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ART-조토 디 본도네, 르네상스, 생애와 작품

반응형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7~1337) 생애

 

어느 날 한 화가가 피렌체 근방의 시골 마을을 여행하다가 바위에 양을 그리고 있는 목동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본 화가는 소년의 재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소년에게 자기와 함께 살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아버지가 허락하신다면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화가는 마을 대장장이인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을 화가로 키우라고 설득했고 마침내 그 소년을 자신의 공방으로 데려가 도제로 삼았습니다. 이야기 속 화가는 당시 피렌체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이며, 공방으로 데려온 소년은 바로 조토 디 본도네입니다.

조토는 1260년경 피렌체 외각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피렌체의 거장 화가 치마부에의 문하생으로 있었습니다. 치마부에의 화실에서 조토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실물과 닮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조토의 천부적인 재능과 삶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날 치마부에가 외출한 사이 조토는 스승이 그린 인물화의 코에 파리를 그려 넣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치마부에는 그림 위 파리를 보고 실제로 착각하여 쫓아내려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일화로는, 교황 보니파키우스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위한 그림을 원하여, 조토의 인품과 실력을 떠 보기 위해 신하를 보냈습니다. 신하는 조토에게 교황에게 보낼 간단한 소묘를 부탁하였습니다. 조토는 자신의 한쪽 팔을 컴퍼스처럼 고정시킨 후 단 한번 손을 움직여 원은 그렸습니다. 아무런 도구 없이 정확한 원을 그린 조토의 재능은 교황의 감탄을 사게 되었는데요. 바로 여기에서 조잡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너는 조토의 원보다 더 둥글구나라는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조토의 이라는 말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이후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 조토의 명예를 후대와 고향 너머로 알린 데에는 피렌체의 문학 작품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조토는 당시 작가였던 단테와도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요. 아마 그의 화풍에는 단테와 같은 위대한 문인과의 교분과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테는 조토가 활동하던 시기에 쓴 책 『신곡』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여, 허영심에 가득 찬 오호 인간 능력의 영광의 덧없음이/
월계관이 푸르게 머무는 시간은 얼마나 짧단 말인가/
무디어진 세대에 이어지지 않는 한/
후대에서 긍휼을 찾지 못한다면! /
봉우리 위의 푸름이 어이 잠시만 머무는고/
회화에서 치마부에가 차지한 줄 /
믿었다가도 어느덧 조토가 명성을 떨치게 되고 /
이리하여 저이의 이름은 흐려졌나니라.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조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조토는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는 천재였다. 첨필펜, 혹은 붓을 사용해서 그린 자연의 모습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서 재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의 그림을 수차례 보고 있노라면 눈이 속을 정도였는데, 그려진 어떤 것이 마치 실제 그 대상인 양 보였다. 조토는 도제에 있을 당시 스승인 치마부에의 화풍을 따라가지 않았는데요. 창조력이 아주 풍부하고 뛰어났었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흔히 조토를 근대회화의 아버지, 르네상스 미술을 연 위대한 화가라고 부르는데요. 이것은 조토를 기준으로 고대회화와 근대회화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조토를 기준으로 고대회화와 근대회화를 나누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토의 스승인 치마부에의 천사와 예언자와 있는 옥좌의 마리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조토의 옥좌의 마리아입니다. 두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거의 같으며, 두 작가가 활동한 시기는 중세 고딕 시기입니다. 그러나 두 그림은 전혀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치마부에의 그림은 경건함과 웅장함을 잘 표현하였고 사실주의적 묘사가 뛰어납니다. 이에 비해 조토의 그림은 세심한 묘사가 상당히 억제되고 입체감과 중량감을 보여주는데요. 치마부에의 그림에서는 모든 사물과 인물들이 얇은 종잇장 처럼 겹쳐져 있는 반면, 조토의 그림에서는 마치 옷 속에 감춰진 사람들의 몸이 드러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대상과 뒤에 있는 대상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이 있어 원근법이 느껴지는데요.
말하자면 치마부에의 그림은2차원적 선을 표현하는데 반해 조토의 그림은 3차원적으로 질량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조토의 그림에서는 인물의 세밀한 묘사는 생략되었지만 표정만큼은 더욱 인간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그림에 처음으로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했기 때문에 조토를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차원적 사실 묘사는 고대미술과 근대미술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기에 고대 중세 미술의 끝도 조토이며, 근데 르네상스미술의 시작도 조토라고 하는 것입니다.
 

작품활동동

조토가 정확히 어떤 작품을 언제 그렸는지에 대한 증거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조토의 작품이자, 제작 시기가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바로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벽화입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에는 조토의 프레스코 작품들이 가득 차 있어 마치 그의 개인 미술관 같이 보입니다. 이 예배당에 그려진 다양한 종교적 에피소드들은 특유의 인물 표현으로 모두 조토가 그린 것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요.
 
조토는 단순히 정형화된 종교적 도상을 차용하기보다는, 설득력 있는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 기존의 비잔틴적 요소에 새로운 자연주의적 양식을 결합시켰습니다. 프레스코 속 인물들은 기쁨슬픔, 분노 등 다양한 내적 감정에 빠져 있습니다. 조토는 인물들의 행동 원인과 인간다움을 관람자가 명확하게 느낄 수 있게 표현해 냈습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교회답게 제단에는 성모자상이 제단 입구 아치에는 예수를 그린 패널화가 수태고지 장면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전체 38개의 구획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야기는 남쪽벽 위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진행되어 북쪽벽 아래 오른쪽에서 끝이 납니다. 장면 사이사이의 장식 띠와 천장에는 예수, 성모자 구약 시대의 인물들을 비롯한 성인 얼굴 33점이 그려져 있으며, 대리석 무늬 그림 사이에 단조로 그려진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 7쌍이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출입문이 있는 서쪽벽 전체는 최후의 심판 장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 내부에 그려진 조토의 그림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습니다. 프레스코는 젖은 석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에 갠 안료를 석회에 스며들게 하여 그림을 완성하는 기법입니다. 안료가 석회 속에 깊이 스며들기 때문에 겉면이 손상을 받아도 비교적 원형대로 몇 천 년 동안 보존되는 장점이 있으나, 많은 안료가 석회나 탄산가스의 염기 성분에 반응하여 변 퇴색이 일어나는 단점도 있습니다. 프레스코는 기원전 수 천년 전부터 14세기에 템페라와 유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는데, 조토는 이 기법을 교회의 벽화 전체에 적용했습니다.
조토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옷은 전통적으로 경건함을 나타내는 파란색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그림에는 파란색이 조금 남아있으나 거의 벗겨졌다고 할 수 있는데요. 프레스코는 벗겨지지 않는데,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는 조토가 이곳을 프레스코로 칠하지 않고 템페라 기법으로 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토는 왜 이 부분만 템페라를 썼을까요? 템페라는 색상이 선명하고 붓질이 쉽다는 장점이 있으나, 접착을 위하여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개어서 사용하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벗겨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조토는 하늘의 파란색과 달리 마리아 옷의 파란색을 더욱 선명하고 천상의 광택을 가진 최고의 파란색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프레스코는 석고가 마른 뒤에는 색이 뿌옇고 광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옷 부분에만 템페라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석 회벽과 불충분한 접착력으로 인하여 안료가 거의 떨어져 버렸습니다.


조토 그림에서도 조토가 얼마나 입체적 표현에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토는 관념적인 상징만으로 도상적 회화를 그리던 당시의 화가들과는 달리 자연적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모델들의 감정을 실제로 살아 있듯이 표현하였습니다. 조토 작품에서는 이전의 그림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살아 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볼 수 있습니다. 조토는 그림 속의 인물들과 소품을 모두 직접 관찰하여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모델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며, 심지어 마구간의 지붕도 탁자를 직접 보고 그렸습니다. 다만 낙타는 조토가 직접 보 지는 못하고 각 부분마다 다른 모델을 보고 그런 듯합니다. 낙타의 눈이 사람의 눈과 같고 푸른색이기 때문입니다. 낙타의 발굽은 원래 셋이고 넓적한데, 그림에서는 말발굽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는 당나귀, 주둥이는 말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낙타가 실제와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각 부분은 철저히 실재하는 모델을 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조토와 경험적 실증주의 연관성

조토(Giotto)는 유럽 우주국(ESA)에서 만든 혜성 탐사선입니다. 그런데 왜 핼리 혜성 탐사선의 이름이 조토가 되었을까요?
14세기 초에 조토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 지금의 이라크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방에서 천문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따라와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표하는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핼리 혜성을 탐사하는 우주선 조토가 발사되었습니다. 화가와 우주선의 이름이 같은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아니면 이 그림과 우주선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동방박사의 경배가 그려지기 전인 1301년에 약 76년마다 지구에 나타나는 핼리 혜성이 모습을 나타 냈습니다. 조토는 바로 이 핼리 혜성을 관찰한 바를 그림에 나타낸 것입니다.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의 핼리 혜성의 모습과 조토가 그림 혜성이 너무도 똑같습니다. 당시에는 철학적으로 기독교 사상 이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학적으로는 연금술이 각광받던 시 기였습니다. 서양에서 형상을 실체화하는 연금술 이론은 라부아지에의 실험적 원소개념이 확립되기까 지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습니다. 룰루스라는 스페인 연금술사는 값이 싼 다른 금속을 합성하여 금이 되게 하는 현자의 돌을 찾아온 유럽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영국에 건너가 자신의 비법으로 500만 파운드의 금을 만드는 사기극으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하였습니다. 예술가 조토는 근대과학의 개념과도 일치하는 사실주의의 신념을 가진 천재였습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 근대화학을 연 라부아지에, 그리고 근대회화를 연 조토 시대는 이삼백 년씩 차이가 나지만 그 원리는 대체로 경험적 실증주의로의 전이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또한 직관을 표현하는 미술이 가장 먼저, 완전한 증거를 토대로 하는 과학이 가장 나중에 꽃을 피운 것도 눈여겨볼 일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