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생애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은 긴 생애 동안 주변 인으로, 그리고 예술적인 기인으로 살면서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중 개자였습니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기묘한 이미지로 형상화했습니다. 자유로운 몽상가이면서 동심이 가득한 내면세계를 지닌 인물, 그리고 외로운 이방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그의 삶과 예술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과 모국에 대한 사랑이 담긴 그의 작품들은 현대사회 가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기를 바라는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마르크 샤갈은 1887년 7월 7일,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벨라루스의 비테프스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홉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모이셰 하츠켈레프 세갈이었는데, 그가 유대인 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성을 큰 걸음이라는 뜻의 샤갈로 바꾸었고, 훗날 파리로 떠났을 때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마르크 샤갈로 바꾸었습니다.
샤강의 가정은 하시디즘 유대교를 믿는 독실한 집안이었습니다. 신유 대교라고도 하는 하시디즘은 18세기 초 동유럽 국가에서 유대인 사이 에 전파된 종교인데요. 정통 유대교의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신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강조하면서 크고 작은 모든 사물과 선하고 악 한 모든 사람에게서 신성한 불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혁신운동입니다. 이 종교는 죄인의 영혼이 사후에 말 못하는 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샤갈의 작품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 하는데, 이는 하시디즘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는 동유럽의 유대인 사회로, 작고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나무로 만들어진 집과 전원적인 분위기, 그리고 가난함과 같은 동유럽 유대인 공동체인 슈테틀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당시 러시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샤 갈의 어머니 페이가 이타는 샤갈이 유대인 초등학교를 마치자 교사에 게 뇌물을 주고 그를 공립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그래서 샤간 힘든 노동과 동족 중심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초 라한 환경에 얽매이는 대신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말하였습니다.
작품활동
1906년에 비테프스크에서 화가 예후다 펜의 화실에서 공부하였던 샤 간 1907년에 러시아의 수도 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화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1908년, 샤갈은 즈반체바 미술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서유럽과 상징주의 회화를 옹호하는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 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던 레온 박스트가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후 기 상징주의 그룹의 정기간행물 『예술세계』를 창간한 박스트에게서 샤 갈은 예술가로서 갖춰야 할 감각과 새로운 시각적 표현방법을 배웠습니다. 1908년에 그린 앉아 있는 붉은 누드는 매우 강렬하고 독창적인 작 품인데요. 샤갈은 나체를 정면으로 그려 중량감 있는 육체적 특징을 노 골 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그렸던 마리아스카의 초상화에서 보인 습작 같은 소심한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지요. 인습에 얽매이지 안 고 붉은 색조와 녹색의 화초를 대비한 것은 샤갈이 당시 프랑스 회화, 특히 앙리 마티스에 이미 정통했음을 암시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습작 시절 샤갈은 미래의 작품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될 마을의 정경과 농부의 생활, 작은 세상에 관한 친밀한 시선과 같은 주제와 모티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경제력과 명성을 얻을 가능성이 많은 자유로운 대도시의 생활이 고향에서의 삶과 뚜렷이 대비됨을 깨달은 샤갈은 비로소 슈테틀을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1909년에 그린 가족 혹은 모성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물들이 짓고 있는 평온한 표정과 자연스러운 동작은 엄숙 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유대교의 일상적인 의식을 시대를 초월한 성상 화의 안락함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림의 구도는 대사제와 성모자, 요 셉이 등장하는 예수의 할례의식을 담은 전통적인 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샤갈은 일상의 풍경에서 성서 이야기를 형식적인 구도로 차용함으로써 그림을 우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는 소박함과 상징적으로 구현된 형식 사이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기교를 유지했습니다. 이 기법은 당시 그의 우상이었던 폴 고갱이 남태평양에서 그린 예수탄생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1909년 가을에 샤갈은 유대인 상인의 딸 벨라 로젠펠트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하였고, 곧 연인이 되었습니다. 1909년에 그린 러시아의 결혼식은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벨라를 만난 샤갈의 개인적인 행복 을 반영한 작품입니다.
이방인의 파란 많은 삶
당시 러시아의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들은 조국인 러시아보다 파리에서 더 빨리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희와 음악가, 작가, 화가들로 조직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은 장엄하고 이국적인 분 위기를 연출하며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유럽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힘입어 러시아 출신의 화가인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와 바실리 칸딘스키, 리투아니아 출신의 조 각가 자크 립시츠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모든 예술가들이 모더니즘의 발상지인 파리에서 경험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샤갈은 1910년 가을, 러시아의회 민주당 의원이었던 막심 비나베르의 후원을 받아 동경하던 파리로 떠 나 마르트르에 첫 번째 화실을 꾸렸습니다. 드디어 파리의 미술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 는 폴 뒤랑뤼엘의 갤러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고, 베른하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고갱과 고흐의 원작을 보았으며, 가을에 열린 살롱전에서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이렇게 거장들의 작품을 접한 샤갈은 루브르에서 나는 불확실성에 종지부를 찍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911년에 그린 본성 II(투)은 입체파를 향한 샤갈의 첫 번째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여성의 치마와 탁자 모서리의 각진 모양에서 입체파의 표현방식이 특색 있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외형의 추상적인 핵심을 넘어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성은 염소를 데리고 덕수 염이 난 남성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며 방어하는 남성은 여성의 허벅지를 움켜쥐며 그녀를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분노와 남성의 두려움이 몇 백 년을 이어온 구도의 기교에 의해 전달되고 있는데요. 즉, 책을 읽을 때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샤갈을 입체파와 관계를 맺게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로베르 들 로네였습니다. 사물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피카소나 브라크와 같은 정통 입체파의 시각은 샤갈과 들로네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달랐습니다. 샤갈과 들로네는 입체파가 평면의 캔버스 위에 표현하려 했던 실제 물체의 독자적인 기품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입체파의 표현방식은 단순한 기 능성을 넘어서서 세상의 불가사의한 힘, 사물의 신비로운 생명 력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인 언어였습니다. 입체파는 그들에 게 기하학적 도형, 꿈, 체험, 욕망과 환상 등을 이해하기 쉬운 시각적인 논리로 재창조하는 방법을 제공했습니다. 상상 속의 실체는 복잡한 것이어서 적절한 표현수단을 필요로 했는데, 파리에 머 물던 시절 샤갈은 입체파가 사용한 복잡한 형태에서 그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파리 남부에 있는 몽파르나스에는 12면체로 된 벌집 모양의 라 뤼세라는 이색적인 건물이 있었는데요. 이곳은 예술가들의 화실 겸 숙소가 있는 집단거주지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샤갈 역시 1911년에 라 뤼세의 작업실로 이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인 1914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 샤갈이 완성한 표제적인 작품인 나와 마을은 라 뤼세에 머물던 시절에 그린 작품입니다. 샤갈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끌 어낸 모티프를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생생한 통일성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그림은 네 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각각 사람과 동물, 나무로 대표된 자연과 마을로 대표된 문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기하학적 배치는 주제에 질서를 부여하기에 충분합니다. 입체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두 가지 충격적인 기법인 모 티프의 병렬배치와 형상의 투명성은 이 작품에서 기억과 환상, 다양한 현실의 단편들에서 이미지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시도되었습니다. 이 작품에 그려진 모습들은 모두 샤갈의 기억에서 나온 것입니다. 샤갈은 자신의 심리에 의존하는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구상적인 외 관만 강조하는 입체파의 방식을 이용하였습니다.
샤갈은 내가 비테프스크의 어린 시절에 맛본 요리의 기쁨을 마침내 파 리에서 표현할 수 있었다.라고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샤갈은 파리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세계와 행복의 감정,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을 털어놓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작품세계를 초자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출발한 개념이 그 시대의 이름이 된 초현실주의입 니다. 아폴리네르는 샤갈이 전시를 열 수 있도록 몸을 아끼지 않고 애쓴 은사였는데요. 샤갈은 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로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샤갈은 아폴리네르를 신비로운 느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문자판을 암시하는 둥근 구도 안에 사과를 든 아담과 이브가 서 있는데, 두 인물은 마치 한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 한 명이라는 신화적인 부분과 함께 아폴리네르의 이름과 흙, 공기, 불, 물의 4 원소의 언어적 상징이 씌어 있습니다.
샤갈의 서명도 모음이 생략된 비밀스러운 암호와 같은 형태로 씌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샤갈은 다양한 비의를 신비스럽게 융합함으로써 여 러 문화 속에 이어져 온 예술에 대한 기원을 충족시키려 했습니다. 이 것은 말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시에 가깝습니다. 지금 보시는 작품은 1913년에 샤갈이 파리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모 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다양한 색의 물감을 짜 놓은 팔레트를 들 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 그림은 자신이 최고의 걸작으로 꼽은 러 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입니다. 그림 속 샤갈은 가슴에 꽃을 달고 수를 놓은 넥타이를 맨 맵시 있는 신사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은 당시 파리를 지배하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각진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이는 7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왼쪽 창 밖으로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보이는데요. 이는 현재 샤갈 이 머무르고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 벽에는 샤갈이 회상하고 있는 러시 아의 고향마을 비테프스크의 풍경이 구름 위에 떠 있습니다. 샤갈의 머리 위에 히브리어로 '파리'와 '러시아'라고 쓰고는 이를 희미하게 처리해 놓았는데요. 이로써 자신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한 화면 안에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1914년 6월 13일, 샤갈은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연인인 벨라를 만나기 위해 3개월 만기의 여행자 비자로 러시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경이 폐쇄되었고, 몇 주 정도로 예 상했던 체류기간은 8년으로 연장되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뒤에 그린 스몰렌스크의 신문을 보면 신문이 높은 탁 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신문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습니다. -1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은 아마도 신문에 실린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산모를 쓰고 서유럽인의 옷을 입은 왼쪽의 젊은 남성은 걱정이 가득해 보입니다. 전통적인 옷차림에 수염을 기른 오른쪽의 중년 남성은 수 심에 잠겨있는데, 자신의 종족인 유대인들에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적의와 고통이 반영된 표정입니다. 1915년 7월 25일, 샤간 몇 년 동안이나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벨라와 고향인 베티프스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비록 시대는 혼 란스러웠지만 샤갈 부부는 행복했습니다.이듬해에 벨라와의 사이에서 딸 이다가 태어났고, 샤갈은 이 기쁨을 산책이라는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첫딸을 얻은 기쁨을 아내 벨 라가 하늘에 떠 있는 모습으로 대범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빨간색과 초 록색의 두 계통의 색을 진하고 연하게 변화를 주어 표현함으로써 맑은 동화와 같은 세계를 그려냈습니다.마을은 기하학적 형태의 목초지와 입방체 같은 가옥들로 이루어져 있 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이 움직임을 묘사할 때와 같이 처리된 벨라의 치 마 주름은 경쾌하고 동적인 효과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꽃무늬 가 있는 왼쪽 아래의 천에는 교회를 반영하는 포도주병과 잔 하나가 놓 여 있습니다. 샤갈은 손에 작은 새를 쥐고 있는데, 이는 벨라가 가장 좋 아했던 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소설 『파랑새』에서 따온 것입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권이 러시 아를 점령하게 되었고,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샤갈은 1918년 9월, 비 테프스크 미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샤갈은 전시회를 기획하 고 미술관을 열었으며 비테프스크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생 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샤갈은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갈등에서 회화에 서는 현실과 연결된 모든 것을 버려내야 한다고 주장한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 결국 1920년에 미술인민위원직에서 사퇴한 샤갈은 가족과 함께 비테프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갑니다. 샤 갈은 모스크바 유대인 극장에서 디자인을 맡았는데, 수입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샤갈의 가족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 다. 1923년에서 1924년에 제작된 초록의 바이 올 리 니스트는 음악을 묘사한 모스크바 극장의 벽화 그림을 옮겨 그린 것입니다. 샤갈의 그림 에서 이올리니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고달픈 예술가를 비유하기도 하고, 유대인의 모든 축제와 의식에서 바 이올린이 쓰였기 때문에 유대교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예술가를 지원할 때 작품이 정치적으로 유용한가 를 기준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샤갈이 지급받는 보조금은 매우 적었습니다. 예술가 등급을 결정하는 말레비치가 샤갈을 낮게 평가했 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모든 것을 억압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 속에서 환상의 힘을 호소하는 샤갈의 생각은 주목받지 못하였습니다. 샤갈은 새로운 체제가 자기와 다른 예외적인 것을 존중하는 자세가 부 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돈과 성공, 장래성까지 없었던 샤갈에게 더 이상 러시아는 머무를 이유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조국에 환멸을 느낀 샤갈 은 1922년, 러시아를 영원히 떠납니다.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가난한 생활을 지속하던 샤갈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파리의 저명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샤갈에게 러 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영혼』의 삽화를 의뢰하였습니다. 이 에 샤갈은 1923년 9월 1일,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 후 10년 동안의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화상 베른 하임과 계약을 하면서 금적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윤 택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샤갈은 1924년 파리에서 첫 번째 회고전이 열었고, 1926년에는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점차 샤갈의 작품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이 늘어가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갔습니다.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인 앙드레 브르통은 사갈은, 오로지 샤갈만이, 은 유가 성공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을 그린다.라고 하면서 샤갈의 시인은 로서의 자질을 칭찬하며, 그를 초현실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샤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의 힘에 경도되는 것은 미적 가치관의 유행에 영합하여 고의로 비합리성을 과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30년대 말로 접어 들어가면서 유대인에 적대적인 나치의 법령은 점점 강화되어 가고 있었습니 다. 1938년에는 독일에 있는 뮌헨과 뉘른베르크, 베를린의 유대교 회당들이 파괴되었고, 1,500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독일에서 벌어진 이러한 사건들은 샤갈이 백색의 십자가 제작에 더욱 관심을 쏟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샤갈은 십자가 위의 예수상에 인간의 형상을 한 기독교 신의 죽음을 상징화함으로써 당시의 고뇌를 드러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용 숄을 허리에 두른 예수는 머리를 숙이고 두 눈을 감고 있습니 다. 성화를 연상시키는 스타일로 서로 다른 폭력적인 장면들이 십자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요. 십자 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모습 위에는 구약성서의 인물들이 눈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유대인 마을을 파괴하러 몰려들고 있고, 불에 타오르는 가옥들은 뒤집혀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구조를 요청하는 피난민들을 태운 배 한 척이 표류하고 있으며, 나치 제복을 입 은 남자는 유대교 회당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 한 명은 행낭을 지고, 다른 한 명은 율법서인 토라 두루마리를 껴안고 달아나고 있습니다. 수염 난 노인이 목에 두른 플래카드에는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씌어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덧칠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각선의 하얀빛이 예수의 머리를 둘러싼 후광에서부터 십자가 발치의 촛대까지 내리비치고 있습니다. 고통의 흔적은 사라지고 십자가 위의 예수의 수백 년 된 권능은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현실의 사건 속에서 희망으로 가는 길처럼 여겨집니다. 샤갈은 믿음은 절망의 산도 옮길 수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1940년에 프랑스 정부가 나 치아 휴전협정을 맺게 되면서 프랑스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샤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1941년 6월 23일, 샤갈은 뉴욕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가지각색의 이국적인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있던 이 대도시에 매혹되었습니다. 미 국에서 샤갈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망명해 온 다른 미술가들과 함께 작 품을 전시했고 무대장치 디자인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뉴욕은 파리의 뒤를 이어 미술계의 중심으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생활한 지 3년이 지난 1944년 9월, 아내 벨라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인생의 동반자를 잃게 된 샤갈 은 큰 충격과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벨라의 남동생 아론의 결혼식을 그린 결혼식은 벨라의 사망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린 작품인데요. 작품 전체가 불길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표 현되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무감각하게 서로 기대고 있고, 천사 음악가는 혼례음악으로 마치 죽음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개인적인 슬픔이 당시 계속되고 있던 불길한 전쟁과 더불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샤갈의 그림은 모두 벨라의 죽 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샤갈은 1923년부터 제작을 시작한 천사의 추락을 1947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원래 그는 유대인과 천사의 모습을 그려서 이 세상에 악마 가 존재한다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표현할 계획이었으나, 그림을 완성한 1947년에 러시아의 작은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모티프들을 혼합하였습니다. 또한 성모와 십자가 위에 예수와 같은 기독교적인 이미지까지 더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은 유대인 특유의 환상,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세상을 반 바퀴나 돌아야 했던 샤갈의 개인적인 인생 이야기와 더불어 예수의 속죄 모티프까지 모두 일체화되어 샤갈의 전 작품을 요약하는 표제가 되었습니다. 1948년, 샤갈은 완전히 프랑스로 돌아와 생제르맹앙레 근처의 오르주발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1952년에 발렌티나 브로드스키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 결혼은 샤갈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은 대중적인 흥미를 일으키게 되어 계속해 서 명성을 키워가게 됩니다.
샤갈은 다시 성서 삽화 작업을 재개하였고, 천장화, 모자가크, 스테인 드글라스 작업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샤갈은 수많은 작품을 의뢰 받았는데요. 대표적 인 작업으로 예루살렘대학 의료센터에 있는 유대교회당의 스테인드글 라스, 파리 오페라하우스의 천장화, 시카고 체이스타워에 있는 모자이 크 벽화 사계 등이 있습니다. 샤갈은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종교 영 역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유대교회당이나 성당 등에 공평하게 사용했습니다. 샤갈은 생애 마지막 20년간을 남프랑스의 생폴드방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1985년 3월 28일, 9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샤갈은 20세기 예술가들 가운데 전혀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 을 조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수백 년에 걸쳐 서로 멀어져 버린 종교와 예술적 이데올로기의 간극을 메웠습니다. 현대 예 술의 한가운데에서 많은 예술사조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하나의 유파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샤갈은 눈부 신 색채로 시적인 호소력을 담아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낸 캔버스 위의 시인이었습니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샤갈은 종종 피카소와 만나 함께 도자기를 만 들며 친분을 쌓아나갔습니다. 샤갈은 피카소를 향한 마음을 담아 1914년에 피카소를 생각하며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어깨를 곧추 세우고 다리를 쫙 편 채 기울어진 집을 받치고 있는 피카소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 뒤인 1921년, 샤갈은 피카소에게 진절머리가 난 샤갈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그리게 됩니다. 이 작품은 피카소를 생각하며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피카소의 머리 위에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요. 이 사람은 아마도 샤갈 자신의 모습일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던 샤갈과 피카소가 심한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급기야 마음이 상해버린 샤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하보니 다. 그 후에 샤갈은 피카소에게 진절머리가 난 샤갈이라는 작품을 그 였는데요. 자신은 피카소처럼 뛰어난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샤갈이 피카소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을 통 해서라도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정작 피카소는 샤갈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였으며 누구보다도 뛰어난 천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샤갈은 피카소를 지나친 경쟁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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