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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로렌초 기베르티, 르네상스,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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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 생애

다비드 상, 피에타 등의 작품을 만든 천재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한 조각가의 작품을 보고 이 문은 이곳이 아닌 천국에 있어야 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토록 칭송을 받았으며 이토록 위대한 작품을 조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고대미술을 연구했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입니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대표적인 조각가입니다. 기베르티의 어머니는 치오네 기베르티와 결혼하여 피렌체 근교의 펠라고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1406년 금 세공인이었던 바르톨로 디 미켈라와 결혼하였습니다, 비록 생부를 알 수는 없지만 기베르티는 바르톨로를 아버지라고 생각했으며 그에게 금 세공인으로서 훈련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고대 미술을 되찾고 연구한 기베르티

기베르티는 금 세공과 함께 그림을 공부하였습니다. 페사로의 통치자였던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를 위한 그림 작업을 위해 피렌체를 떠났던 기베르티는 1401년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두 번째 청동문을 만들 사람을 뽑는 경연소식을 듣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심사에서 건축가이자 조 각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2위로 제치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기베르티가 작업을 맡게 되었는데요. 첫 번째 문을 성공적으로 제작한 후 만든 작품이 바로 현재 세례당의 동쪽의 문이자 미켈란젤로의 극찬을 받았던 천국의 문입니다.

 

1402년 심사위원단이 기베르티를 청동문의 제작자로 선정하면서, 이 젊은 미술가는 곧 인정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은1403년에 기베르티의 아버지의 공방이었던 바르톨로 디 미켈라의 공방과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407년에 본격적으로 기베르티가 작업을 넘겨받아 조각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 작업은 142년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요, 이 기간 동안 기베르티는 단순히 청동문 제작 작업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고딕 양식의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디자인하고 대성당 공사 감독자이자 건축고문 역할도 맡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고 합니다. 1412년경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기베르티는 양모와 옷감 상인들의 조합인아르테 데이 메르칸티 디 칼리말라에게서 여러 길드의 공공건물인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부 벽감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을 실물크기보다 큰 청동상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 작업은 기베르티가 금세공인의 범주를 벗어나는 첫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기베르티의 성 요한상은 연약해 보이는 인물상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 주름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표현한 작품인데요, 성경 속 성인의 모습을 실물보다 약간 큰 사이즈로 조각한 이 작품은 미술사학자들이 말하는 국제 고딕양식으로서 14세기 후반에 이미 유럽을 휩쓸었으나 15세기 초의 피렌체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양식이었습니다. 특히 성 요한은 사실상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커다란 청동상이었다고 하는데요, 기베르티는 1416년에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됩니다.성 요한상에서 보여준 기술적인 완성도와 참신한 스타일로 인해 기베르티는 다른 두 조합으로부터도 비슷한 크기의 청동조각상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 1419년에는 은행가 길드를 위한〈성 마태오〉상을 만들었고, 1425년에는 양모업자 길드를 위해 〈성 스테 파〉상을 만들었습니다. 기베르티에게 있어 커다랗고 육중한 고전적 인물상들이 보여주는 대담성과 힘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지만 뒤의 두 작품들을 연달아 성공적으로 완성함으로써 피렌체 미술계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45 세 때 첫 번째 문을 완성한 기베르티는 10 년간에 걸쳐 회화적 공간을 조성하고 우아하고도 생동감 있는 인물을 창조해 내는 새로운 수법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는데요 , 그 결과로 1420 년대 후반의 작품 속에서 공간감이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작품은 1425부터 1452 년까지 제작되었던 천국의 문의 한 장면인 요셉의 에피소드입니다. 오른쪽 상단의 산 너머에 동생 요셉을 상인들에게 은화를 받고 팔아버리는 형제들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 한눈에 봐도 굉장히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진 좌측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 방금 전에 봤던 장면보다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 이번엔 중앙의 광장을 한번 볼까요 ? 방금 보셨던 장면의 사람들 보다 광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더 크게 조각하여 더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화면 아래 쪽의 사람들은 마치 바로 앞에 서있는 것처럼 가장 가깝게 느껴집니다 . 이러한 작품의 공간감은 전체 조각을 보면 더욱 확연히 느껴집니다 .

 

 

작품활동

기베르티 , 천국의 문 : 요셉의 에피소드, 1425~1452 경 , 도금, 피렌체 대성당

이 무렵의 기베르티는 피렌체의 새로운 미술에 감명받아 , 시각예술에 대한 이론적 논문 『 회화에 관하여 』 를 쓰고 있던 젊은 인문주의 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만난 듯합니다. 알베르티의 논문을 살펴보면 저부조에 공간감을 주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인물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공간배경을 사실적으로 나타낼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 방금 전 보신 기베르티의 부조작품은 르네상스 회화예술에 대해 알베르티가 논술한 것을 구현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 그러므로 기베르티의 작품을 평가할 때는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과 매력뿐만 아니라 , 새로운 이론이 융합되어 있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 기베르티 스스로도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

" 눈으로 보는 바에 따라서 즉 , 실제로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떨어진 것은 작게 보이는 원리에라 배경을 설계했다."

기베르티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데에 굉장히 관대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기베르티는 자신의 디자인이나 모형을 다른 예술가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피렌체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요 , 도나텔로 , 파올로 우첼로 , 미켈로초 , 베네초 고촐리 등의 유명한 르네상스 예술가들도 한 때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조수로 일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기베르티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는데요 , 기록에 따르면 화가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 리나이우올리 제단화 〉 의 틀을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 기베르티는 " 도시의 주요 작품 중 내 손으로 만들거나 디자인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라고 주장하였는데요 , 프라 안젤리코의 사례를 보더라도 기베르티의 말이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기베르티는 고대미술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던 예술가이자 새로운 고대양식을 발전시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자유로이 창조해 낸 인물이었습니다. 기베르티가 남긴 작품들과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미켈란젤로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기베르티의 〈 천국의 문 〉은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청동문 작업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 당시 작업을 맡길 최고의 금세공을 찾기 위한 심사에 당선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심사는 단순한 토의를 통해 담당자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 현재로 따지자면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는데요 , 당시 최고의 금세공 마에스트로들에게 공통적인 주제를 준 뒤 만들어진 결과물을 심사하여 우승자를 뽑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속한 세례당에는 1330 년에 안드레아 피사노가 완성한 성 요한의 일생을 금박 입힌 청동 부조를 새겨 넣은 청동문이 있었습니다. 이를 이어 1401 년에 두 번째 문의 청동부조 제작자를 선정하기 위한 시합이 열리게 되었는데요 , 물론 현상공모 내용이 문을 만드는 것이 아닌 문에 새겨 넣을 청동 조상이었으므로 경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목수가 아니라 조각가여야 했습니다.

 

당시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를 위한 그림 작업을 위해 피렌체를 떠났던 22 세 수습 화가 기베르티는 고향에서 벌어지는 현상공모에 참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피렌체로 돌아와 경연에 참가하였는데요 , 기베르티와 함께 금 세공사 브루넬레스키나 도나텔로 같은 당시의 쟁쟁한 조각가들이 모두 참여하여 자웅을 겨뤘습니다. 청동 네 덩어리와 함께 던져진 경연의 공통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었는데요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구약성서의 내용을 4 엽 장식으로 만들어 1 년 안에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까다 로운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요 , 옷을 입은 인물과 벗은 인물, 동물과 식물, 배경이 되는 풍경이 함께 묘사되어야 했습니다. 경연의 주제였던 이삭의 희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어 겨우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요 , 늦게 얻은 자식인 이삭이 마냥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죠. 번제물은 죽인 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방법으로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중에 어린 이삭이 나무와 칼과 불씨는 챙겨 가면서 제물에 쓸 양은 왜 안 가져가나요?라고 물어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산에 오르자마자 제단을 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한 뒤 칼로 죽이려 하자 이때 천사가 다급히 나타나 아브라함을 제지하였는데요 , 기베르티는 바로 이 극적인 순간을 조각하였습니다. 모든 시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화가, 조각가, 금 세공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총망라한 서른네 명의 심사위원단이 구성되었고 흥미진진한 심사가 시작되었는데요 ,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심사의 결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걸작들 가운데 최종 두 점이 남게 되었는데 , 바로 당시 최고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던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였습니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두 작품은 완벽하고 탁월했습니다. 두 작품은 주제의 해석부터 차이가 있었는데요 , 먼저 기베르티의 작품은 제단 위에 이삭을 아브라함이 잡고 칼을 들이대고 있는 장면을 표현하여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자세가 사태의 긴박함을 나타내기보다는 모든 조각의 기교를 동원하여 고대의 정교한 조각같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데 치중되어 있는데요 ,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어린 이삭은 허약한 아이의 육체로 , 아브라함은 할아버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세도 브라함이 이삭을 급히 찌르기 위해 격한 동작을 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을 막는 천사도 우아하게 하늘에 떠있는 것이 아닌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손을 황급히 잡는 극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결국 작품의 우열을 가리지 못한 심사위원단은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에게 합동 제작을 권유하였는데요. 브루넬레스키는 두 사람의 작업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공동 제작이 불가능하다며 자진 사퇴하였고 , 결국 기베르티에게 기회가 돌아갔습니다.

 

현상공모에서 선정된 기베르티는 1403 년 세례당 동쪽 문에 스물여덟 개의 부조를 만드는 계약에 서명하였는데요 , 본래 계약 기간은 9 년이었지만 작품이 완성된 것은 1424 년으로 작업을 시작한지 21 년 만이었습니다 . 두 짝으로 된 문의 각 짝마다 열네 개씩 총 스물 여덟 개의 판을 완성하였는데 그 중 스무 개는 예수의 삶이고 네 개는 복음서의 사도들 , 나머지 네 개는 위대한 교부들의 이야기로 구성하였습니다 . 첫 번째 문을 완성한 이후 기베르티는 세례당의 다른 문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는데요 . 바로 이 문이 이후 〈 천국의 문 〉 으로 불리게 되는 작품 입니다 . 첫 번째 문의 작업 성공에 힘입어 자율적인 권한을 갖게 된 기베르티는 이전 작업과 다른 형태와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 네 엽 장식의 패널 스물 여덟 개가 아니라 큰 직사각형 패널 열 개로 하나하나를 크게 제작한 것이었는데요 , 화면이 커지게 되니 표현도 더 자유로워졌고 원근법도 더욱 확연히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문은 청동에 금도금을 한 작품인데요 , 어렸을 적부터 기베르티가 갈고닦았던 정교한 금세공기술이 더해져 탄생한 아름답고 거대한 황금색의 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을 일으켰습니다.

 

기베르티가 조각했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모든 청동문은 1452 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는데요 , 기베르티는 작품을 완성한 뒤 불과 3 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기베르티가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만든 천국의 문 은 작품을 본 미켈란젤로가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 있고 싶다고 표현하면서 이 문은 여기 있을게 아니라 천국의 문으로 써야 한다고 칭송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천국의 문을 보고 있으면 천국의 문을 두드렸던 위대한 예술가 기베르티의 혼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천국의 문의 재료 청동

 기베르티가 천국의 문을 제작하였을 당시 사용한 재료는 바로 청동이었습니다. 청동은 다른 금속에 비해 부드러운 성질 때문에 많은 조각가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 지금부터 예술가의 손길을 허용한 부드러운 금속, 청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동은 인류가 처음 사용한 합금으로 선사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구리에 주석을 혼합하여 탄생하였습니다. 한 가지 원소로만 이루어진 대표적인 홑원소 물질인 구리는 전성과 연성을 띄며 부식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 특유의 유연성 탓에 강도가 약한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석을 혼합하여 청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합금인 청동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며 자료마다 차이가 있는데요 , BC3000 년대 후반에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당시 청동은 수렵의 도구와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다가 이후 전쟁 무기와 거울 등으로 활용의 폭이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청동은 녹이 슬지 않고 조각을 하기에 적당한 무르며 충분한 강도를 가지고 있는데요 , 색 또한 아름다워 예술가들로부터 금속조각의 재료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청동에 주석의 비율이 3% 일 때까지는 구리의 붉은 기가 남아 있지만 비율이 높아질수록 점차 황색으로 변하고 주석의 함유량이 20% 가 넘으면 회청색이 되는데요 , 예를 들어 놋쇠는 사전에 황동으로 나타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놋그릇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주석의 함량이 적으면 청동도 노란빛을 띠기 때문에 황동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청동의 주 재료인 주석과 황동을 만들 때 사용되는 아연에 대해 알아볼까요? 주석과 아연은 철의 녹을 방지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철에 주석을 코팅한 것이 바로 양철인데요 , 양철은 테네시윌리엄스의 소설 제목 『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 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로 tin이라고 합니다. 철에 아연을 코팅한 것은 함석이라고 하는데요 ,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함석으로 중국집의 철가방이 있습니다. 아연은 철보다 산화성이 커서 녹 방지에 효과적인데요 , 이러한 이유로 함석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 이처럼 청동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금속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청동은 예술가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현란한 빛을 투영하면서 마치 프리즘처럼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었으며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손길을 허용하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져 수려한 예술품으로의 변신이 가능했는데요. 이러한 청동의 위대함에 기베르티의 예술성이 더해져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천국의 문 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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