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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RT-잭슨 폴록, 추상표현주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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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생애

1940년대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큰 성공을 거둔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 잭슨 폴록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미국 화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폴록은 바닥에 놓인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리는 독특한 기법으로 유명해졌으며, 이로 인해 ‘물감 뿌리는 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미국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다섯 형제 가운 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 이주민이었던 폴록의 부모님은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생활하였습니다. 폴록의 부모님은 농사를 비롯해서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때문에 폴록의 가족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며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급기야 폴록이 여덟 살 때 인 1920년에는 아버지가 아예 집을 나가 버립니다. 좀처럼 친구를 사 귈 수 없었고, 어딜 가나 외톨이 신세였던 폴록은 열다섯 살부터 술을 마시게 됩니다. 어린 시절 폴록에게는 일반적인 위대한 미술가들의 어린 시절과 같은 미술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폴록의 큰형인 찰스에게서 미술적 재능이 보였는데요. 찰스는 1922년에 로스에인절레 시에 있는 오티스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찰스가 집으로 보내 준 미술 잡지들을 보면서 폴록과 넷째 형 샌포드는 현대 유럽의 미 술 세계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이들은 미술가의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폴록 역시 1928년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매뉴얼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매뉴얼 고등학교에서 폴록은 훗날 추상표현주의 화가가 되는 필립 거스턴과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폴록과 거스턴은 학교가 미술보다 체육을 강조하자 이 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는데요. 이 사건으로 둘 다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고, 폴록은 1년 뒤 다시 복학하였지만 교사와의 다툼으로 다시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폴록은 1930년 9월, 형을 따라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폴록의 형 찰스는 1926년부터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폴록도 찰스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여 미국 풍속화파의 선두자 토머스 하트 벤턴에게서 드로잉과 회화, 구성을 배우게 됩니다. 벤턴은 학생들에게 그림의 기본 구조를 보는 법을 가르쳤는데, 폴록은 이때 비로 소 구성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벤턴은 유화 물감을 두껍고 빠르게 바르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미국 역사와 관련된 것 들, 즉 카우보이, 포장마차, 술집, 광산 갱도, 거친 자연풍경 등을 고스란히 기록해 두고자 했습니다. 이 런 주제들은 당시 대공황시절을 힘겹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벤턴은 폴록의 재능을 높이 사 폴록을 매우 아꼈으며, 학교 밖에서도 폴록과 자주 만났습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벤턴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함께 식사를 했으며, 자신의 별장에도 자주 데리 고 갔습니다. 폴록은 타고난 미술가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하루에 마시는 술의 양을 5분의 1로 줄이라는 것뿐이었다.

폴록은 1936년 봄에 멕시코의 벽화 화가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을 하였 습니다. 이 무렵 시케이로스는 뉴욕 노동절 기념 행진에 쓸 공산주의 포스터와 무대 차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폴록은 시케이로스를 포함한 멕시코 미술가들의 작업 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요. 시 케이로스는 화염 방사기와 분무기를 비롯해서 시멘트나 자동차 페인트 같은 산업용품까지도 재료로 활 용하였으며, 물감을 줄줄 흘리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폴록은 이곳에서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품활동

물감 뿌리는 잭

1932년에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가 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건설 사업이나 예술 부문의 공공사업을 펼치는 뉴딜 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1935년부터 1942년까지 폴록은 뉴딜 정책의 일부로 실행된 공공사 업진흥국 연방미술사업계획에 화가로 고용되었습니다. 당시 폴록의 작 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주제에 기초한 풍경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는데요.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인 코디를 여행하고 그곳 의 사진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폴록은 한 달에 한 편씩 그림을 완성하기로 약속하고 공공사업진흥국으로부터 일주일에 23달러 50센트를 받았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몇몇 작품이 퇴짜를 맞자 상심이 커져 계속해서 술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폴록은 작품 제출 마감을 어기기 일쑤였고, 결국 공공사업진흥국에서 해고됩니다. 1938년 6월에 폴록은 블루밍데일 정신병원에 넉 달 동안 입원하여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퇴원한 후에는 조셉 헨더슨 박사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합니다. 헨더슨은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이론을 따랐는데, 융은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집단 무의식’이 숨어있으며, 이러한 무의식이 정신의 토대를 이 룬다고 보았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기감정을 잘 털 어놓지 못한 폴록에게 헨더슨은 상담시간에 이야기할 거리를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그의 그림을 정신분석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하 지만 폴록은 융 사상에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상담을 주도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나중에 헨더슨은 자신이 환자 치료에 실 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폴록은 상담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술을 마셨지만, 그림은 계속해 서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공공사업진흥국에서는 다시 폴록을 불 러들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는 〈칼을 들고 있는 벌거벗 은 남자>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폴록이 존경했던 멕시코 화가 호 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의 강렬한 벽화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폴록은 ‘탄생과 죽음’ 같은 보편적 주제에 심취했습니다. 1941년 작품은 〈탄생>은 격렬한 출생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원형들이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위아래가 뒤집힌 얼굴은 아마도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아기인 것 같습니다.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에 여성의 넓은 둔부, 마티스풍으로 유연하게 구부러진 팔 같은 특징들로 어머니처럼 보이는 존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형태는 추상적인데도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어서 ‘모든 어머니는 거 인이다.’라는 폴록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유럽 미술과 미국 원주민 미술을 모두 차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는 눈코입은 피카소 작품에 나타나는 한데 뒤섞인 이목구비가 떠오릅니다. 한편 뻥 뚫린 원들과 치아들은 이누이트 족의 가면에 나오는 눈코입과 비슷합니다. 미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존 그레이엄은 원근법을 생략하고 강 렬한 가면 이미지를 담은 〈탄생>에 깊은 인상을 받고, 1942년에 맥 밀런 갤러리에서 자신이 기획한 ‘미국과 프랑스의 그림들’이라는 전 시회에 이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와 같은 유럽의 유명 화가들과 함께 잭슨 폴록, 리 크레이스너와 같은 미국의 신인 화가들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되었습니다. 리 크레이스 너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유대인 화가로, 개성적인 추 상 정물화의 세계를 열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폴록에 대한 궁금 증을 갖게 되어 그를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피카소를 좋아했고 고 융의 이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이들 의 관계는 점점 발전되었고,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크레이스 너는 1942년 가을에 뉴욕에 있는 폴록의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폴록은 크레이스 너를 통해서 초현실주의 미술가 로베르토 마타,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화가 한스 호프만 등 여러 예 술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타는 폴록을 페기 구겐하임에게 소개하는데요. 구겐하임은 부유 한 미술 수집가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런던과 파리에 살면서 수많은 현대 미술작품을 수집하였습니다. 22년 동안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1941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구겐하임은 1942년에 금세기 미술 화랑를 열고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을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원하였습니다.폴록은 〈속기 형상>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출품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구 겐하임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화가 몬드리안이 〈속기 형상>을 보고 ‘여 기서든 유럽에서든 실로 오랜만에 본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라고 하였고, 이 말에 설득당한 구겐하 임은 1943년 봄에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린 ‘젊은 작가들의 봄’ 전시회에 〈속기 형상>을 출품시켰습니다.‘속기사’는 글자를 빠르게 받아 적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언뜻 보면 이 그림은 속기 타자를 하는 여성의 두 손이 자판 위에서 엇갈리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스듬히 누운 누드화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아마도 작품의 제목 ‘속기 형상’이란 간략하게 그려진 작품 속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속기로 그린 듯 뭉뚱그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구겐하임은 더 나아가 폴록의 개인전을 열어줄 것을 약속하고, 자신의 미술관과 계약을 하여 다달 이 월급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의 방향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폴록은 피카소의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1943년 11월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린 폴록의 첫 번째 개인전은 피카소에 게서 받은 영향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특히 첫 번째 개인전의 중심 작품이기도 한 〈암늑대>는 피카소의 영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암늑대> 속 동물은 머리가 두 개이지만, 어느 쪽도 늑대의 머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황소의 머리로 보이는데, 이것은 피카소 그림들 속에 있는 황소와 비슷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버 팔로라고 불리는 미국 들소의 머리처럼 보입니다. 폴록은 “〈암늑대>는 내가 그렸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에 관해 작가로서 설명하려는 시 도는 오히려 작품을 파괴할 뿐이다.”라며 작품 속 늑대에 관해 구체 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폴록은 갖가지 색깔의 물감을 캔버스 표면에 흩뿌린 뒤 그 위에 회색 물감을 덧발라 늑대의 형체를 표현했습니다. 즉, 늑대를 둘러싸고 있는 회색 배경은 늑대의 형체가 그려진 뒤에 채색된 것입니다. 이는 왼쪽에 있는 머리 부분에 회색 물감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폴록은 회색 물감이 여기저기에서 늑대의 몸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원래 캔버스에 흩뿌려져 있던 다채로운 색채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붓질을 멈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눈에 잘 띄는 흰색은 작품의 시각적인 소란스러움을 지배하고 있는데, 늑대의 검은색 윤곽선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즉, 폴록은 관람자의 시 선이 형상의 윤곽을 훑는 것을 방지하려 했고,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암늑대>의 세부를 훑기 전에 전체 형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왼편과 오른편의 각기 다른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945년 10월, 폴록과 크레이스 너는 뉴욕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도시를 떠나 롱아일랜드 스프링스에서 목재로 지은 농가를 샀습니다. 배관시설이 없었고 난방도 잘 되지 않는 열 악한 환경의 집에서 둘은 아주 힘겹게 첫 번째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다음 해인 1946년, 폴록은 창고를 작업실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희미하게 빛나는 물질>은 폴록이 최초로 선보인 전 면 그림입니다. 전면 그림은 어떤 형상이 캔버스 전체를 어지럽게 뒤덮는 그림을 말하는데요. 위아래를 구분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고, 그림 전체에서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부분도 없습니다. 1947년부터 폴록은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데요. 이젤을 사 용하지 않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은 후 전통적인 유화 물감을 쓰 지 않고 가정용 페인트로 실험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묽은 액 상인 가정용 페인트를 캔버스 표면에 튀기고 똑똑 떨어뜨리고 부었습니다. 폴록은 미술 잡지 『가능성』에 자신의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해 이렇게 기고했습니다.

나는 이젤, 팔레트, 붓 등 화가들이 통상적으로 쓰는 도구에서 계속해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막대기, 모종삽, 칼, 또는 액상 페인트를 똑똑 떨어뜨리거나 모래와 깨진 유리와 기타 이물질을 더해 아주 두 텁게 칠하는 것을 선호한다.”잡지에 투고한 글에서 폴록은 ‘액상 페인트를 똑똑 떨어뜨리는 것’을 언급하는데요. 바로 이 ‘드립 페인팅’은 그를 대표하는 화법이 됩니 다. 폴록은 1947년에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 전시회에서 드 립 페인팅으로 제작한 그림들을 전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회의 반응은 냉담했고, 폴록의 그림도 한 점 밖에 팔리지 않았습니다. 평 론가들은 폴록의 새로운 기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1948년 가을, 『라이프』지는 일단의 저명한 사상가들을 불러 모아 현 대 미술의 장점에 대해 대담을 나누게 했는데요. 폴록의 〈대성당>이 토론의 초점이었습니다. 예일 대학의 한 교수는 이 작품을 두고 ‘넥타이용으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했으며, 대부분 빈정거림과 심술궂은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이들은 폴록의 작품을 진지하지 못하고 요란한 장식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만은 폴록을 옹호하며 그의 작품을 높이 평 가하였습니다.

 

 드높아진 명성과 비극적인 마지막 순간

한동안 폴록은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번호와 연도를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이름에는 특정한 의미 가 담겨 있지만 숫자는 중립적이므로 사람들이 그림만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 다. 번호 뒤에 ‘A’ 자가 들어간 것은 파슨스가 팔리지 않은 작품을 표시하기 위해 따로 덧붙인 것입니다. 1949년 1월,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폴록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리자 온갖 신문과 잡지에서 이를 보 도하였습니다. 이전에 『라이프』지에 실린 글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인데요. 앞서 폴록을 옹호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A번, 1948년> 같은 작 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과도 같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타임』지에 도 폴록의 작품이 실렸는데, 대부분 폴록의 작품을 비꼬는 평론들이었 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폴록의 작품은 계속해서 팔려나가게 됩니 다.

폴록의 명성은 오래지 않아 유럽으로도 뻗어 나갔습니다. 1950년에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에는 〈1A번, 1948년>을 비롯한 작품 석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비엔날레와 때를 맞추어 구겐하임은 베네치아의 다른 곳에서 폴록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평론가 브루노 알피에리는 폴록의 작품은 매우 혼돈스럽지만 피카소마저 과거의 화가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고 평가했는데요. 이 말을 들은 폴록은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1950년 7월, 사진작가 한스 나 무트가 폴록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찍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폴록의 화실로 찾아옵니 다. 폴록은 마지못해 하며 차기작인 〈가을의 리듬> 제작 과정을 촬영해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나무 트는 주말마다 폴록의 화실을 찾아와 5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서 폴록의 섬세한 움직임과 드립 페인팅 과정을 담았습니다.

〈가을의 리듬>은 캔버스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빈 곳 없이 구석구석 꽉 채우고 작품의 모든 구성요소가 동일한 수준의 관심과 중요성을 갖게 하는 ‘올 오버 페인팅’ 기법을 완벽하게 연출해 낸 작품입니다. 작품의 어떤 부분도 우세를 점하지 않고 유연한 흐름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폴록은 그림에 쓰는 색채를 제한하고 몇 가지 요소들만 두드러지게 만들어서 그것들이 가진 본질적 특 색들을 드러냈습니다. 초벌칠을 하지 않은 거친 캔버스와 흠뻑 물든 검은색 얼룩들, 하얀 물보라처럼 뿌 린 페인트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황갈색 캔버스와 구불구불한 황갈색 드립들은 황혼 같은 계절의 따스하고 그윽한 빛을 띠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귀중한 가치는 풍부하고 모호한 연상들에 있는데요. 황갈색 V자 모양의 붓질들은 날아가는 새들이나 춤추는 인물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울증과 싸워야 했던 폴록이었지만 그의 드립 페인팅은 삶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나무 트는 사진을 500장이나 찍었지만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무 트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를 원했고, 폴록을 설득하여 탁 트인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영화 촬영은 숱한 재촬영을 요구하는 지루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나 푸트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내서 폴록에게 유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나무 트는 구덩이 위에 유리 를 걸쳐 놓고 구덩이 안에서 촬영을 하여 폴록의 행동을 가까이에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뚫어져 라 쏘아보고 있는 카메라에게 감시당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폴록은 점점 위축되어 갔습니다. 무의식 적인 이미지와 그림과의 내밀한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했던 폴록에게 감독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고 그 림을 그리는 척해야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촬영을 위해 자세를 잡는 일은 폴록에게는 위장이나 속임수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영화 촬영이 끝나자 크레이스 너는 영화 촬영 종료를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서 폴록은 한동안 마시지 않던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한 폴록은 나무트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요리가 올려져 있던 식탁을 엎어버렸다고 합니다. 폴록은 이 사건 이후로 신경쇠약 증세를 보 이게 되었습니다. 영화 촬영은 일종의 예리한 심층조사가 되어 그의 작업 방식을 철저히 발가벗겼고, 이 로 인해 자신감을 잃게 된 것입니다. 1956년 8월 11일, 폴록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차를 운전하다 가 나무를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폴록의 죽음은 ‘미국의 대표적인 반사회적 예술가’라는 폴록의 신화적 지위를 한층 더 확고히 했습니다.

미국의 미술은 폴록에 이르러 비로소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미술이 되어 전 세계를 주도하는 국제적 양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확립한 폴록의 작품은 미술사에서 수많은 이론적 논쟁의 원천이자, 동시에 이후에 발생한 여러 미술운동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폴록은 20세기 후반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액션 페인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전위적인 회화운동으로, 순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우연성의 효과를 새로운 미의식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는 1952년 로젠버그가 자신의 저서 《미국의 액션 화가들》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액션 페인팅은 처음에는 잭슨 폴록이나 빌렘 데 쿠닝과 같이 제스처를 중시하거나 드립 페인팅을 사용 한 회화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곧 최초의 미국적 전위미술이라 인정받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 거의 같은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액션 페인팅 화가들은 우연히 생겨난 모양을 이용하는 기법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완성된 작품의 미적 가치보다는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묘사된 결과보다는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또한 움직임에 중점을 둬 화면은 자연히 거대해집니다. 폴록 이외에도 유동적인 선이나 형태가 초현실주의에 연결되는 아실 고르키, 평탄한 삭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마크 로스코나 아돌프 고틀리브 등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액션 페인팅 기법을 즐겨 사용하였 습니다. 말하자면 액션 페인팅은 완성된 작품에서 미적인 가치를 구하기보다는 예술가가 현실의 장에서 표출하는 행위에 가치를 두며, 회화를 그린다는 순수한 행위 자체로 환원시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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