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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라파엘로, 르네상스,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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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1483~1520) 생애

 

하늘은 때로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고귀한 재능과 무한한 부를 한 사람에게 모두 부여하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열전』에서 이와 같은 문구로 라파엘로의 전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사리의 이러한 평가는 라파엘로가 활동하던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라파엘로와 그의 그림에 보냈던 경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라파엘로는 고전의 신화를 소생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팽배했던 시대의 상징으로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1483년 4월 6일, 우르비노 공국에서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차를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우르비노는 가장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고, 이탈리아 반도와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을 환영하고 보호했습니다. 우르비노의 군주였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은 인문주의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재능 있는 개인들을 후원했으며, 예술 후원도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는 역량 있는 화가로 이곳에서 크게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페데리코 공작의 궁정에서 미술가로서 훈련을 받고 일하였는데요. 비록 궁전에서 종신직을 얻지는 못했지만 정기적으로 고용되어 궁정화가로써 일을 하였습니다.

라파엘로는 아버지가 사망한 1494년까지 자신의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 화가로서 훈련을 받았는데요. 테이블을 준비하는 방법에서부터 안료를 빻고 아교를 데우고 철필을 가는 등 작업에 앞서 필요한 모든 과정을 익혔습니다. 이 시기는 야망을 품은 젊은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기초지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후 라파엘로는 페루자에 있는 피에트로 페루 지니의 공방에서 도제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페루지 노는 1490년대 중반에 피렌체와 페루자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화가였습니다. 페루 지니의 작품은 성모와 성인들의 고상하고 엄숙한 의상과 머리모양이 특징적인데, 그들은 대개 광활하고 평온한 풍경에 차분히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곧바로 유행이 되었습니다. 어린 라파엘로는 이미 화화의 기초원리를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스승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페데리코 공작 치하의 우르비노의 예술적 문화적 풍토와 조반니의 예술가로서의 성향, 페루 지니의 스타일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라파엘로의 예술 수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작품활동

1500년 12월 10일에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오랜 협력자였던 에반젤리스타와 함께 치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산타고스티노 성당의 예배당에 놓을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제단화〉를 제작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1501년 9월 13일에 작업 대금을 받았는데, 이는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계약서에는 에반젤리스타의 이름 옆에 라파엘로의 이름이 마지스터(magister);로 적혀 있었는데요. 이는 라파엘로가 견습기간을 끝내고 독립된 화가로 활동했음을 의미합니다.

 

불행히도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 제단화〉는 1879년에 지진으로 파손되었는데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사라져 버렸다가 1791년에 4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성모와 성부를 그린 조각은 에반젤리스타의 작품으로 보이고, 천사를 그린 두 조각은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보입니다.천사를 그린 그림은 조반니가 그린 제단화와 유사하면서 천사의 표현에서 좀 더 호소력 있고 세련된 색채 연출을 보여 페루 지니의 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페루 지니의 기법을 제대로 소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젊은 라파엘로는 그러한 기법을 단지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천사의 자세와 온화한 표정을 창조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1503년경에 그린 〈십자가 처형〉은 양모 상인이자 은행가인 가바리가자신의 장례 예배당을 위해 주문한 작품인데요. 그림을 살펴보면 십자가 위에 사지를 늘어뜨린 예수가 있고, 은색 구름 위에 균형을 잡고 서있는 두 천사는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를 성배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혈을 담는 성배는 미사 때 분배되는 포도주를 담은 성배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같은 성찬식의 의미에 대한강조는 가바리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리는 장례 예배당이라는 설정과 맞아떨어집니다. 평화로운 한낮을 나타내는 하늘에는 구름 위에 해와 달이 동시에 나타나 있는데요.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일어났을 때 벌어진 일식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두 명의 인물은 성 예로니모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존경과 동정심을 담은 눈길로 십자가 위의 예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 자세는 제단에서 경배를 바치는 이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이들의 뒤에서 자줏빛이 도는 검은색 겉옷을 걸쳐 애도를 표시하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은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과 눈을 맞추며 깍지 낀 손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양식과 유사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점차 기법과 구성에서 멀어져 가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풍경은 저 멀리 희미해지고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상태가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편, 라파엘로는 성모자를 다룬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는데요. 때로는 어린 세례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솔리 성모〉는 라파엘로가 페루 지니의 예술적 특징으로부터 멀어져서 독자적인 성격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페루지노가 그린 성모자상을 보면 다른 인물과 함께 그려졌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성모와 아기예수 사이에 우아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모자상이 페루 지니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지만 단조롭게 반복되는 바람에 피렌체 사람들은 곧 싫증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자상은 인물뿐만 아니라 두 인물 사이에 형성된 애정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연출할 수 있는 무한한 창조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솔리 성모〉에서 성모는 한 손에 성서를 들고 독서에 집중하고 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예수의 발을 만지고 있습니다. 아기예수는 책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페루 지니의 성모와 매우 닮아 있지만, 라파엘로는 인물을 좀 더 견고하게 그렸고 따뜻한 분위기의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그림의 풍경은 크게 중요성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놓여 있는 배경의 분위기가 침묵 속에 미묘하게 흐르는 애정을 돋보이게 한다는 사실 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살펴보신 〈솔리 성모〉를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그린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을 다룬 작품들을 보면 그가 인물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보다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제단화와 같은 공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귀족에게 의뢰받아 귀족계층을 위한 작품도 여러 점 제작하였습니다. 〈성 제오르지오의 용〉은 페데리코 공작의 딸이자 당시 막강한 후원자였던 조반나 디 몬테펠트로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입니다. 앞발을 들고 소리를 내지르는 흰 말 위에 올라탄 성 제오르지오는 자신을 공격하는 용에게 결정타를 날리려 하고 있고, 오른쪽 뒤에는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는 공주의 모습이 보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놀라운 회화 실력을 드러냈는데요. 성인이 입고 있는 갑옷의 반짝거림과 말의 장신구, 용의 가죽 등의 세부묘사를 거의 세밀화에 가깝게 정교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예배당을 위해 의뢰를 받아 제작한 〈성모의 결혼〉은 화면의 구성을 살펴봤을 때 페루 지니의 〈성모의 결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능숙한 원근법의 사용과 더불어 인물, 공간, 건축물 사이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구현하여 스승을 뛰어넘는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림에서 배경의 중앙에는 당대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가 있습니다. 16면으로 구성된 돔 형태의 이 성전 중앙에는 RAPHAEL URBINAS(라파엘로 우르비나스)라는 서명과 1504년(DMⅡⅡ)이라는 제작연도가 적혀 있습니다.

성전 앞의 계단과 이어진 광장에서는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 있는 사제는 두 사람의 손을 잡아 요셉이 마리아에게 반지를 끼워주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성스러운 의식의 참석자들은 광장의 앞쪽에 늘어서 있는데요. 마리아의 뒤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보이고, 요셉의 뒤로는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아가 거절한 구혼자들이 보입니다.페루지노가 인물들을 다소 경직되고 어색한 분위기로 배열한 것과 달리, 라파엘로는 보다 다양한 자세와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작들로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페루지 노는 요셉의 자세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주기 위해 의상과 신체의 음영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에 비해, 라파엘로의 요셉은 관람자를 향해 미묘하게 몸을 틀어 좀 더 편안한 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옷 주름을 표현한 율동적인 선들도 인물의 동작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사제 역시 요셉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인물들 간의 관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모의 결혼〉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 어떻게 2차원의 화면 위에 3차원의 공간을 창출하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개방된 공간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구도를 짜임새 있게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화면 전체에 질서와 통일감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성전 계단으로 이어지는 광장 바닥에 완벽한 원근법에 따라 기하학적인 무늬들을 배열하여 전경의 결혼 장면과 후경의 건축물을 효과적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가 여러 건축 요소들을 능숙하게 다루어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한 세대 이전에 활동했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양식까지 소화하면서 이미 스승을 뛰어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04년, 라파엘로는 전통적으로 예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분위기를 가진 도시인 피렌체로 이주하였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 권력을 잡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을 거쳐 피에르 소데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권이 수립된 상황이었습니다. 소데리니는 도시의 명성과 위신을 높여줄 예술작품의 창작을 독려하는 데 힘썼는데요.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혁신적인 작품활동을 펼치며 피렌체 시민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대의 젊은 청년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입성했을 때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는 데요. 이 두 거장의 작품 덕분에 젊은 예술가들은 옛 거장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전에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자유를 향해 그들의 영혼과 정신을 마음껏 풀어놓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머물고자 했던 것은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도나텔로, 마사초와 같은 15세기 이탈리아 문예 부흥 초기의 콰트로첸토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라파엘로는 대단히 열성적으로 선배들의 업적을 연구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결과는 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일찍부터 페루자와 우르비노에서 재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당시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막 도착해서 거장들의 솜씨를 배우는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피렌체에 머물던 초기에는 페루자와 우르비노에서 작품을 의뢰받았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간 라파엘로는 개인용 봉헌화와 초상화들을 주로 의뢰받았습니다. 그는 무역업과 은행업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고 부유한 피렌체 가문들을 위해서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부유한 부르주아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능력 있는 젊은이를 아꼈던 부유한 상인 타 데오 타데이는 라파엘로를 항상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예의 바른 청년이었던 라파엘로는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두 점의 그림을 그려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금 보시는 〈초원의 성모〉입니다. 성모자와 어린 세례 요한의 모습 뒤로 넓게 펼쳐진 초원을 보면, 먼 곳에 보이는 마을의 건 물들 과 산과 강, 그리고 하늘이 같은 색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모의 얼굴에는 아기예수를 향한 어머니의 애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그녀의 붉은색 상의는 푸른색 치마와 대조를 이루는데, 여기서 붉은색은 예수의 죽음을, 푸른색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즉, 라파엘로는 성모의 의상을 통해 교회와 예수의 희생 간의 결합을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표현법은 대부분의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세 인물은 서로를 응시하거나 손을 잡고 있어 모두 긴밀하게 교감하고 있습니다. 성모의 시선은 어린 예수에게 향하며, 십자가를 만지려고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예수를 손으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라파엘로는 성모의 시선과 제스처를 세심하게 처리하여 감상자들이 두 어린이에게 주목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징인 털옷을 입은 어린 세례 요한은 무릎을 꿇어 예수에게 경배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의 가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한편, 초원에 핀 붉은 양귀비꽃 역시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암시하는 도상입니다.

 

라파엘로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구도를 사용하여 인물 간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룩하였습니다. 라파엘로뿐 아니라 이 시기의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많이 그렸는데, 전체적으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는 것이 공통된 특징입니다. 이 구도는 다 빈치가 〈성 안 나와 있는 성 모자〉에서 처음 시도한 것으로,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하였습니다. 성모의 오른쪽 발에서 팔과 어깨로 이어지는 대각선이 한 변을 형성한 피라미드 구도는 그녀의 머리와 후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성모의 머리와 어깨를 지평선 위쪽에 두어 화면 전체에도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는 구성방식에서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았지만, 다 빈치가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성모의 신성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한 것에 비해 라파엘로는 선명한 색채와 우아한 선을 구사하여 회화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라파엘로는 신성한 주제와 자연스러운 표현법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성모자상의 전통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1508년, 라파엘로는 작업 중인 패널화를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급히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하였습니다. 과연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요? 당시 로마의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비아 줄리아 건축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는 일련의 사업과 더불어 바티칸 궁의 집무실을 새로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무실을 짓는 일은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위임되었으며, 집무실을 장식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였습니다. 바사리는 브라만테는 라파엘로와 먼 친척 관계였는데, 교황의 집무실을 짓는 대규모 사업을 통해 교황에게 솜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라파엘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 소식을 듣고 라파엘로는 기뻐하며 피렌체에서 하던 일에 손을 떼고 곧 로마로 떠났다. 라고 기록하였는데요. 라파엘로가 교황의 집무실을 장식하는 벽화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브라만테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브라만테는 교황을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방 엘리오도르의 방 서명의 방 보르고의 화재의 방의 네 개의 집무실을 새로 지었는데요. 라파엘로는 이 중 서명의 방의 장식을 위한 첫 번째 프레스코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중앙의 팔각형 천장에 있는 둥근 원형 틀 안에 각각 신학, 법학, 철학, 문학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고, 사각형 틀 안에는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아담과 이브〉, 〈솔로몬의 재판〉, 〈천지창조〉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 천장화를 본 율리우스 2세는 즉각 라파엘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명의 방의 벽면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는데요. 라파엘로는 〈성체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정의〉를 그렸습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고대의 지식에 대해 큰 관심이 일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현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요.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은 자신의 사상이나 업적과 관련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여러 무리로 나뉘어 철학적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그림의 중앙에 있는 두 인물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중세의 스콜라 철학 이후 이어져온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확대된 신플라톤주의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인 『티마이오스』를 든 채 이데아를 논하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 설명하듯 오른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있으며, 현실세계에 대한 탐구를 대변하고자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는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플라톤 옆에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파하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보이고, 리스토텔레스의 앞의 계단 한복판에 보라색의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입니다. 화면의 앞부분에서 왼쪽에 푸른색 옷을 입고 월계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쾌락주의 철학을 주창한 에피쿠로스이고, 그 옆으로 왼쪽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앉아서 책에 무언가를 열 심히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피타고라스입니다. 그 오른쪽에는 사색의 즐거움에 깊이 잠겨 있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대리석 탁자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종이 위에 글자를 적고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에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사람은 기하학자 유클리드입니다. 유클리드 뒤에 등을 보이고 지구의를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는 천문학자 조로아스터와 별이 반짝이는 천구를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동료화가인 소도마와 검은 모자를 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라파엘로 자신이 있습니다. 플라톤 옆에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파하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보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앞의 계단 한복판에 보라색의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입니다. 화면의 앞부분에서 왼쪽에 푸른색 옷을 입고 월계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쾌락주의 철학을 주창한 에피쿠로스이고, 그 옆으로 왼쪽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앉아서 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피타고라스입니다. 그 오른쪽에는 사색의 즐거움에 깊이 잠겨있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대리석 탁자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종이 위에 글자를 적고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쪽에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사람은 기하학자 유클리드입니다. 유클리드 뒤에 등을 보이고 지구의를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는 천문학자 조로아스터와 별이 반짝이는 천구를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동료화가인 소도마와 검은 모자를 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라파엘로 자신이 있습니다. 한편, 라파엘로는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저명인사들을 작품 속 인물들의 모델로 삼았는데, 플라톤은 다빈치의 얼굴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바탕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이 모여 있는 곳은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을 위해 설계한 도면의 영향이 엿보이는 거대한 건축물로, 하늘이 개방된 둥근 천장과 아폴론과 네르바 조각상을 안치한 벽 등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완벽한 원근법을 구사하여 산만하고 복잡한 느낌 없이도 많은 등장인물들을 조화롭게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전 건축의 균형감각과 질서,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09년 10월 4일, 라파엘로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교황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서명의 방을 장식하는 그림들을 완성한 이후 다른 방들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들을 계속해서 그려나갔으며, 이와 함께 공적이거나 사적인 여러 건물들을 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는 1514년 8월 1일, 라파엘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건축가로 임명하였습니다. 화가를 건축가로 임명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라파엘로는 일찍부터 그림 속의 건축적인 요소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고대 로마 건축에 관심을 기울이며 피렌체에 머물던 시절부터 건축 드로잉을 그려 왔습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건축가로서 쌓은 경력은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교황을 위해서 바티칸 궁의 로지아를 지었고, 부유한 은행가였던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해서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 예배당을 지었으며, 로마의 금 세공인 조합을 위해서 산엘리조 델리 오레피치 교회를 지었습니다. 말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과 마리오 산비탈에 위치한 빌라 마다마의 건축일로 매우 바쁘게 지냈습니다.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은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의 의뢰로 제작한 〈그리스도의 변용〉입니다. 건축가로 분주하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타보르산에서 있었던 예수의 거룩한 변모를 소재로 한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한 예수가 빛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중간 부분에는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아랫부분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의 갈등과 혼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상의 신비스러움과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자유분방한 구도로 동적인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고전적이 르네상스 미술 양식이 해체하고 바로크 미술 양식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변용〉을 제작한 이후 라파엘로는 열병을 앓다가 자신의 생일인 1520년 4월 6일,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라파엘로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판테온 성전의 예배당에 묻혔습니다. 라파엘로의 사후에도 그의 명성은 결코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걸작을 남긴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기에 있어서 고전주의 예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그만의 정밀함과 완전한 표현은 서구 회화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라파엘로의 걸작 〈아테네 학당〉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요. 열심히 공식을 쓰고 있는 피타고라스의 등 뒤에서 그의 노트를 잽싸게 베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왜 굳이 없어도 될 만한 인물을 그려 넣은 것일까요? 아마도 모방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라파엘로는 다른 거장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방과 창조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아테네 학당〉 역시 그룹별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심리적 연대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고, 등장인물들의 영웅적인 신체 표현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웅장한 원근법적 구도와 건축적인 구성에서는 도나토 브라만테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방식을 모방한 작품들은 산만한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아테네 학당〉은 전례 없이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며 라파엘로의 역량을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고 한다면, 라파엘로는 타인의 장점을 철저히 자기 것으로 습득하는 모방의 천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부적 재능을 가진 천재이건 모방의 천재이건 결과적으로 역사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모두를 모두 똑같이 위대한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거장들의 장점을 끊임없이 배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라파엘로가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술에 대한 소질과 함께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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