 18세기에 전체적으로 어둡고 검은 그림을 보고 추측하여 붙인 것입니다. 원래는 지금처럼 어두운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이 그림이 이렇게 어두워진 데에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렘브란트가 사용하던 키아로스쿠로라 는 회화 기법 때문입니다. 키아로스쿠로는 이탈리아어로 빛을 뜻하는 키아로와 어둠을 뜻하는 오스쿠로의 합성어로, 한 가지 색상의 명도 차이를 통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회화기법입니다. 즉, 빛의 현상에 의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명암대비를 파악하여, 전체적으로 어둡게,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하여 입체감있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이 기법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바로크 회화의 주요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법을 쓴다고 모두 밤 풍경이 되지는 않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썼지만 밤이 아니었던 것은 명백합니다. 강조하기 위해 주위를 어둡고 불명확하게 그렸지만 상황은 정확히 전달하였습니다. 그림이 어두워진 두 번째 이유는 회화 보수 상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목재 등을 보존할 때 손상을 막기 위해 표면에 코팅역할을 하는 도료를 칠하는데요, 이 도료를 바니시 라고 합니다.
이 그림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18세기에는 고전회화는 어두침침한 갈색풍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그림 보존 시 일부러 표면에 황토색 바니시를 덧칠하였습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회화 보수의 기술이 취약하여 화면에 손상이 갈까봐 정밀한 세척은 하지 못했고, 그 위에 바니시 덧칠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층이 바니시와 함께 정착된 것입니다. 그림이 어두워진 세 번째 이유는 재료 화학상의 문제입니다. 현대에 와서 엑스레이 등에 의하여 회화층의 원재료에 대한 여러 정보가 알려졌습니다. 이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다른 화가보다 연화물 계통의 흰색과 황토색 안료와 선홍색의 버밀리온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흰색은 실버화이트라고 불리던 연백을 즐겨 썼으며, 황토색은 연화 안티몬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모두 납(Pb)을 포함한 색이었습니다. 그리고 버밀리온은 황화수은(HgS) 으로, 황을 포함하는 색입니다.
납과 황이 황과 결합하면 황화납(PbS)이 되어, 공기 중에서 검게 변하는 흑변 현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흑변 현상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57년경에 그려졌던 밀레의 만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경이나 만종은 산업혁명으로 도시 공해가 심해지면서 대기 중의 황산화물(SOx)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림의 색채가 검어지고 그림의 주제가 퇴색하면서 야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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