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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터너, 풍경화가,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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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생애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서는 1984부터 매년 뛰어난 활동을 한 젊은 미술가를 선정하여 영국 최고의 미술상인 ' 터너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이 터너상은 영국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이름에서 차용된 것입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오랫동안 뛰어난 창작력을 발휘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60년 이상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고, 19,000점이 넘는 드로잉과 채색 스케치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작품의 주제 또한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문학사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를 터너는 미술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평을 들을 만큼 터너는 풍부한 예술적 성과를 이룩한 영국의 화가로 남아 있습니다.

터너는 1785년 4월 23일에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이자 가발 제조업자였고, 어머니는 푸주한의 딸이었는데 훗날 정신병으로 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터너는 1785년부터 옥스퍼드 근처 시골에 있는 숙부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영국 자연의 아름다움과 목가적인 정경에 매료되어 풍경을 스케치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 습관은 그의 일생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마침내 1789년, 14살의 터너는 자연을 사생한 옥스퍼드 스케치북을 만들었습니다. 터너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터너의 아버지는 어린 터너가 그린 드로잉을 자신의 가게에 걸어두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터너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많은 건축가들이 터너에게 드로잉을 주문하였는데요. 그들은 터너에게 주로 원근법적 조망을 통해 건물을 그리거나 주위에 적절한 배경을 그린 다음 채색하는 작업을 맡겼습니다. 그 결과 터너는 1789년에 당시 유명한 건축 제도사였던 토마스 밀턴의 도제생이 되었고, 이때 정확한 원근법의 묘사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터너는 왕립 아카데미의 수습생으로 입학하여 수채화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0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연례 전시회에 수채화 〈대주교의 궁전〉을 처음으로 출품하였습니다. 이후 터너는 60여 년 동안 영국 미술계의 중요한 행사인 왕립 아카데미의 거의 모든 전시회에 출품하였습니다.

터너는 1794년에 재능 있는 젊은이를 발굴하여 후원하고 있던 정신과 의사 토머스 먼로 밑에서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수채화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먼로는 터너에게 당시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영국의 풍경화가 리처드 윌슨과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베르네의 작품을 모사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통해 터너는 풍경화에 관심을 갖고 풍경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터너는 1796년에 수채화 10점과 함께 첫 유화작품인 〈바다의 어부〉를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하였습니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파도가 이는 바다 위로 어선이 떠 있는 풍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빛과 어둠에 대한 터너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그림은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회화적인 표현기법에 대한 관심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작품활동

〈바다의 어부〉를 통해 젊은 나이에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학교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터너는 성공한 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나갔습니다. 왕립 아카데미의 전시회에서 다른 화가들이 수많은 작품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여타의 화가들과는 달리 터너는 자택에 마련된 넓은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터너는 그곳을 자신의 작품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밀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다 쉽게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터너는 1799년에 클로드 로랭의 그림을 보았는데, 특히 〈시바 여왕의 승선〉을 보고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밝고 화려한 색채, 부드러운 그림자, 강조된 빛의 효과, 화면에 가득 퍼진 태양은 로랭이 즐겨 그린 것으로, 터너는 이 모든 것이 비길 데 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캔버스 위에 화사한 빛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 로랭의 그림은 장차 터너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훗날 터너는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여왕〉을 로랭의 〈시바여왕의 승선〉과 나란히 건다는 조건으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하였는데요. 로랭의 회화양식이 터너에게 얼마나 큰 경외감을 주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터너는 1799년, 22살의 나이로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으며, 3년 후인 1802년에는 고대하던 정회원으로 선출되어 후원자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07년에는 예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왕립 아카데미에 원근법 교수로 취임해 1837년까지 약 30년을 근무하였습니다. 건축 제도사로 시작하여 이처럼 성공을 거둔 경우는 터너가 처음이었습니다. 〈링컨 대성당〉과 같은 초기작에서 볼 수 있는 정확한 원근법과 17살 때 그린 채색 드로잉 〈판테온, 화재 후의 아침〉에 표현된 뛰어난 사실주의는 이미 그 형태와 음영, 개성 있는 묘사 등에서 터너의 숙달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행 풍경을 화폭에 담다

터너는 미술사상 가장 많은 여행을 한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대륙을 여러 차례 돌아다니며 200권 이상의 스케치북과 19,000점이라는 방대한 데생을 남겼습니다.

터너는 자신의 그림 속에 담을 소재를 찾기 위하여 자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1791년 여름에 브리스틀 등지로 최초의 스케치 여행을 떠났습니다. 〈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는 이 스케치 여행의 결과물로, 비록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려졌지만 터너의 초기 걸작으로 꼽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회색 계열의 색을 주로 사용하여 반투명한 색조로 마치 베일이 씌워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이 작품은 중세시대에 수도원이자 교회로 사용되었던 맘스베리 수도원에 있는 베네딕트 교회의 폐허를 담고 있습니다. 676년에 건립된 맘스베리 수도원은 1539년에 헨리 8세에 의해 수도원이 먼저 철거되었고 남은 건축물들은 이후 몇 세기에 걸쳐 황폐화되었습니다. 작품 속에 울타리와 임시 거처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교회의 남쪽 날개 부분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방치된 채 버려진 오래된 건축물의 폐허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당시의 낭만주의적 감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터너는 그 후 매년 여름마다 잉글랜드 북부지방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산맥과 폭포, 협곡 등 자연의 거대한 형태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름에는 여행을 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겨울에는 자택으로 돌아와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잉글랜드 북부지방의 호수 정경을 그린 〈버터미어 호수, 소나기〉는 소나기가 지나간 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눈부신 햇살과 그늘진 수면의 어두운 부분이 명암의 대조를 이루며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서 중심부로 박힌 무지개는 화면을 밝고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으며, 호수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는 비 온 후의 정적을 깨고 있습니다. 호수 지대의 독특한 정취를 아낌없이 그려낸 이 그림은 경화가로서 터너의 잠재능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터너가 그린 풍경수채화는 발표되자마자 큰 인기를 일으키며 팔려 나갔는데요. 이러한 풍경수채화를 통해 터너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과 경제적 성공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1802년,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양국의 긴장완화를 협정하는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어 자유로운 유럽여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영국의 예술가들이 유럽대륙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터너는 스위스의 풍경을 직접 보기 위해 1802년 생전 처음으로 도버 해협을 건너 유럽대륙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터너가 칼레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일기가 불순하여 물결이 거칠어지고 상륙이 힘겨워졌습니다. 이 정경을 재빨리 스케치한 터너는 이를 토대로 〈칼레 부두〉를 완성하여 왕립 아카데미에 출품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난파선〉과 함께 터너의 초기 바다 풍경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하늘의 좌우에 있는 검은 구름과 그 사이에 드러난 하늘의 밝은 색,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그 가운데 흰 돛 등이 완벽한 구성을 이루며 빛과 어둠을 매우 선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터너는 특히 바다 풍경화를 그릴 때 역사적인 사건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묘사 하려고 노력하였는데요. 당시 영국인들은 이러한 그림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터너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자연풍경을 체험한 후 돌아오는 길에는 프랑스 파리에 들러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정복활동으로 루브르 박물관에는 소장품이 크게 늘어 희귀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요. 터너는 티치아노, 램브란트, 살바토르 로사의 작품을 보며 이들의 색채를 면밀히 연구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양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명암법과 색채의 사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또한 파리에서 터너는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의 고전주제적인 풍경화에 이끌려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아 고전적 풍경화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터너는 삼십 대 중반까지 여러 거장의 양식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선배 거장들에 대한 예술적 공감과 창조적 변형을 통해 터너는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터너는 다양한 양식을 모방하여 예술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갔지만 그것이 자신만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모방과 훈련을 통해서 그는 매우 차별화된 표현기법을 고안해 냈으며 원하면 언제든 다양한 표현기법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터너는 매우 기민하고 재빠른 표현 기법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1804년 4월 15일에 터너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자택을 뜯어고쳐 자신의 화랑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유명한 예술가로서 많은 그림을 주문받으며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해 나갔습니다. 터너는 1807년에 왕립 아카데미에 원근법 교수로 취임하였고, 4년 후인 1811년에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내용에는 원근법뿐만 아니라 공간재현에 필요한 모든 과제가 포함되었습니다. 터너는 강의에서 그림의 배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의는 매우 이론적이고 난해하여 학생들이 보여주었던 초기의 호응은 곧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은 터너의 아버지와 터너가 특별히 제작한 삽화를 이해하는 몇몇 전문 가뿐이었습니다. 결국 아카데미 교수로 부임한 기간 동안 그의 강의는 단 10여 회에 불과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시작하기 몇 해 전부터 터너는 강의교재를 준비했는데, 『리베르 스튜디오룸』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리베르 스튜디오룸'이란 제목은 클로드 로랭의 화집인 『리베르 베리타티스』 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터너는 『리베르 스튜디오룸』에 수록된 100여 장의 삽화를 통해 다양한 풍경화 유형을 예시하고 각각의 가능성과 필요조건을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터너는 이전에 그린 작품을 이용하여 이 책에 수록될 삽화를 제작하였고, 판화가들이 이것을 판화로 옮겼는데요. 이 중에서 〈난파선〉을 판화로 옮긴 작품이 특히 잘 팔렸습니다. 런던시의 정경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런던〉은 전형적인 건축 풍경화로, 이미 터너가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전망에 풍부한 세부묘사를 곁들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넓은 조망을 전체적으로 포착하려는 파노라마 기법은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터너 역시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이 기법을 연구하였습니다. 도시풍경의 대표적인 특징인 건물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을 선택한 터너는 깊은 공간감과 넓은 대기의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세부사항에 집중하여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는 전경에 왕궁을 배치하고 원경의 강기슭을 전경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구름, 안개,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등을 매우 세심하게 그렸습니다. 중요한 요소는 원경으로 처리하여 개략적인 묘사로 관람자들이 세부적인 내용을 유추하도록 남겨두었습니다. 매우 자세하게 묘사한 왕궁보다도 섬세한 붓놀림으로 처리한 배경은 완전한 드로잉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매우 구체적인 인상을 줍니다. 특히 뿌연 대기는 지붕과 교회의 뾰족탑, 돔, 다리, 배의 돛 등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효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는 의도적으로 세부묘사를 흐리기 위한 수법으로 보이는데요. 즉, 이 작품에서 뿌연 대기는 전경의 정밀한 세부묘사와는 상반된 특징으로 후경을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색채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색채사용은 터너의 후기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1812년, 터너는 자신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는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군대〉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군대를 인솔하여 알프스를 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계곡 아래로 풍경이 펼쳐지고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이 그림의 오른쪽과 가운데에 솟아 있습니다. 역광의 짙은 구름 아래로 눈발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면서 화면을 어둡게 뒤덮고 있습니다. 카르타코인의 행렬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끝으로 이어져 있고, 바로 앞의 전경에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향해 칼을 치켜든 병사가 있고 한 남자가 이를 막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기진하여 쓰러졌거나 웅크리고 있습니다.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군대〉에서 그림의 왼쪽 아래에서 시작된 어둠은 오른쪽 3분의 1 지점에서 위로 상승하며 그림의 왼쪽 위까지 연결되면서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커다란 요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넓고 검은 띠가 화면 중앙 부분에서 크게 반원형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며 흩어지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은 그 자체가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빛과 색채에 대한 탐구

터너는 1819년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시기에 떠난 이 여행은 그에게 풍경화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터너는 이탈리아에서 고대문명의 역사적 유적으로 가득 찬 풍경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밀라노와 베니스를 거쳐 로마로 온 터너는 그곳에 서 2개월간 머물면서 1,500장이 넘는 방대한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다음 해 4월에 영국으로 돌아와 그 성과를 왕립 아카데미에 발표했는데 그 최초의 작품이 바로 〈바티칸에서 본 로마〉입니다.

이 작품은 베루니 광장과 로마 시내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바티칸 궁의 라파엘로 화랑에서 라파엘로와 그의 연인 라포르나리나가 작품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터너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적 고증에 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사적인 일화에 비중을 두고 저녁햇살이 빛나는 건축물들이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그린 후 그 앞에 인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중앙에는 라파엘로의 〈의자의 성모〉가 보이는데요. 그림 속에 있는 그림이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이후에도 터너는 계속해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풍경화를 제작하였는데, 점점 구도가 단순해지고 빛의 섬세한 색채변화를 탐색해 나갔습니다. 그는 1819년 이탈리아 여행 시 처음으로 베니스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총 세 번에 걸쳐 베니스를 여행하며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작으로 그렸는데, 이 연작들은 대기 중에 빛이 만들어내는 효과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터너가 만년에 그린 베니스 연작을 살펴보면 초기 베니스 연작에서 보이는 배경에 있는 인물과 건물의 상세한 묘사가 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가 만년에 그린 베니스 연작 중 하나인 〈출범하는 베니스의 태양호〉을 보면, ‘베니스의 태양이라고 쓰인 큰 돛을 올리고 바다를 향해 항해하는 범선의 뒷모습을 화면의 중앙에 놓고 그 외에는 물과 하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니스 여행을 통해 터너는 완전히 빛의 포로가 되고 빛의 미묘한 진동을 계속해서 그려나갔습니다. 이 밖에도 터너의 베니스 연작은 만년으로 갈수록 그림 속 모든 것이 자유롭게 출렁이는 색채의 그물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습니다. 개별적인 색채를 구별해 내기가 매우 어려우며, 색채의 짜임 자체가 역동적인 빛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이러한 색채구조에서 대상을 식별해 내는 것은 순전히 관람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태여 특정한 대상의 재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기 중에 나타나는 색채의 상호작용이 회화적으로 가시화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와 같이 터너는 빛과 대기를 주제로 하여 그만의 화려하고 풍부한 색감으로 추상에 가까운 독자적인 그림을 펼쳐 보였는데요. 그의 작품은 점점 세부묘사가 생략되었고 덩어리의 형태와 색채로 묘사하는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한편, 터너는 1827년부터 펫워스에 있는 영국 최대의 귀족이며 대수 집가인 에그리몬트 백작의 저택을 종종 방문했는데요. 이 저택에는 터너 외에도 화가 컨스터블과 헤이든, 조각가 프락스만 등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였습니다. 1929년에 자신과 각별한 사이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여 실의에 빠진 터너는 이때부터 1837년까 지 에그리몬트 백작의 저택을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펫워스의 음악회〉는 터너가 펫워스에 머무를 때 그린 유화작품입니다. 에그리몬트 백작의 가족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작업실까지 제공받은 터너는 이 친밀한 분위기를 모티브로 하여 이 그림을 제작하였습니다. 이제까지 터너의 중심화제는 풍경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에 휘말려든 인물의 모습이었으나 펫워스에 오면서부터는 넓은 거실이나 침실, 갤러리 등이 그대로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실내 또는 생활의 정경을 그린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자유로운 필치가 거실 내부의 한 단면을 불타오르듯 따뜻한 색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를 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그 주변의 백색 드레스의 대비는 주위의 색채효과를 한층 더 드높이고 있습니다.

1834년 10월 16일 밤, 런던의 국회의사당에 커다란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소방대원이 동원되었지만 불은 건물 전체로 활활 타올랐습니다. 터너는 스케치북을 들고 직접 템스강에 배를 띄워 야간에 일어난 국회의사당의 화재를 관찰하였고, 이를 서둘러 수채물감으로 그렸습니다. 터너의 스케치북을 보면 물감이채 마르기도 전에 다음 그림을 그려서 앞장 그림의 뒷면에 뒷장 그림의 물감이 묻어 있는데, 그가 얼마나 서둘러 많은 스케치를 했는가에 대해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스케치를 토대로 하여 터너는 이듬해에 2점의 유화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그의 작품 속에는 불을 주제로 한 작품이 곧잘 그려지곤 하였습니다. 화면 왼쪽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붉은 불길은 오른쪽 다리 위로 뻗어나가고, 그 뒤로 회백색 연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왼쪽에 뜨겁게 솟아오르는 화재의 열기가 오른쪽 흰 석조 다리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고, 너울거리며 솟아오르는 붉은 불길은 검은 연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경에 군중이 무리 지어 모여 있고, 일부는 다리 위에서 불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다리 아래에 있는 강 위에는 간략하게 형태만 암시된 배들이 떠 있습니다. 터너는 이 그림에서 세부적인 묘사를 극히 일부에서만 나타내고 있는데요. 화재를 구경하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 가로등, 뱃머리 등 그림에 묘사된 인물과 사물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터너는 그림 전체에서 세부묘사를 식별하는 것을 관람자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터너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필수요소인 빛을 묘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느 작품을 살펴보아도 언제나 빛을 묘사하려는 노력,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기 중에 나타나는 빛의 효과를 묘사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괴테의 『색채론』을 면밀히 연구하였습니다. 『색채론』은 괴테가 빛과 색채가 물리적 심리적 미학적 조건과 상호작용을 이룬다는 점을 정리한 유일한 연구였습니다. 색채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괴테의 이론은 터너의 창작과 유사한 정신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으며, 터너는 괴테의 이론을 통해 색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터너는 70세가 되던 1845년 유럽미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뮌헨을 문 했다가 곧 귀향하여 그 해 7월에 왕립 아카데미 원장 대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9월부터 10월까지 프랑스를 방문하였는데, 점점 악화되는 건강으로 인해 이 여행이 그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었습니다. 1848년에는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터너의 작품전이 열렸고, 1850년에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마지막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1851년 12월 19일, 76세의 일기로 터너는 첼시에 있는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세인트 폴 성당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생전에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긴 터너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전부 국가에 기증하였습니다. 현재 그의 작품들은 영국의 20세기 이전의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는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데요.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는 터너를 위한 전시실이 11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국립 미술관에서 한 작가를 위한 11개의 방을 설치하는 것은 터너의 업적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사용되는 모든 지폐 앞면에는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이 실려 있지만, 뒷면엔 다양한 인물의 얼굴이 실려 있습니다. 영국은 역사적인 인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주기적으로 지폐 뒷면의 인물을 바꾸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현재 20파운드 지폐에는 고전주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초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시민들의 추천을 받아 오는 2020년부터 통용될 20파운드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결정하였는데요. 바로 영국인이 사랑한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가 선정되었습니다. 영란은행은 오는 새로운 20파운드 지폐에 터너의 초상화와 그의 작품 〈해체를 위해 예인 된 전함 테메레르〉를 실을 예정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는 터너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오늘까지 여전하다. 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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