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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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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생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에서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인 카타리나는 신분이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하층계급 출신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다빈치 가문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직업적으로 피렌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명망 있는 가문이었는데요. 도심에는 그들 소유의 집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 빈치가 그 집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생아의 출산은 일반적으로 가족이 소유한 시골집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다 빈치의 출생 장소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출생일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 빈치의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공증기록부 마지막 페이지에 1452 년. 나의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들이자 나의 손자가 4월 15일 출생했다. 이름은 레오나르도라고 정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이가 사생아일 경우 아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다 빈치가 태어난 피렌체에서 약 32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 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합니다. '빈치 (vinci)'라는 마을 이름은 그 마을에 빈치 (vinchi)'라는 골풀이 많은 데서 유래했는데, 이 빈치는 다 빈치의 조부 때부터 가문의 성이 되었습니다. 토스카나 사람들 빈치오라는 개울가에서 자라는 이 골 풀을 엮어 다양하게 사용하였는데 , 다 치는 빈치 지역의 버들 공예를 개인적인 상징으로 삼아 골풀의 얽힘 장식을 모나리자 ,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에 사용하였습니다. 다 빈치는 스스로를 문맹이라고 일컬었는데요 , 물론 읽고 쓰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구적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자신이 교양 없다고 하면서 도 결코 자신을 평가절하하지 않았고 , 오히려 자신의 독립성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통해 지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 직접 관찰과 경험을 통해 지식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훨씬 거대하고 가치 있는 것 , 즉 모든 대가들이 자기 애인처럼 아끼는 경험에 대해 말할 것이. 단지 인용만 하는 사람들 , 더 나아가 추종하거나 모방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간접적인 정보를 흡수하 고 한껏 자만심에 부풀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재인용하는 허풍선이에 불과하다. 이렇게 교육받은 자들은 간접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자신은 자연에서 직접 경험하여 깨닫는다고 생각하며 교육을 많이 받은 많은 지식인들을 지혜가 없다고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적 교육을 높이 받은 자들에게 전체적인 통찰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대인의 기질도 있었습니다. 다 빈치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않는 대신 일찍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베로키오의 공방은 매우 유명하고 권위가 절대적이었는데요. 그는 큰 건의 계약서에 서명 한 뒤, 그것을 협조자들과 함께 제작하거나 제자들을 시켜 완성하게 했습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대부분이 공방 출신이었습니다. 1460 년대 말부터 1470년대 까지 산드로 보티첼 , 피에 트로 페루지 , 도메니코 를란다요, 로렌초 디 크레디 등이 베로키오의 공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공방에서는 주문 들어온 작품을 종종 협동으로 작하였는데 ,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세례에는 다 빈치의 솜씨가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제일 왼쪽에 있는 천사인데요. 옷의 주름이나 머리털의 부드럽고 정교한 테크닉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다 빈치의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 빈치는 어려서부터 왼손으로 거울상 글씨를 썼습니다. 당시에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아주 나쁜 버릇이고 왼손이 관련되면 죄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이를 교정할 시기를 놓쳤고, 이후에 그림을 그릴 때도 양손을 쓴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 빈치가 거울 필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다 빈치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심리적 압박을 받으면 보통 왼손잡이 성향이 수그러들게 마련인데, 다 빈치는 이런 압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평생의 습관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다 빈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회화 작품을 그리 많이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준비나 밑그림이랄 수 있는 소묘는 많이 남겼습니다. 이는 그가 그림을 탐구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림을 그리다가도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림을 중단하였기 때문에 미완성인 작품이 많습니다. 그는 점차 그림보다는 그것이 나타내는 주제, 즉 자연, 인체, 동물, 식물 등 사물 자체의 과학적인 탐구에 몰입해 갔습니다. 그는 기계공학, 해부학, 건축학, 기하학, 생물학, 천문학 등 많은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작품활동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로움의 미학

대부분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에서 몇 안 되는 완성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 기독교의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 밀라노의 성 마리아 성당 식당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가 너희들 중에 나를 팔아넘길 자가 하나 있다. 고 말하고 난 직후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요. 이 말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따라나선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가운데 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각기 여섯 명씩 양쪽으로 배치된 제자들은 세 명씩 그룹을 이루어 스승의 말에 놀라움과 결백을 증명하듯 저마다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의 성격을 고려하여 몸짓과 인물 배치를 하고,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격정적인 연극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에 화가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서 대단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 원근법의 정점에서 예수가 드러나게 위치되어 있습니다. 절묘한 순간을 취하여 예수 양쪽의 제자들이 M 자로 벌어지고 , 예수의 머리 뒤에는 밝은 바깥 풍경을 배치시켜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후의 만찬은 제작 당시부터 물감이 떨어져 나가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50 년대 벽화를 보았던 바사리는 얼룩 덩어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 빈치가 젖은 회벽에 안료만을 이용해 그리는 당시 일반적인 벽화 방식인 프레스코 대신에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은 템페라와 안료에 오일을 섞은 유화를 혼용하는 매우 실험적인 회화 제작 기법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템페라는 회벽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프레스코에 비해 완전히 건조가 된 회벽 위에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세심하게 그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템페라에 사용하는 달걀노른자는 수분을 거의 50% 이상 함유한 에멀션인데, 유화는 기름이므로 수지 균형이 깨어져 상 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 빈치는 나무판에 석회를 발라서 평편하게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납을 함유 한 색과 황을 함유한 색을 자주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석회는 탄산 화하여 울트라마린 등과 반응하면 탈색하게 되고, 납 성분의 연백은 바닥에 대한 부착력은 좋으나 황과 만나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처음 칠했던 색에 비해 검게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화학만은 정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손상이 너무 심하고 수세기 동안 보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 마침내 1980 년대부터 대복원 작업을 하여 완전히 새로운 색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복원한 것인가 하는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뿐만 아니라 모나리자 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검게 변했는데요. 다행히 최후의 만찬처럼 템페라와 유화를 섞어 쓰지는 않았기 때문에 박락 현상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제목모나리자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Mona는 이탈리아어로 부인을 뜻 하는 마돈나의 준말이고 , 'Lisa'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라는 상인의 젊은 부인인 리자 게라르디니 (Lisa Maria Gherardini)라고 합니다. 그림의 원래 제목은 이탈리아어로는 라 조콘다 (La Gioconda), 프랑스어로는 라 요꽁드 (La Joconde) 인데요 , 한국어로 조콘도 (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제목은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50년 출간된 바사리의 『 미술가 열전 』에 있습니다. 모나리자에게 눈썹이 있었다면 나중에 눈썹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바사리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조콘다 부인의 그림이라는 바사리의 말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눈썹을 미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바사리의 이 기록 말고는 조콘다 부인의 그림이라거나 조콘다가 주문했다든가 또는 값을 치른 기록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 빈치가 죽은 뒤에도 이 그림은 그의 화실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기 시작한 지 4 년이나 되었는데도 서명이나 날짜도 써넣지 않았기 때문에 눈썹이 없는 사실과 함께 미완성이라는 말도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모나리자는 이처럼 풀리지 않는 의혹투성이입니다. 이 그림에 대하여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신비로운 미소 입니. 입술의 양끝만 살짝 올라간 이 미소는 사실 다 빈치의 그림들에서 거의 변함없이 나타납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성요한의 미소와 얼굴 모양도 거의 모나리자와 흡사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그 성모와 성자와 성 안나에서 마리아의 얼굴도 이런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모델이 지은 미소라기보다는 다 빈치가 생각하는 미소의 보편적 표현같이 보입니다.

 

이 그림이 그렇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에는 배경으로 그려진 풍경의 영향도 큰데요. 현실적이지 않고 신비한 모습인 데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다시 말하면 ,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다 빈치의 관념에서 나온 표현인 것입니다. 그는 평생 끝없는 욕망을 좇은 탐구형 인간이었습니다. 이러한 풍경도 그의 도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목표를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공기원근법,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창조적 발명품

이탈리아 말로 안개처럼 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스푸마토는 , 멀리 있는 사물은 공기의 두께가 두꺼워져 희미하고 뚜렷하지 않게 보인다고 생각하여 그림에서 마치 안갯속에 있듯이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즉 , 색과 색 사이 경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는 기술적 방법으로, 윤곽선이 있는 부분을 기름으로 적시고 손가락이나 해면으로 부드럽게 문질러서 표현합니다. 스푸마토 기법은 공기원근법을 연속적으로 표현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공기원근법이란 눈과 물체 사이에 공기나 빛에 의해 생기는 변화를 명암이나 색을 이용해서 거리감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 색채원근법 ' 이라고도 합니다.

다 빈치는 '색채는 멀리서 볼수록 약하게 보인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빛의 산란을 말한 것입니다. 태양의 가시광선은 대기를 통과해 들어오다가 공기 중의 산소나 먼지 등의 입자를 만나게 되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 이러한 현상을 산란이라고 합니다. 공기를 이루고 있는 산소나 질소 분자들은 특히 진동수가 큰 짧은 파장의 빛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산란시키는데 , 가시광선 중에서 붉은빛의 파장은 700nm이고, 푸른빛의 파장은 450nm입니다. 따라서 푸른빛은 붉은빛보다 더 강하게 산란됩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가장 많이 산란되므로 멀리 있는 어두운 물체는 대부분 푸른색을 띠게 됩니다. 또한 멀리 있는 사물은 가까이 있는 사물보다 윤곽이 부드럽고 흐리게 보이고 , 색조도 엷게 보이며 , 아주 먼 곳은 밝은 곳과 그늘진 곳의 대조도 크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밝고 따뜻한 느낌의 색은 가까워 보이고 , 어둡고 차가운 느낌의 색은 멀어 보이며 , 채도가 높은 색은 낮은 색보다 돌출되어 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가까운 곳의 풍경은 붉은 색조를 사용해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한 반면, 먼 곳의 풍경은 청색조를 사용하고 윤곽선을 흐릿하게 묘사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공간이 뒤로 물러니는 듯 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기원근법은 색의 농담과 색조를 이용해 앞부분은 선명하고 강하게 , 뒷부분은 엷고 약하게 표현하여 원근감을 나타냅니다. 공기원근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려서부터 산천을 뛰어다니며 관찰한 결과물로 생각됩니다. 공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밀도가 있어서 멀리 있는 것은 공기에 의하여 흐릿해진다는 것을 넓게 트인 고향의 벌판에서 관찰하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스푸마토 기법이나 공기원근법은 그의 다른 그림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요. 안갯속의 아련한 신비감을 주는 이 기법은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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