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1825)생애
1789년 7월 14일은 프랑스에 있어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이 날은 바로 국민들이 특권 계층을 몰아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띄었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민주주의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혁명을 극단적으로 치닫게 했던 계기가 한 화가의 작품 때문이라고 한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어요? 특히 이 화가는 프랑스혁명 이전에는 루이 16세의 궁중 화가였고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공화국을 선포한 혁명정부의 공식 화가였으며, 이후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제일 화가까지 맡게 되며 승승장구하게 되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인 이 화가의 정체는 바로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의 군림하였던 고전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다비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왕궁화가였던 다비드가 프랑스혁명의 단두대에서 살아남았으며 그 이후로도 전혀 다른 이상을 가진 혁명정부의 화가, 나폴레옹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걸까요?
자크 루이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요. 금속상이었던 아버지는 재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으며 어머니 또한 유명한 건축가 집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비드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다비드는 건축가였던 외숙부들과 함께 살게 되었으며 상류층의 환경에서 고급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다비드가 법률가가 되거나 외숙부처럼 건축가가 되기를 원하였는데요. 다비드는 꿋꿋이 화가의 길을 고집하였다고 합니다. 다비드의 작품이 프랑스 미술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는데요. 19세기 초 프랑스 미술의 발전과 함께 다비드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이후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앙투안 장 그로를 비롯한 19세기 중엽의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다비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
비드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화가였는데요. 프랑수아 부셰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영향아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774년, 스물여섯 살 때는 당시 화가들이 동경하던 로마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로마 대상을 수상한 후 다비드는 1775년~1780년 동안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다가 파리로 돌아왔는데요. 이 시기가 바로 프랑스에 혁명의 기운이 막 싹트기 시작하던 무렵 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입니다. 1780년대의 파리 살롱은 다비드에게 쏟아진 찬사와 경탄으로 가득 차있었는데요.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다비드에게 이 작품을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습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 제1권에 나오는 호라티우스가 의 삼 형제가 아버지 앞에서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엄숙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슬퍼하는 부인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결의에 가득 찬 아들들의 모습에서 오직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고자 하는 군인의 의지가 나타나
고 있습니다. 특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기법적으로는 다비드가 로마에서 유학을 하던 시기에 몰두했었던 고전미술 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작품이며, 내용적으로는 애국사상을 훌륭하게 표현하여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웅적이고 극적인 주제와 고대의 조상이나 부조에서 모범을 얻은 엄격하고 균형 잡힌 조형성이 서로 어울려서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1785년 7월에 이 작품을 파리의 살롱에 출품하였는데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전 유럽인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다비드는 순식간에 국제적인 유명화가로 위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다비드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최고의 역사 화가였는데요. 단 혁명 이전까지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다비드는 공화국을 선포한 혁명정부의 공식 화가가 되었으며 급진적인 자코뱅파에 가담하여 미술가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권력을 누렸는데요. 시간이 지나자 다비드는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을 섬기는 황제의 제일 화가로 또다시 변모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다비드는 나폴레옹 황제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작품들을 그려냈으며,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아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요.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비드는 1816년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하여야 했으며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825년 12월 29일 타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다비드는 전 유럽을 놀라게 만들었던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변모로 인해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벨기에에서 숨을 거둔 어리석은 삶을 살았던 화가이기도 합니다. 다비드의 작품은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화가의 삶은 작품과는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작품활동
위대한 화학자를 단두대로 보낸 선동화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신 작품은 다비드의 1793년 작 마라의 죽음입니다. 이 작품 주인공인 마라는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시민들을 위해 끝까지 희생하다가 처녀 코르테에 의해 암살을 당한 위대하고 비극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그림 속에 쓰여 있는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를 부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글귀를 통해 그 숭고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신기하게도 마라의 죽음을 세 점이나 그렸는데요. 예술 작품을 남기려는 의도보다는 민중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보고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프랑스혁명은 극단적으로 치달았고, 작품 속 주인공이었던 마라는 숭고한 희생을 했던 인물로 칭송받는 데 성공하게 되었죠. 그런데 사실 이 작품 속에는 어마어마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저와 함께 작품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함께 파헤쳐 볼까요?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은 한 급진적 혁명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마라는 고질적인 피부병으로 피부가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 욕조에서 집무를 보는 때가 많았는데요. 살해당했을 당시에도 욕조에서 집무를 보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살해 무기로 보이는 바닥에 떨어진 칼, 칼에 찔린 가슴의 상처, 코르데가 보낸 편지 등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한 것처럼 그려져 있어 마치 살인 사건의 실제적인 기록으로 보입니다. 당시 이 그림이 프랑스 사회에 미쳤던 영향은 실로 지대 하였는데요. 다비드는 화면의 반 이상을 어둡게 한 뒤 낮게 숙인 마라의 머리에 관객의 시선을 모아 애통함과 분노를 일으키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마라의 머리 위에 위치한 어둠으로 죽음을 표현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었으며 동시에 오른쪽에는 어렴풋한 빛이 비치도록 하여 마라의 순교에 의한 결과로써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라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볼까요? 살해당한 마라의 얼굴은 아직 혈색이 돌아 시체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괴로움도 없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시체가 편지와 펜을 들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편지를 쥔 손과 펜을 든 채 늘어져 있는 팔이 마치 여전히 집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기 있게 표현되었는데요. 이것은 시민의 영웅이 초췌한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다비드의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가슴에 난 상처는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상처를 연상시키며 머리에 두른 수건은 마치 성인의 후광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마라의 손에 들린 편지는 살해자 코르데가 보낸 것으로 “1793년 7월 13일, 마리 안느 샤로테가 시민 마라 씨에게, 제가 너무나 비참하여 당신의 친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적혀있는데요. 이러한 편지 내용을 마라의 손에 들린 다비드의 의도는 확실합니다. 청렴하고 헌신적인 마라는 병환 중에도 불구하고 욕조에서까지 국민을 위해 일하였으나 코르데는 고통받는 시민으로 위장하여 잠입하였고, 마라는 죽는 순간까지도 불쌍한 시민으로 위장한 살인자를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알자마자 곧바로 마라의 죽음을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1793년 11월, 의회에 전시하였습니다. 그림을 본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는데요. 다비드는 마라가 속했던 자코뱅파가 너무 잔인하다고 불평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자신의 편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마라의 죽음은 당시 마라와 같은 급진적 자코뱅파에 있던 다비드에 의하여 교묘하게 미화된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사실 확인을 위해 마라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 장 폴 마라는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마라는 불에 대한 연구 결과에서 불이 입자 같은 물질이라고 주장하였는데요. 이 주장을 들은 당시의 위대한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마라의 논리와 실험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마라의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학술원이었던 한림원 입성을 반대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마라는 한림원과 라부아지에를 적으로 여기고 앙심을 품게 됩니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자 마라는 「시민의 친구」라는 신문을 발간하여 혁명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마라는 위법적인 비방과 폭력을 주장하였는데요. 왕당파뿐만 아니라 같은 공화주의자 중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달리 진적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적으로 몰고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라는 이렇게 급진적인 폭력 혁명을 선동하여 1789년 9월 피의 대혁명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요. 그 여세로 국민회의에 입성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단두대에서 처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라부아지에에 앙심을 품고 있던 마라는 라부아지에가 가난한 시민의 세금을 착취하는 악덕 세 금징수원이었다고 고소하였고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의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던지며 라부아지에를 사형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라는 온건한 혁명주의자였던 지롱드 파에 속한 스물네 살의 시골 처녀 샤를 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당하게 되었습니다.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마라의 죽음에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또 한 명의 주인공입니다. 코르테는 루소 등의 저작을 읽고 혁명적 시민 사상에 심취하여 공화주의자가 되었으나 피의 혁명이 아닌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여 지롱드 파의 청년당원이 되었는데요. 코르데는 파리에서 자코뱅파가 득세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소식을 듣고서 폭력과 숙청이 공화국을 세우는 데 오히려 해가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코르데는 이러한 잔인한 숙청 운동의 중심에 있는 자코뱅파의 지도자인 마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는데요. 그 길로 파리에 올라와 마라의 집을 방문하여 욕조에 있던 마라를 살해하였습니다. 코르데는 곧 체포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았는데요.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의연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공화국을 위해 순교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영웅이 되었습니다. 후에 코르데는 자신의 소원대로 마라와 평판이 뒤바뀌며 프랑스혁명의 중요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다비드의 예술과 마라의 죽음은 전문가, 지식인, 국가, 개혁 등 여러 가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공인은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요.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고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방향을 바꾸게도 합니다. 다비드가 그린 뛰어난 회화 덕분으로 마라의 시체는 역사적 위인들과 같이 판테온에 안장되어 2년간 시민의 애도를 받았는데요. 마라의 급진적인 사상과 피를 부른 폭력적 선동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가 이루어지자 마라를 암살했던 코르데의 평가와 희비가 뒤집혔습니다. 지금은 마라를 잔인한 인물로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마라의 살해사건은 사랑이 없는 정의는 인류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며,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근대화학의 어머니에 대한 헌화
1794년 5월 8일,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자 코뱅파의 마라와 다비드에 의해 단두대에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수학자 라그랑주는 이 사건에 대해 그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일은 한순간이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만들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라부아지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다비드가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위대한 화학자 라부아지에처럼 마담 라부아지에는 근대화학의 어머니로 불려지는데요. 지금부터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의 초상을 감상하면서 화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부부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의 초상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위대한 과학자를 그린 거의 유일한 그림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당연히 라 부아지에 일 것 같지만 화면을 보면 주인공이 마리인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주인공인 마리를 바라보고 있고, 마리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 있게 웃으며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요. 라부아지에의 다리가 책상보 밑으로 힘차게 뻗어 나와 있는 것이 라부아지에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유일한 요소로 보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실험 기구는 연소 반응에서 줄어드는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장치이며, 발 밑에 있는 기구는 연소 반응에서 발생한 기체를 모으는 장치인데요. 이 두 가지 기구를 조합하면 기체를 분리하여 무게를 측정하는 유디어미터 장치가 됩니다. 방 안에 놓인 실험도구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부아지에는 매우 뛰어난 화학자였는데요. 1764~1770년 한림원 회원인 게타르와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의 광물지질도를 완성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학자였습니다. 라부아지에는 그 공로로 1768년 불과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 한림원 회원이 되었으며, 1775년에는 탄약국장이 되어 초석 제련법을 개선하여 프랑스 화약 제조 수준을 유럽 최고로 끌어올렸고, 1787년에는 세계 최초의 화학 학술 잡지 『화학연보』를 간행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라부아지에의 가장 큰 업적은 연소 반응에서 산소의 역할을 밝히고, 화학반응에서 물질보존의 법칙을 규명하는 등 근대화학의 토대를 만든 것인데요.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화학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동시대의 프랑스혁명에 견주어 화학 명이라고도 불려집니다.
라부아지에의 연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연소를 설명하는 주된 이론은 플로지스톤 이론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불꽃을 뜻하는 플로지스톤은 종이, 숯, 황처럼 잘 타는 가연성 물질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으로 알려져 왔는데요. 플로지스톤을 많이 함유한 물질일수록 더 잘 타는 성질을 가지며 어떤 물질이 연소하여 재가 남고 무게가 가벼워지는 이유가 플로지스톤이 물질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믿었던 이 가설에 대해 라부아지에는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1778년경 라부아지에는 연소하면 무게가 더 증가하는 금속의 연소ㆍ산화 반응에 대한 실험을 규명하고 무게가 감소하는 연소 반응에서 발생하는 기체를 모아 감소한 무게를 측정함으로써 연소는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이란 것을 밝혀냈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이와 같은 새로운 화학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책을 출판하였는데요. 동료 화학자들과 협력하여 낡은 화학용어를 고쳐서 낸 『화학명명법』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학용어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어서 화학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화학원론』을 출판하였습니다. 라부아지에는 한림원에 들어간 1768년에 세금징수원 조합에 가입하여 법률가이자 금융가인 자크 포제의 열세 살 된 외동딸과 결혼하였는데요. 이 사람이 바로 라부아지에만큼 위대했던 아내 마리입니다. 마리는 많은 재능을 지닌 여성이었는데요. 그림에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서 다비드에게 미술을 배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를 근대화학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근대화학을 출발시킨 라부아지에의 『화학원론』에 기여한 공로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마라가 그린 열세 개의 도판이 포함되었는데 대단히 정교하고 예술적인 수준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유용하여 후대의 화학자들이 이 도판들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리가 세운 또 하나의 업적은 바로 리처드 커완 의 『플로지스톤에 대한 에세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인데요. 라부아지에는 이 번역 덕분에 플로지스 톤설 논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라부아지에와 장인 자크 필제가 세금징수원 경력으로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마리는 라부아지에의 실험 노트, 실험 기구 등을 모두 찾아서 정리하여 8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후 출판하였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생전에 제1권을, 그것도 겨우 시작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실험 조수, 연구 동료, 도서 사서, 삽화가, 편집자, 출판가, 번역가, 비서, 영양사, 격려자 등 마리를 빼고는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마리의 역할이 컸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화학에 있어 굉장한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마리는 근대 화학의 어머니로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부부를 그린 유일한 초상화가 라부아지에를 죽음으로 몰아간 다비드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