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매혹적인 여성들, 흩날리는 머릿결, 흘러내리는 옷감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논할 때 언급되는 대표적인 요소입니다. 무하는 19세기가 저물고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의 가장 매혹적인 예 수리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일러스트레 이터였으며, 조각과 보석 디자인, 실내장식과 실용미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특히 장식용 작품에서는 진정한 재능을 보여주었는데요. 이 분야야말로 무하의 화려한 명성이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명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알폰스 무하는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하나인 체코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법원의 하급직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이미 한 번의 결 혼을 통해 1남 2녀를 두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귀족자제들을 가르쳤던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무하에게 예술과의 첫 만남은 그림이 아닌 음악을 통해서였습니다. 독 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로 인해 마을의 성당에서 성가와 춤을 배 우며 자란 무하는 타고난 음색 덕분에 열 살 즈음에는 수도원에서 기숙하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브르노의 성 페트로브 수도원의 성가대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무하의 작품에 보이는 리드미컬한 선과 신비감은 그의 음악적 재능과 함께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바로크 성당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4년 동안 교육을 받던 무하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지 못해 수도원을 떠나야 했습니다. 고향인 이반치체로 돌아온 무하는 법원의 서기로 취직하였지만 체질적으로 사무적인 일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홀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가고자 되도록 많은 시간을 그림과 관계되는 사회활동에 쏟 았는데요. 아마추어 극단을 위해 무대와 극장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릴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배우 겸 연 출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879년, 무하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무대장식공방인 카우츠키 브리오시 부르크하르트에서 화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작품을 몇 점 보내 지원하였습니다. 얼마 뒤 합격 소식을 받은 무하는 짐을 꾸려 빈으로 향했습니다.
무하는 빈에서 중요한 두 가지 만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역사화가이가 장식예술가인 한스 마카르트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빈에서 절대적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요. 황제의 전폭 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마카르트는 회화는 물론이고 패션, 인테리어, 장식미술에 이르는 도시 외관의 모 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무하는 여가시간 동안 미술학교에서 야간수업을 수강하였는데, 여 기서 빈 미술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마카르트의 스타일을 공부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극장과의 만남이었는데요. 무하는 공방의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었고, 극장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자 자신을 단련시키는 교습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81년 12월, 공방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링 극장의 화재로 공방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방의 일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었던 무하는 그곳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미쿨로프로 가서 마을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을 이어가던 중 이 지역의 대지주였던 쿠엔 백작으로부터 엠마호프 성의 실내를 장식하기 위한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았습니다. 당시까지 프레스코 화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무하에게 이 작업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쿠엔 백작의 서재에는 그가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이 많이 있었고, 무하는 성실히 프레스코 기법 하나하나를 익혀 나갔습니 다. 무하의 작업을 지켜보던 쿠엔 백작은 이 성실하고 재능 있는 젊은 화가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하였 습니다. 그는 무하를 티롤에 사는 자신의 동생 에곤 백작에게 보내 더 좋은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던 에곤 백작은 무하가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도록 지 원해주었습니다.
1885년부터 2년 동안 뮌헨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무하는 다시 미쿨로프로 돌아왔습니다. 무하가 계속해서 미술공부를 할 수 있기를 원한 쿠엔 백작은 그에게 미술공부를 위해 로마로 갈 것인지 파리로 갈 것인지를 물었는데요. 무하는 주저없이 파리로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무하는 벨 에포 그의 화려한 파리와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작품활동
세기말을 풍미한 아르누보의 거장
1887년 파리로 간 무하는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가를 목표로 화가수업 을 받았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정원과 가로수길, 시장과 기차역 등에서 사람들의 몸짓과 움직임, 경치 등을 스케치하며 지칠 줄 모르는 탐구에 빠져들었습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무하에게 색채나 형태와 같은 기술적인 문 제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관점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국제적인 도시 파리에서 소수민족인 슬라브인 예술가로서 무하는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민족주의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체코의 민속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 심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눈뜨게 되었습니다.
한편, 무하를 후원하던 쿠엔 백작은 1889년에 재정적인 지원을 중단하기도 결정하였습니다. 무하의 소 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쿠엔 백작이 일 년이 넘도록 한 점의 작품도 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났던 것인지, 이 젊은 화가가 세상에 나가 좀 더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고 독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정적 지원이 끊어진 무하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습니다. 1894년 겨울, 잡지에 삽화를 그리면서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던 무하에게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84년 12월 26일에 당대 가장 유명한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가 주신이 주연하는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주문하기 위해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매니저에게 전화했을 때 무 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 인쇄소에서 교정쇄를 감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르메르시에 인쇄 소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연말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유명 여배우의 다급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포스터 제작은 무하에게 맡겨졌습니다. 무하는 연극 마지막 장의 장엄한 행진장면을 기본 모티프로 활용하여 빠른 속도로 실물 크기의 포스터를 완성하였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 싸여 연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무하의 포스터는 베르나르를 매료시켰습니다. 1895년 1월, 파리의 광고 선전탑에 걸린 무하의 포스터는 곧 파리 전 역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처음 선보이는 폭이 좁고 세로로 긴 판형의 실제 크기와 거의 유사한 유명 배우의 형상은 극적인 효과를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원색적인 다른 포스터들과는 달리 파스 텔 톤의 투명한 색채와 명암으로 채워진 포스터는 비잔틴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배경과 화려한 중세풍의 의상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무하의 재능을 알아본 베르나르는 서둘러 그와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후 6년 동안 무하는 베르나르를 위해 연극 포스터를 제작하였으며, 이 작품들은 그 자체로 연작을 형성했습니다.
포스터들을 살펴보면 약 2m 높이의 폭이 좁고 세로로 긴 판형, 양식화 된 윤곽선으로 그린 인물의 모습, 작품 상단과 하단의 장식문자, 배경의 장식적 구성과 같은 요소들이 모두 단일한 양식과 구성원칙으로 표 현되었습니다. 무하의 포스터 덕에 베르나르는 프랑스 국경을 뛰어넘어 널리 인기를 모으는 배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901년까지 무하는 베르나르의 포스터뿐만 아니라 그녀가 공연하는 르네상스 극장의 무대장치와 의상, 보석과 소품까지 담당하였습니다. 그가 참여한 르네상스 극장의 연극들은 계속 흥행했고, 이미 파리의 유 행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무하가 제작한 이국적이고 화려한 의상과 소품들은 극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극의 낭만성을 높여 주었고, 화려한 의상과 보석에 반한 중산층의 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하의 작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눈부신 성공은 무하에게 사회적 명성을 가 져다 주었습니다. 엄청난 성공에 힘입은 무하는 1896년에 파리의 샹프누아 인쇄소와 장식패널 제작을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장식패널에서도 포스터의 구성원칙이 바탕이 되었는데, 무하는 공간의 대부분을 표현력이 풍 부한 인물로 구성했습니다. 순수미술과 실용미술의 경계에 있는 이 장 식패널 작품들은 다량으로 인쇄해 널리 배포되었고, 연극무대에 세워져 장면연출을 위한 배경그림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각 각의 모티프는 미술엽서로도 인쇄되어 작품의 대중적인 인기에 기여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황도 12궁〉입니다. 마치 눈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듯한 관을 쓴 여인의 섬세한 옆모습은 사람들에게 신비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굽이치는 머리칼과 머리 뒤에 있는 열두 개의 별자리와 함께 작품 속 여성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별자리를 살짝 가리며 수줍게 가지를 뻗은 월계수 잎사귀와 식물 줄기를 연상시키는 장식무늬가 그림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처음 샹프누와 인쇄소의 달력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세간의 인기를 끌어 1889년에는 프랑스 소설가이자 시인인 레옹 데샹이 창간한 잡지 『라 플륌』의 달력으로도 판매되었습니다.〈황도 12궁〉과 같은 해에 제작된 연작 패널화 〈사계〉는 사계절을 상징하는 각기 다른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봄꽃으로 화관을 얹은 봄의 여인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에 맞추어 수금을 뜯으며 더할 나위 없는 봄의 서정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태양만큼 이나 붉은 양귀비꽃을 머리에 꽂은 여름의 여인은 작은 발로 수면을 유 희하고 물가에 자라난 수풀의 어린 가지에 기대어 의식에서 몽환으로 이어지는 여름 한나절의 나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도를 수확하는 달콤한 가을은 그윽한 국화 향이 그 취기를 더하고 있 고, 동장군이 지배하는 겨울에서 여린 가지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의 숲 은 작은 새들까지 떨게 합니다. 그러나 새들은 여인의 품에서 날개를 접고 여인의 입김으로 추위를 녹이고 있습니다. 무하는 연작 장식패널로 큰 성공을 거두고, 뒤이어 여러 가지 연작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들 작품에는 상징성을 지닌 여인과 세심하게 선택된 자연이 무하만의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무하 양식’이 시작되었고, 파리의 성공한 예술가이자 파리 아르누보의 주창자로서 무하의 입지는 확고해져 갔습니다.
무하의 대중적 인기는 광고 분야에서도 그의 이름을 중요한 위치에 올 려놓았는데요. 그는 많은 대기업의 광고 포스터들을 제작하였습니다. 무하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고운 살결에 풍성한 머리카락, 몸체를 이루는 풍만한 곡선에 우아한 의 상을 입은 그녀의 모습에서 동시대 여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 같은 이 여인들은 한창 소비가 급증하던 여성용 향수나 코르셋 같은 여성용 제품의 광고 모델로 적격이었습니다. 무하는 끊임없이 의뢰를 받았고, 이에 비례하여 수입도 점차 늘어갔습니다. 무하는 엄청난 양의 상업 포스터와 장식패널을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이와 함께 책과 잡지를 위한 일러스트는 무하의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르누보의 정수이며 유행의 첨단에 있던 잡지 『라 플륌』이나 『코코리코』, 『레스탕프 모데른』의 표지는 무하의 그 림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밖에도 무하의 일러스트가 실린 책과 잡지는 무려 250여 권에 달하였습니다.
. 슬라브 민족의 대서사시
포스터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재능을 알리게 된 무하는 마침내 파리 유행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 습니다. 그에게는 장식패널과 광고 포스터, 잡지 커버, 레스토랑 메뉴, 엽서와 달력에 이르기까지 각종 의뢰가 넘쳐나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무하는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여 주며 아르누보의 ‘총체 예술’ 이 념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가장 독창적인 아르누보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899년, 무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1900년에 개최될 파리 세계박람회에 선보일 보스니 아-헤르체고비나관의 실내장식을 의뢰받았습니다. 이 의뢰를 받았을 때 무하는 망설였습니다. 당시 보 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합병된 상태였는데 요. 실내장식 작업을 수락하는 것이 마치 게르만의 슬라브 지배에 굴복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무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관의 내부를 남슬라브의 향상심과 민족적 전통을 찬 양하는 방향으로 디자인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발칸반도를 두루 여행하며 역사와 풍습을 채취하였 습니다.
이 여행은 무하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언제나 무하 자신은 체코 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국을 떠난 타향살이에서 자신을 지탱해 준 것도 슬라브 민족으로서의 자각 이었습니다.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인류 공통의 유대와 평화를 위해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이상적인 슬라브를 그려내는 한 편의 서사시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빠르게 지나가는 유행으로 인해 시대의 예술적 기호도 변화하고 있었고, 어느덧 아르누보는 절정 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무하는 자신에게 소망을 넘어 소명이 되어버린 슬 라브 민족의 고통과 영광을 위한 슬라브 서사시 제작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 해서는 먼저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계획적으로 경제생활을 꾸려가지 못했던 무하의 수중에는 그의 필생의 작업을 위한 자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무하의 머리에 떠오 른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베르나르가 재정적 위기에 부딪혔을 때마다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 부유한 미 국의 지지자들을 통해 기금 마련에 성공했던 사례에 희망을 가지고 무하는 1904년에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였습니다.
1904년부터 1909년 사이에 다섯 번 미국을 방문한 무하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사교계의 인기 있는 손님이 되었지만, 명성만큼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미국 체류 초기 무하는 장식미술에 대한 주 문을 일절 사절하고 상류사회 인사들의 초상화를 주문 받아 제작하였는데요. 지난 10여 년간 유화를 거 의 그리지 않았던 무하가 갑자기 잡게 된 유화 붓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작업속도는 더뎌졌습니다. 또한 장사 수완마저 없었던 무하는 의뢰인의 파산이나 무책임으로 작품을 완성하고서도 팔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미국에서의 초조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무하는 점점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1905년부터는 뉴욕여자응 용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강의를 하 였습니다. 또한 타고난 성실함으로 유화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갔으며, 미국 상류층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장식미술 일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무하는 미국의 부유한 사업가 찰스 리처드 크레인의 두 딸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크레인에게 슬라브 서사시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습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사업가였던 크레인은 국제정세에 밝았고, 특히 슬라브 민족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남달랐습니다. 이러한 크레인에게 슬라브 민족을 위한 체코 화가의 열정이 넘치는 계획은 마음을 끄는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요. 크레인은 기꺼이 〈슬라브 서사시〉 제작을 후원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1910년, 고국으로 돌아온 무하는 스무 개의 에피소드에 슬라브의 역사를 그려내는 〈슬라브 서사시〉 작 업을 위해 슬라브의 역사와 종교,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였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발칸반도를 여행하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스케치에 담았습니다.〈슬라브 서사시〉는 잘 짜인 각본처럼 각각의 장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섯 개의 알레고 이적 테마와 다섯 개의 종교적 테마, 다섯 개의 전쟁 장면과 다섯 개의 슬라브 문화에 관한 장면으로 이 루어 졌으며, 그중 열 개는 체코의 역사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슬라브 국가의 역사에서 선택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 평화와 종교적 자유에 있어 인류사에 공헌한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그려내면서 무하가 꿈꾸었던 것은 모든 슬라브 민족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팽배해 가던 범 게르만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고취하는 선창가였습니다.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에 몰두하고 있던 때에 유럽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세계 어디서나 열강들의 아귀다툼으로 말미암은 충돌이 있었고 유럽에서는 팽창하는 독일을 중심으로 범 게르만주의라는 명목으로 많은 전쟁이 벌 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1918년에 무하는 11점 의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이듬해 프라하의 클레멘티눔에서 전 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1921년에는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무하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다섯 점의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되었을 때 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전시회에 다녀간 사람들은 # 체코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라브 민족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926년에 무하는 스무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대서사시를 완 성하였습니다. 후원자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지지 속에 강한 의지와 성 실함으로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기에 걸쳐 필생의 작업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슬라브 공통의 유대와 이상적 평화를 바라는 한 화가의 끈질 긴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았고, 1928년, 무하와 크레인은 〈슬라브 서 사시〉 전 작품을 조국에 기증하였습니다.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자유를 찾은 듯 보였던 무하의 조국에는 또다시 전쟁의 위협이 드리워졌습니다.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히틀 려는 1938년에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시킨 이후 호 시탐탐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1939년 3월 15일에 프라하를 침공하였습니다. 〈슬라브 서사시〉가 담고 있는 민족주의로 인해 당시 나치가 가장 눈에 거슬려하던 애국인사 중 한 명이었던 무 하는 곧바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일 년 전부터 앓았던 폐렴에 나치의 체포와 구금, 고문 등으로 인한 후유증이 더해진 노령의 무 하는 결국 1939년 7월 14일, 79년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세기말 한 시대의 양식을 선도하고 뜨거운 애국심과 인류애를 가슴에 품었던 거장의 죽음에 사람들은 깊은 애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하의 장례식에는 서슬 퍼런 나치의 감시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10만여 명 의 인파가 참석하여 체코를 사랑한 거장에게 안녕을 고하였습니다. 무하가 남긴 작품 중 상당량은 상업 포스터였습니다. 무하의 포스터가 당시 상품구매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 시 수많은 기업들이 무하의 포스터를 원했고, 지금까지도 많은 광고에 그의 이미지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무하의 포스터를 그토록 원했던 것이며, 그의 작품은 도대체 어떤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요? 1890년대 파리에서는 자전거가 대유행이었는데요. 공기를 넣은 고무 타이어가 실용화되면서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여가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무하가 그린 〈페르펙타 자전거 광고 포스터〉를 보면 자전거에 몸을 기 댄 채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거친 붓질로 완성된 여인의 머리칼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며 화면을 채우고 있고, 그녀의 머리 위에 쓰인 브랜드명은 너무도 선명하게 우리의 머리에 각인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인은 우리의 눈을 응시하며 함께 자저거를 타고 봄의 미풍을 즐겨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포스터 디자이너인 장 드 팔레오로그가 제작한 뤼지 자 전거 광고 포스터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연상시키는 고전적 여인이 등장에 자전거를 들고 있습니다. 또한,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라 쉔느 생송 자전거 광고 포스터는 경주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작가의 광고 포스터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자전거 그 자체 입니 다. 얼마나 기능적이고 빠른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 자전거 광고 포 스터는 페르펙타 자전거 광고 포스터에 비한다면 왠지 인상이 흐릿합 니다. 당시에는 많은 자전거 회사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아마도 비슷한 성능과 가격을 두고 경쟁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전거를 선택하게 될까요? 당시 심리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룬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소비자가 상품을 손에 넣으려 할 때 유명한 심벌을 가지고 싶어 하느냐 아니냐가 소비에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페르펙타 자전거 광고 포스터 속 여인은 그 자체로 자전거의 심벌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하가 그린 포스 터 속의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무하’라는 브랜드를 소비하게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특정 대중스타의 이미지가 기업이나 상품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무하가 살 던 시대에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이렇게 무하는 거의 100여 년 전의 사람이었지만 광 고에 있어 그 감각은 매우 현대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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